스코필드박사 내한 100주년.jpg

                 2016년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LA  기념 전시장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함께

 

 

스 박사와 김포공항3.jpg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 주년을 맞아

                                                                 김수영

      2016 2 22 오전 11시에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이 열렸다. 기념사업회 의장이신 정운찬 국무총리는 스코필드 박사의 증손자와 함께 스코필드 박사의 은공을 기렸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1889-1970) 한국명이 석호필(石虎弼)로도 알려졌다.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1916년에 우리나라에 왔다. 세브란스 대 병리학 교수로 세균학과 병리학을 강의하셨다. 세브란스 의전의 아비손 총장이 스코필드 박사를 초청해서 그가 설립한 의과대학 강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1919 우리나라 3.1 독립운동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이갑성 옹의 간청으로 스코필드 박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돕기로 결심했다. 특히 경기도 수원군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의 학살 현장 등을 사진을 찍어 세계에 알린 우리나라의 유일한 외국인 애국자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현장을 목격하여 사진을 찍은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는 사진 기록들을 한국을 빠져나가는 선교사 편에 전달 전세계에 알리도록 부탁했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하여 3.1운동에 민족대표34인으로 참여, 일인주간의 영어신문에 익명으로 일본정책을 비난하는 기고, 제암리 사건 현장 답사 기록, 3.1 운동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 일본 동경 극동지구선교사전체회의에서 3.1운동을 알림, 유관순 열사 3.1 운동 관련 복무자 방문 격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의 위대한 애국자이시다.

 

     일본 당국의 눈의 가시였던 스코필드 박사는 추방 절차에 따라 결국 그는 1920년 캐나다로 추방당해 돌아갔다.

 

     이승만 박사가 우리나라 첫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스코필드 박사를 한국에 초빙하여 1958년에 다시 한국에 들어 오게 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살아생전 그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세균학과 병리학의 권위자였다. ‘디큐머룰이란 혈액 응고제를 발견해 수의학계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이렇듯 자기의 전문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그가 왜 가난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당하는 우리 민족을 구하려 고생을 사서 하시며 우리민족과 동고동락 하시기를 기뻐했을까. 물론 예수님 때문이다.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 믿는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셨기 때문이다.

 

     6.25 전쟁 후 가난했던 중, 고등,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특히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서 기독교인들이 다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장학금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서 그 고마움을 못 잊어 스코필드 박사 추모 재단과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스코필드 박사에게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많은 장학생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되어 사회에 이바지하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다. 유네스코 전 총장이던 이삼열 박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필자도 1957년에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그 다음해인 1958년에 스코필드 박사님을 서울의대 구내에 있는 외국인 교수회관에서 처음 만나 뵙게 되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시며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몸이 불편하시니 도움이 필요하실 것 같아 자주 찾아뵙고 영어 성경 공부도 하고 설립하신 보육원에서 통역을 도와드렸다. 장학금 모금을 위해 밤늦게 세계 각국에 편지 쓰시는 것 도와드리면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동생 김영교 시인과 함께 도와 드렸으나 동생은 곧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으로 훌쩍 떠난 뒤 나 혼자 도와  드렸다.

 

    이승만 박사와 절친한 독립운동 동지였지만 부정부패로 선거를 치르자 힐난한 비평을 하셨다. 세계 각 영자신문에다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평하는 글을 올렸다. 나에게도  복사본을 주어 50년 넘게 간직하고 있다

 

