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언니

2024.09.13 12:32

성영라 조회 수:14

꽃보다 언니

                                       성영라

 

언니가 다녀갔다.

카톡, 카톡

K 언니가 카톡으로 기차표  2장 인증샷을 올렸다. 동탄역에서 부산역, 부산역에서 동탄역 발권 티켓. 경기도에 살고 있는 언니가 부산에 있는 나를 만나러 오려다가 한 차례 미뤄진 후 2주가 지났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내가 몸살에 목소리까지 잃고 호되게 앓았던 탓이다. 3월에 꽃샘추위보다 매서운 한파와 폭우가 쏟아질 거라는 일기예보도 한몫했다. 목소리는 돌아왔고 극심한 목 넘김 통증도 가라앉았지만, 평온으로 가장해 겹겹이 두른 내 마음은 여전히 아픈 중이었다. 그 마음을 가만히 들어주고 그 마음에 약이라도 발라주고 싶은 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언니와의 즐거운 기억이 소환되며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K 언니와의 인연이 새삼스럽다. 25년 전 미국 결혼생활 4년 차에 남편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3년쯤 지낸 적이 있다. 미국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던 언니는 남편 직장을 따라 가족 모두 서울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이웃에 살며 문학 강의를 함께 듣고 우정을 나누다가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국으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언니네와 우리 집이 차로 30분 내 거리에 있어서 타국에서도 여러 해를 이웃으로 살았다. 언니네는 다시 한국으로 갔고 나는 남았다.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 간의 연()이나 관계에 적용해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하다. K 언니와 나 사이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정이 흐르고 이어져 오는 데 8할은 언니 덕분이지 싶다.

 

K 언니가 오는 날부터 도심 전체가 벚꽃 천지로 변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먼 산을 보면 공중에 흰빛으로 너울너울 꽃구름이 강물처럼 흐르는 듯하여 무심코 한숨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탄성에 깃든 감동으로 순간 내 마음 한편에 불이 켜졌다. 봄꽃들은 제각각의 빛과 꽃말로 세상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입을 벌려 기쁨을 쏟아내고 눈을 반짝였다.

꽃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움츠렸던 마음을 펴고 큰 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동백은 붉은 목숨 당당하고 수선화와 유채꽃이 황금밭을 이루었다. 유채꽃 향기를 처음 알았다. 색깔을 향기로 치환한다면 노랑은 달콤함이 아닐까. 낙동강 300리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고 하양 빨강 철쭉이 질세라 무리를 지어 피었다. 개나리가 고개를 내밀고 어느새 하얀 목련은 지고 자목련이 여운처럼 매달려 있다. 봄꽃들의 대공연이 펼쳐졌다.

저만치 부산역 광장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K 언니가 보였다. “언니~” 뛰어가는 발걸음이 뭉클했다. 역 광장 유채꽃 포토존에서 사진 몇 컷을 추억으로 저장하고, 영도다리 건너 흰여울 문화마을 고개 너머에서 복국 한 그릇씩 비우는 동안 뜨끈한 말들이 뽀얀 김처럼 피어올랐을 것이다. 영도 둘레길 따라 드넓은 바다, 그 바다 한 지점에 묘박(錨泊) 중인 선박들을 바라보며 봄볕에 온몸이 데워졌을 것이다.

 

K 언니가 숙소를 잡은 동네는 온천장. 신라시대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부모님 댁 옆 동네다. 짐이랄 것도 없지만 백팩을 내려놓고 호텔 주변을 걸어 다녔다. 보도를 따라 벚나무들이 꽃구름처럼 뒤덮여 있는 밤거리를 걸었다. 걷다가 밤의 꽃그늘 아래 멈춰 꽃송이를 받아먹을 만큼 입을 활짝 벌리고 우리가 마치 꽃이나 된 듯 사진을 찍고 또 걸었다.

걸으면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가. 봄밤의 정취에 취해서 말을 삼켰던가···.

10년 전에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언니가 이제 막 혼자 된 나의 엄마를 걱정했다. 비록 거의 코마 상태인 채로 4년간 병상에 계셨지만, 아버지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과 손 닿을 수 없게 영영 떠나갔다는 사실의 온도 차는 분명했다. 건조한 피부를 나도 모르게 긁적이게 되듯 상실은 조용히 일상을 간질이고 긁적였다.

 

짧지만 꽉 찬 12일을 함께한 후 K 언니는 돌아갔다.

다음 날 비가 내렸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아파트 옆 온천천으로 갔다. 아무래도 비 그치면 벚꽃이 질 거 같아서 어제와는 다른 풍경일 것 같아서···.

비가 와서 꽃 심었어.

집에 잘 도착했냐, 피곤하지 않냐고 묻는 나의 카톡에 언니의 답은 덤덤하면서도 명랑했다. 언니답게 느껴져서 웃음이 났다. 언니의 수채화 같은 표정이 그려졌다. 오래전 항암치료과 완치 결과를 받은 이후 더욱 투명하게 단단해진 K 언니의 내면을 읽는 듯했다. 나는 마침맞게 잘 심으셨네, 라고 적었다.

꽃비가 하르르 허공을 적시더니 꽃잎 하나가 내 손에 내려앉았다. ‘나도 심었어요, 추억. 꽃보다 언니, K 언니.’ 나직이 읊조렸다. ‘인생 화무십일홍이라지만 추억이 피어날 때마다 나에겐 화양연화일 테죠.’

 

                                                                                                                            계간 동행문학》(2024)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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