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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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집으로 가는 길 / 수필

2021.07.09 11:22

민유자 조회 수:9

집으로 가는 길

 

 엘에이 시내에서 5번 고속도로 북쪽으로 20여 마일 가면 동서로 길게 가로지르는 산맥을 만난다. 프리웨이 서쪽은 산타 수사나산이고 동쪽은 샌 가브리엘산이다. 인가가 전혀 없는 이 산맥을 완전히 넘어서야 마을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 이곳이 일명 발렌시아라고 불리는 산타 클라리타 밸리다.

 

 내가 산타 클라리타로 이사 온 것은 1985년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번화하고 큰 고장이 아니었다. 왼편에는 참나무가 군데군데 서있는 구릉과 마른 산들이 겹겹이 겹쳐있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들이 있었다. 오른쪽은 나무 울타리가 처진 마구간과 시골식 큰 창고 건물이 덩그러니 하나 있고 평지는 양파 밭이 대부분이었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서 발렌시아에 산다고 하면 어딘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매직 마운틴4) 있는 곳이라고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멀리 사느냐고 했다.

 처음 이사 갔을 때는 딸아이가 7학년이었는데 아시아인은 학교 전체에 3명밖에 없었다. 학급에는 이곳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아이들 중에 35마일 밖의 엘에이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학생이 여 있다고 했다. 슈퍼마켓 주차장의 차량들이 승용차보다 트럭이 많았고 농부 차림이나 목장의 카우보이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사업체가 엘에이에 있었기 때문에 삼십여 년 이곳에 살면서 매일 이 산맥의 고개를 넘어 다녔다. 이 고개는 지역적인 행정상의 경계가 되기도 하지만 기후상으로도 구분이 뚜렷하다. 엘에이나 산퍼난도 밸리와는 기온차가 많아 더울 때는 더 덥고 추울 때는 더 춥다. 사막성 기후에 가까워 건조하고 맑은 날이 많고 일교차가 심하다. 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스모그가 전혀 없는데 비해 남쪽은 대도시에 연해 있고 산퍼난도 밸리가 약간 분지에 속하므로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면 스모그가 구름처럼 덮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봄과 가을에 맑고 화창한 우리 동네만 생각하고 시원한 옷차림으로 엘에이를 가면 하루 종일 떨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북쪽에 사는 우리는 한여름 옷을 입고 가고 남쪽 바닷가 토렌스에 사는 사람은 겨울옷을 입고 나타나 서로 손짓하며 웃는 일도 벌어진다.

 

 이십여 년 줄기차게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출근을 하려면 보통은 한 시간이면 되던 것을 1994년 대지진 때에는 고속도로의 교각이 끊어져서 두 시간 반이나 걸려야 갈 수 있었다. 교통사고는 심심찮게 늘 있는 일이고 산불도 해마다 나서 교통에 지장을 준다.

 

 언젠가 퇴근 시간이다. 그날도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거북이 행진을 했지만 고속도로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고가 나게 마련임을 경험으로 잘 아는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너무나 시간이 오래 지체되다 보니 소변이 점점 급해졌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이럴 때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일도 쉽지 않다. 참다 보면 풀리겠거니 생각하고 진땀을 흘리며 기다리는데 경찰이 차선을 막고 하나씩 줄여나갔다. 차선을 둘을 지나 셋까지 막았을 때는 상당히 큰 사고가 났으리라 짐작하고 걱정 중에도 호기심에 목을 빼어 밖을 내다보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결국 편도 5차선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차례로 모두 막고 차들을 출구로 몰아냈다. 가뜩이나 붐비는 퇴근 시간에 그렇게 오랫 동안의 통행 차량을 전부 쫓아냈으니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입술을 깨물고 노래진 얼굴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마땅한 화장실을 찾아 해결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고속도로에서 쫓겨나기 전 마지막에 우리가 본 광경은 추돌 사고로 찌그러져 나동그라진 차량이 있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이나 불이 나서 연기를 뿜어내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자동차가 하나도 없는 넓은 고속도로엔 볕바른 양지에 말리려고 일부러 펴놓은 듯 노란 오렌지가 하나 가득 널려 있었다. 오렌지를 고 가던 컨테이너가 넘어진 게다.

 

 산타 클라리타의 동구 밖 문턱이 되는 이 고개를 넘어서면 언제나 집 동네에 거의 다 왔다는 푸근한 마음이 인다. 멀리 후레이져 파크의 높은 산은 늘 보는 풍경인데도 아침, 저녁 시간에 따라 그림이 다르다. 겹쳐서 한 덩어리로 보이던 산들도 하늘의 구름이 부리는 조화에 따라 조명이 달라지면 각각 살아서 겹겹이 튀어나오면서 다른 모습의 입체적인 새 모습이 된다. 같은 장소라도 때마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움이 있다.

 

 어느 곳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규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풍기는가 하면, 통화 중에 반드시 전화가 끊어지는 곳이 있다. 어느 부분은 봄가을엔 늘 안개를 품고 있어 안개가 제일 먼저 피어 나고 제일 늦게 걷힌다. 바람 부는 날이면 자동차가 휘청 날아갈 듯 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지점도 있다. 1년에 꼭 몇 번씩 사고가 잘 나는 길목도 있다. 출근 시간 강렬한 아침 햇살로 교통이 정체되는 곳도 있고, 퇴근 시간 석양에 넘어가는 붉은 해를 배경으로 팜트리가 절묘한 포즈로 손짓하는 명당도 있다.

 

 집으로 가는 이 길에서 간발의 차로 생명을 건 위험으로부터 아슬아슬 비껴간 일도 수없이 많았다. 처음 운전이 서툴 때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한눈을 팔고 부주의로 진땀나는 일이 더 많았다. 또 늘 피곤했으므로 얼마나 많이 졸며 다녔는지 모른다. 집이 멀어서 다급하고 초조하여 안타까웠던 일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그 시간에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고, 주체할 수 없던 감정들을 삭였고, 곰곰이 앞일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살아온 후반기 삶의 여정이이 길과 함께 이어져 왔다.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름길에서나, 내림 길에 서나, 비바람 중에서도 내 사랑하는 가족을 담은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한결같이 더없이 행복했던 정든 길이다.

 

 정작 하늘 본향으로 가기 전까지 이 길을 얼마나 더 다닐지 모르지만 지금 이사를 간대도 내 평생 이 길만큼 정든 길은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서 유년을 보낸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든 고향길이 되기도 할 게다.

 

4) 매직 마운틴 - 디즈니랜드처럼 위락시설이 있는 곳.

 

https://youtu.be/nCLbMZgJ7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