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쟎아

2007.10.15 15:26

최향미 조회 수:929 추천:87

                                  
        빨래통 뚜껑이 반쯤 열려 삐져 나온 양말 짝, 속옷 등이 보기 흉하다. 그새 빨래 할 때가 또 됐나, 투덜대며 세탁 준비를 한다. 빨래 비누를 털어넣고, 스위치를 돌려 물을 받고, 먼저 짙은 색 빨랫감을 세탁기 속에 밀어 넣는다. 밑단이 너덜너덜 해진 딸아이의 청바지를 집어넣고, 아들 녀석의 반바지들을 사뿐히 던져 넣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꺼내 들었다.

        반바지의 주머니 속을 점검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요즘 아이들 바지는 왜 이렇게 주머니가 많은지 앞에 네 개, 뒤에 두 개 그리고 옆구리에 하나씩 모두 여덟 개가 보통이다. 한참을 뒤지다가 나온 것은 동전 두 개와 연필 꽁지에 붙어 있던 작은 몽당 지우개였다. 비  오는 날만 빼고는 사계절을 반바지만 입고 다니는 아들 녀석의 주머니 속 내용물은 주머니 숫자가 많아지는 것과 반비례로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적극적이고 활달한 딸아이와는 달리 아기 적부터 늘 조용한 성품의 아들 녀석에게 참 우스운 버릇이 하나 있었다. 길바닥에 버려진 것들 중에 맘에 드는 것을 발견하면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다. 깨진 유리병 조각, 찌그러진 맥주병 뚜껑 등 아주 작고 소소한 정말 쓰레기다운 것들이었다. 종종 새의 깃털이나 작은 돌멩이도 들어 있곤 했다. 돌멩이나 작은 조가비 등은 왜 집어 왔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하지만 유리병 조각이나 반쯤 꺾어져 있는 맥주병 뚜껑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온 데를 찾아 헤맬 것이 뻔한 아이 몰래, 미리 주머니를 뒤져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여러번 했다. 나중에는 엄마 손이 닿기 전에 제 침대 맡에 모셔다 놓기도 했다. " 현진이는 왜 이런 걸 주머니 속에 넣어 왔을까? 엄마는 손 다칠까 봐 걱정이네 " 아이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대답은 너무 간단하고 싱거웠다." 엄마, 예쁘잖아." 얼떨결에 " 그래, 참 예쁘구나 "라고 맞장구를 쳐주고 말았지만, 그 예쁜 것에 대한 의미가 헤아려지지 않아 처음에는 참 혼란스러웠다. 아이가 자라면서 주머니에 담아 오는 것들이 예쁜 껌 종이나 사탕 종이일 때도, 아주 작은 부러진 플라스틱 조각일 때도, 더러는 찌그러진 장난감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의 질문에는 늘 "예쁘잖아"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가족여행을 자주 다녀오는 편이다. 마지막 날, 차에 짐을 실을 때 늘상 벌어지는 일이 하나 있다. 아들아이가 며칠 동안 열심히 모아 놓은 돌멩이나 조가비 또는 풀잎 등을 남편은 짐이 되니 내버리고 가자는 것이고, 아들 녀석은 아빠 눈치만 보며 여기저기로 숨기는 것이다. 에미 마음에는 결국 며칠 지나 내다버릴지언정 요 예쁜 것들을 발견하고 주워 담던 아들의 마음이 기특하고 예뻐서 그냥 차에 싣고 가면 좋으련만....." 사내 녀석이...." 하며 마땅치 않아 하는 남편이 늘상 야속하다. 아들 녀석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니 아마 네 살 정도 됐을 때다. 두 아이와 책방에 간 일이 있었다. 큰아이는 제 책을 찾느라 바쁘고 나는 작은 아이 꽁무니를 부지런히 쫓아 다녔다. 누군가가 미리 꺼내보고 책상 위에 놓고 간 책들 속에서 내가 어렸을 적에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는 책을 발견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들 녀석을 억지로 앉혀놓고 작은 소리로 읽어 주기 시작했다. 당시 영어가 서툰 아들에게 그림을 보여 주며 영어 반 한국어 반을 섞어서  유치원 선생답게, 성우 같은 목소리로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아주 짧았다. 밑둥이 잘려나간 나무가 마지막까지 쉼터가 되어 주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 가슴이 찡해젔다. 내가 읽으면서 자기도취에 빠져있던 나는 아들의 반응을 그제서야 슬쩍 살펴봤다. 꼬마 녀석은 머리를 제끼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 역시 이야기가 아이에게는 어려웠구나 '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들의 눈 속에 맑게 고인 눈물을 보았다. 아이는 눈물을 감추려고 짐짓 딴짓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순간, 나도 코끝이 찡해지더니 눈물이 핑돌고 말았다.

        요즘도 빨래를 하다가 문득문득 오래전 아들의 바지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유리조각, 병 뚜껑들이 생각난다. 어른 눈에는 위험하기만 한 그것들이 예쁘게 보인 이유를 헤아려 보기도 한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 유리 끝의 영롱함이 작은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작은 손아귀에도 쏙 들어오는 맥주 뚜껑들이 아이에게는 어떤 매력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을까? 어쩌면 우주를 주머니 속에 넣고 동글동글 굴려보듯 그 어떤 맛을 음미한 건 아닐까? 엄마의 상상은 아이의 그것에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보기도 한다.

        여기저기에서 보여지고, 들려오는 흉흉한 뉴스들 속에서도, 동화를 듣다 눈물을 감추려던 네 살짜리 사내아이의 맑은 마음을 기억해 낸다.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헤아려 보며 그래도 밝고 따뜻할 미래를 짚어 본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에게 선물해준 그 예쁜 것들, 추억들을 벽장 속에 숨겨두고 조금씩 꺼내 먹는 곶감처럼 달콤하게 즐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찌그러진 맥주뚜껑을 작은 손아귀에 꼭 쥔 아이의 기쁨이나 그 예쁜 마음을 헤아려 보는 엄마의 즐거운 추억이나 그 모든 가슴 짠한 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아들 녀석은 이제 여드름이 송송 나고 제 에미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어린 총각이 되었다. 전화 목소리로는 남편인지 아들녀석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굵은 목소리로 변해있지만 여전히 컴퓨터 위 책상 한구석에는 작고 앙징스런 물건들이 놓여있다.

        아이의 주머니 속에서는 이제 어떤 모습의 예쁜 것들이 담겨져 나올까. 아이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것들을 한껏 기대하다가 아들이 어느 날인가 데려올 예쁜 며느릿감의 얼굴을 떠올린다. 피식 웃음 한번 뱉어내고 세탁기 뚜껑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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