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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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쓸 만한 권고 / 수필

2021.07.09 12:04

민유자 조회 수:7

쓸 만한 권고

 

 지난가을, 수년째 거듭된 가뭄으로 절수령이 떨어진 이곳에 반가운 비가 내렸다. 아직은 우기도 아닌데 그것도 억수같은 비가 갑자기 내려 잠시지만 도로가 침수되고 정전되는 사태가 나던 날이다. 도로가 물에 잠겨서 저만치 길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바짓가랑이와 신발을 적시고 걸어왔다면서 오라버니가 내게 클라리넷을 덜컥 건네주고 갔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악보를 읽을 수 없다. 보통 한 가지를 열심히 노력해서 10년은 연마해야 기본을 제대로 익힌다는데 그 것도 젊었을 때의 얘기일 터이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라지만 요즘의 나는 눈도 침침, 머리도 깜빡깜빡, 팔다리도 허청거리는 지경이다. 옛날에 마흔에 매지근, 쉰에 쉬지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옛날 같지 않으니 20년을 뒤로 물린다 해도 그 고비를 훌쩍 넘은 나이다. 그것이 나의 남은 생을 불사르려는 열정에 불을 지필만한 강력한 소망이 있었다면 또 모를 일이다.

 

 배부를 때 주는 떡처럼 그냥 밀어놓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오라버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술한 발에 염증이 생겨서 어쩌고저쩌고하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라버니는 이삼일 간격으로 내 수술 경과도 물을 겸 자꾸 채근했다. 해보고 나서 싫으면 그만두라며 왜 해보지도 않느냐고 하니 폭우를 뚫고 가져다준 성의를 생각할 때 더 이상 변명할 염치가 없다.

 

 유년 시절에는 때가 오기도 전에 서둘러 어른 흉내를 내고, 청 년 시절엔 제철이 오기도 전에 계절을 성급히 앞질러 맞았고, 장년에 들어서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결실을 욕심냈었다. 그 세월 다 어디 가고 지금은 가버린 계절을 좇으려 허둥지둥, 세월의 꽁무니를 잡으려 허겁지겁, 시간이 모자라 탄식하는 노년의 문턱에 서있지 않은가.

 

 아이 적엔 하루는 빨리 가고 한 달, 1년은 더디 간다 하고 이에 비해 노인은 하루는 더디 가고 한 달, 1년은 빨리 간다고 한다. 아니 1년은커녕 지난 10년을 돌이켜봐도 어느새 금방 지나가버렸다. 그러니 앞으로 내 남은 생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예전에 하던 일도 시간에 쫓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데 새로이 이것을 시작할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이왕지사 이렇게 악기까지 쥐어준 마당에 한번 해보지도 않고 거절할 염치가 없어 클라리넷을 꺼내봤다. 오라버니는 여분의 리드와 왁스, 스웹까지 세세히 챙겨 넣어주었다. 조립하여 불어보니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몇 번 불려고 애를 쓰다 보니 입술도 금방 부풀 듯 부어오르고, 손가락도 아프고, 어깨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는 외손주가 불던 연습용 클라리넷을 가져다가 불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던지 6개월쯤 되니까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가벼운 합주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를 보고 딸이 기꺼이 거금을 들여 새 클라리넷을 사주었다며 그 불던 것을 내게 준 것이었다.

 

 한쪽 발을 수술하고 3개월 후에 아직 수술한 발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발을 수술하여 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겨우 화장실 출입만 하며 지내고 책상 앞에조차 앉지 못하다 보니 자연히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다.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지만 눈도 좀 쉴 겸, 통증도 잊을 겸, 답답함도 달랠 겸, 클라리넷을 쥐었다 놓았다 하다 보니 어느새 동요도 되고 쉬운 복음성가도 되었다.

 

 클라리넷의 부드럽고 고운 음색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제 박자를 맞추어 제대로 불어서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전달할 수 있기까지는 내 수준으로는 아직도 멀다. 그런데도 한 소절씩 끊어서 자꾸 반복 연습하는 중에 전에 느끼지 못했던, 음악이 시와 어우러지는 흐름의 묘미를 새로이 느끼고 감탄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또 작곡자가 시에서 느낀 감흥을 음악적인 창작물로 옮기며 느꼈을 기쁨을 나도 조금은 나누어 맛볼 수 있다. 복음송가를 연습 하다가 울컥 눈물이 맺히기도 하고 동요를 불면서 솟는 기쁨에 발의 통증을 잠시 잊기도 한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흘러간 옛 가요를 연주하다가 그분들의 생애를 떠올리며 해도 해도 못다 할 참회에 젖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고 했듯이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 뛰어갈 때는 볼 수 없었던 순간, 가다가 서다가 천천히 쉬며 보니 보이는 이면의 것, 들리는 것 이외의 소리, 바람이 전하는 얘기들까지, 듣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노년의 축복이 이처럼 내게 허락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노년의 축복이 아무에게나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육신이 투덜대더라도 웃으며 오냐오냐 받아주어야겠다는 여유가 생긴다. 엄살 부리며 손사래부터 치고 못한다고 단정해 버릴 일만도 아니다. 어느 경지에 도달하려고 욕심 부릴 일도 아니니 그저 쉬엄쉬엄 여건이 허락하는 한 무료를 달래는 정도로만 하는 과정 속에서도 이런 기쁨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누릴 일이다.

 

 처음에는 클라리넷을 무거운 부담으로 여겼으나 ‘쓸 만한 권고’ 를 막무가내 사랑으로 채근한 결과, 가뭄으로 메말랐던 내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내리게 해주신 오라버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https://youtu.be/zvfEsb-U9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