    정운찬 전 총리도 스코필드 박사님 때문에 만나 뵙게 되었고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드리고 스코필드 박사의 친필 편지 몇통을 반세기 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달라고 하셔서 드렸다. 정운찬 전 총리님은 친필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모두 잃어 버렸다면서 참 귀한 자료라면서 기뻐하셨다. 동생과 함께 서울대학교 교수실에서 정운찬 전 총리를 처음 찾아뵙고 사진과 편지를 전달하고 문밖으로 인사하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 타는 데까지 나오셔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시는 것 보고 적이 놀랐다. 서울대 총장을 막 그만둔 뒤였는데 어찌 이런 겸손이 나올 수 있을까 싶어 생각해 보았는데 역시 스코필드 박사님의 가르침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스코필드 박사님도 참으로 존경하지만 정운찬 전 총리님도 존경한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이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믿음의 멘토셨다. 살아생전 요한복음 12 24절의 한 알의 썩은 밀알의 비유를 늘 말씀하시면서 희생정신을 심어 주셨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지(), (), ()를 갖추신 훌륭한 인격자였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셨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을 싫어 하셨고 찰스 디킨스의 크리마스 케 롤에 나오는 스크루지도 싫어하셨다. 인간의 양심을 저 버리고 비 인도적 물질만능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싫어하였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님과의 추억을 더듬어 보면 불의와 부정부패에는 호랑이처럼 단호히 항거하셨지만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성자였다. 자기는 원래 비둘기였는데 일본의 만행과 대한민국의 부정부패가 자기를 호랑이로 만들었다며 비둘기의 보드라운 털은 다 뽑히고 호랑이 털로 바뀌었다며 유머를 잊지 않으셨다. 장학금 기금 모금을 위해 세계 각국에 여행 가실 때도 그 도시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엽서를 사셔서 꼭 소식을 전하시는 자상함을 잊지 않으셨다. 특히 스위스에 가셨을 때 알프스 산에서 자라는 에델바이스꽃을 말려 만든 액자를 사 오셔서 선물로 주셨다. 너무 감사해서 스코필드 박사와 에델바이스의 추억이란 수필을 써서 수필집 늘 추억의 저편에 올렸다. 너무나 자상하시고 인정이 많으셔서 만나 뵐 때마다 감동 그 자체였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1960 12월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훈장(The Order of Cultural Merit of the Republic)을 받으시고 서울시장으로부터 행운의 금 열쇠를 증정받으셨다. 훈장을 가슴에 달고 행운의 금열쇠를 들고 기념사진을 크게 찍으셔서 사진틀에 넣으셔서 기념으로 간직하라면서 사진 액자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지금도 내 응접실 벽난로위 벽 한가운데 걸려있다.

 

    1968 3 1일에 캐나다 대사로 부임한 백선엽 대사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A Medal for National Foundation)을 스코필드 박사에게 수여하였다. 그때 찍은 사진은 목걸이처럼 목에 거는 훈장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님을 만난 인연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고 시인과 수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가슴 아프게 잊히지지 않는 추억이 있는데 스코필드 박사님이 ‘The Happy Prince’란 동화책을 주시면서 번역을 해 달라고 하셨는데 끝내 번역을 못해 드린 것이 죄책감마저 든다. 그 당시 필자는 이 동화책이 아일랜드 출신 작가 Oscar Wilde(1854-1900)의 대표작이란 것을 몰랐고 이 작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이 동화책을 읽고 난 후 스코필드 박사님이 왜 번역을 부탁하셨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참으로 감동을 주는 동화책이었다. 픽션이긴 해도 주인공 행복한 왕자는 스코필드 박사님의 롤 모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전도용으로 사용하시려고 부탁하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자기 전문분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자기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시고 가난하고 압박당하고 부정부패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며 온마음과 몸을 바쳐 사랑하셨다.

 

외국인 교수회관 이층에 초라하고 조그마한 겨우 싱글 침대 하나 놓고 책상 하나 놓고 책 좀 진열해 놓은 것이 그의 소유 전부였다. 장학금도 일일히 편지 써서 세계 각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호소하여 도움을 받아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했다.

 

     스코필드 추모 장학재단에서는 캐나다 온타리오 겔프대학 수의과 대학에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의 흉상을 조각하여 기념관에 비치했다. 또한 토론토 동물원안에 스코필드 박사 추모공원에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1916년에 한국에 오신 스코필드 박사님은 올해 2016년이 꼭 100 주년이 되는 해다. 1970 4 12일에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서거 46주년이 되는 해다. 정운찬 전 총리는 내한 100주년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내달 4 12일에 큰 기념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참석을 못해 아쉽지만 6월에 엘에이에 오셔셔 스코필드 박사 기념회 행사를 하신다고 하니 그때는 꼭 참석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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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캐나다 토론토 스코필드 박사 추모 기념회의 밤 행사에서 동생 김영교 시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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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스코필드 박사 추모기념회 마치고 인사 나누다. 서울대 총장이신 정운찬 박사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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