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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발의 충성 / 수필

2021.07.09 12:32

민유자 조회 수:8

발의 충성

 

 우리 신체 중에 중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다. 많이 사용하나 적게 사용하나 간에 우리 몸의 어떤 부분도 꼭 필요하다. 그중에 발은 제일 많이 사용하면서 제일 보살핌을 적게 받는다. 위치적으로 몸의 제일 아래 끝 부분에 있어 눈과 손이 잘 닿지 않는 이유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전쟁 후여서 겨울엔 물이 귀했고 더운 물은 더욱 귀하여 매일 씻지 못했다. 양말이나 신발도 소홀했다. 옷은 여러 벌이나 신발은 그렇지 못했고, 옷은 기워 입지 않아도 양말은 다 기워서 신었다. 겨울 저녁이면 아버지가 신문을 읽는 동안 어머니는 일과처럼 양말 보따리를 풀었고 나도 어머니를 도와서 양말 속에 전구를 넣고 언니들과 솜씨를 겨루며 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에는 발이 제일 혹사를 당하던 시절이다. 웬만한 곳은 다 걸어서 다녔다.

 

 요즈음은 발도 호사하는 시대를 만났다. 뽐내고 자랑하며 드러내는 부위로 바뀌었다. 에나멜을 칠하고 발톱에 정교하고 예쁜 그림을 그려 넣고 반짝이는 인조 보석을 붙이는가 하면 목걸이나 팔찌처럼 금, 은장식의 발걸이도 하고 가락지를 끼기도 한다. 얼굴 못지않은 정성으로 발 마사지도 한다. 어떤 사람은 손보다 발을 더 치장하고 다니기도 한다. 엘에이는 여름이 길고 맨발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발을 치장하는 경향이 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위한다 해도 발은 몸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눌림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 손에 비하면 격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손 내밀어야 할 자리에 발을 내밀었다간 큰 모욕이 되지만 발로 해도 되는 일을 손이 하면 반대로 황송한 국면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발이 불평을 한다든지 발이 해야 할 임무에 게으름을 피우고 거부하는 일은 없다. 발은 언제나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또 충성스럽다.

 

 그러나 발이 가지 말아야 할 곳과 꼭 가야 할 곳을 분별하지는 못한다. 발길의 방향과 닿은 자국은 행 불행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인생을 좌우하며 생사를 가누는 길이 되는 데도 말이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남편은 눈에 띄는 대로 운동화와 양말을 사들인다. 각 회사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많은 상품들이 나와 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시간이 나는 한 매일 7마일 정도를 다. 뛰고 나서 체조로 몸을 풀고 나면 한 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집을 나가서 거의 정확한 시간에 집에 오는데, 죽 같은 땀을 뒤집어쓰고 들어오면서 언제나 작은 이야기보따리를 갖고 들어온다.

 

 상당한 거리를 돌아오므로 그간 동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본 것이 많다. 거리에서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기도 하고, 인접한 산에서는 방울뱀이 나타났다거나 코요테나 보브캣 등의 야생 동물을 만나기도 한다. 또 거리를 매일 뛰니까 동네 근처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지나가며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길에서 만나 잠깐씩 나눈 소식들도 있다.

 

 신체상의 문제들도 많다. 날씨가 더운 때는 옷이 땀에 젖었다가 다시 말라서 소금이 되어 뻣해지면 여기저기 쓸려서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맺히기도 한다. 다리에 쥐가 난다든지 갑자기 대소변이 급해질 때도 있다. 그중 제일 많은 문제는 발에 있다. 발이 견뎌나지를 못한다. 엄지발가락보다 다음 발가락이 조금 더 길어서 이 발톱은 자칫하면 시커멓게 죽어서, 수도 없이 빠지고 다시 나기를 반복한다. 아베베처럼 맨발로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양말과 운동화를 자꾸 사들이는 이유다. 남편의 발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전혀 특별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래도 발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날마다 임무에 충실하다. 고마운 발이다.

 

 이리도 충직하고 순하고 착한 발이건만 참고 참다가 화가 났다. 한 번 성이 나니 성질이 여간 고약한 게 아니다. 천만 뜻밖으로, 무척 예민할 뿐 아니라 고통의 강도가 생각 외로 깊고 강하다. 나는 무지외반증으로 인한 지간 신경종이 생겨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 염증으로 고생하며 무려 반 년 동안을 침대에서 뭉개며 지내는 동안 발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꼈다. 평생을 생각 없이 부려먹은 빚을 다 겠다고 위하는 데도 1년이 넘은 지금까지 발이 아직도 성냄을 풀지 않고 나를 골탕 먹이고 심술을 부려대고 있다.

 

 발이 성냄을 풀지 않으면 아무 곳도 다니지 못하고 일상조차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된다. 그 위력이 자못 세다. 그동안 내가 무심한 무자비로 학대하는 동안 발이 나를 위해 참아 냈던 만큼 나는 참아낼 자신이 전혀 없으니 쩔쩔매고 발을 위할 수밖에 없다.

 

 큰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 신체 부위 어느 곳도 중하지 않은 데가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그러나 뼈저린 가르침. 성내기 전에, 전히 충성할 때 미리미리 다스리고 보살펴서 참회의 뼈아픈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