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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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달즙 / 수필

2021.07.08 19:30

민유자 조회 수:9

달즙

 

 시카모어Sycamore7)온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물 좋기로 유명한 유황온천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200마일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 샌 루이스 오비스포San Luise Obispo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 가까운 항구, 아빌라Avila 비치 입구에 시카모어 온천이 있다.

 

 1월의 날씨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청하고 온화했다. 해변도로 Fwy 101을 달리는 동안, 맑은 하늘과 태평양의 고운 물빛, 시원한 수평선, 흰 구름이 그려내는 그림들, 망설임을 무릅쓰고 떠나길 잘했다고 거듭 생각했다.

 

 정오쯤 호텔에 도착. 차에서 내리니 벌써 유황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자그마한 아빌라 포구는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잔잔한 물결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적당한 간격을 둔 요트들이 흰 대를 빛내며 항구의 품에 가득히 조는 듯 떠 있다. 피어8) 끝까지 걸어 나갔다. 여름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많거나, 고깃배가 드나들지는 않으며, 음식점도 붐비지는 않았으나 피어 끝에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한 사람의 물동이를 들여다보니 노란색의 조기 비슷한 크로커와 흑도미 다섯 마리가 들어있다.

 

 피어를 거의 다 걸어 나왔을 무렵 방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각 방에는 숲에 면한 발코니에 온천탕이 있어 마음대로 온천을 할 수 있다. 물을 틀어놓으니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많이 고이니 물은 맑은 풀빛이었다. 반신욕을 오래 하여 땀을 충분히 빼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바닷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다행히 바다 쪽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방금 해가 떨어진 뒤여서 하늘이 주홍빛에서 분홍으로 다시 보라색에서 푸른 회색으로 변했다. 물빛도 따라서 푸르다가 희게 변하여 은색 바다가 되었고 다시 회색이다가 검게 변했다. 드디어 캄캄해지자 바다와 배들은 어둠에 싸이고 낮에는 보이지 않아 수평선인 줄 알았던 먼 육지의 불빛이 한 줄로 나타났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기가 없어 물결이 잔잔했지만, 낮에는 듣지 못했는데, 물결이 굴러들어와 방파제에 부딪는 소리가 우르릉 크게 들렸다. 동쪽 갈매기형 검은 능선의 폭 파인 곳에서 잘 익은 망고의 속 살 빛 금달이 빠끔히 내다보는 중이다. 눈을 모으고 가만히 바라 보고 있자니 쑥쑥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크고 둥근 달이 모습을 다 드러내자 떠올랐다.

 

 달을 마주 바라보고 서니 달은 내 앞으로 선뜻 금빛 물결무늬 카을 쭈욱 깔아놓는다. 마치 달이 밤바다의 검은 물결 위로 길을 놓아주며 “내게로 오려무나.” 부르는 듯하다.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하고 눈을 감았다. 선뜻 황홀한 금물결 카펫 길로 내려서 뛰어가 달을 안고 입 맞추었다.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농익은 망고의 과즙처럼 달콤한 달즙이 내 마른 입술을 적신다. 코끝에 향기가 스민다. 50년 전, 고향의 가을밤. 첫 입맞춤에 혼비백산 중에도 달콤했던 입술의 그 잔상. 눈을 뜨니 달은 여전히 또 오라 부른다.

 

 어제는 그렇게 날씨가 맑더니 오늘은 보슬비가 내린다. 김이 오르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성근 담장 밖의 숲을 바라보니 젖은 참나무와 시카모어 사이로 안개가 그윽하다. 머리를 젖히니 차가운 보슬비가 달아오른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는 느낌이 상큼하다. 

 

온천물은 처음 고였을 때는 맑은 풀빛이었다가 한 시간 가까이 지나니 신기하게 부연 흰색으로 변했다.

 

 촉촉한 빗속을 달려오는 길에는, 얕은 구릉을 타고 널린 포도 밭, 길고도 가지런한 밭고랑의 경작지들, 너른 풀밭의 소 떼들이 한가롭다. 서로 숨바꼭질하듯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의 작은 동산들. 노란 마른풀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참나무들의 푸르름이 수를 놓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가벼운 여행은 세상의 소용돌이 분진이 빠져나가서 마음의 고요를 되찾는 좋은 비결이다. 지금 다시 눈을 감고 아빌라 포트의 포근한 품 안에서 달빛이 내려앉은 금물결 카펫과 농익은 달즙을 생각하며 입술을 핥아본다.

 

 

 

7) 시카모어Sycamore - 온천 이름, 단풍나무 종류의 활엽수.
8) 피어 - 바닷가에서 바다 쪽으로 반 마일 정도 나가도록 나무다리를 놓은 것. 2차 선 도로 양옆으로 선착장과 상가 음식점이 있다.

https://youtu.be/38V6W_Jps_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