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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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산중에 위치한 라크레센타시의 소방서. L.A.군의 관할지역이다. 최근 들어 화씨 110도를 넘나드는 온도가 지속되면서 적색 경계령이 내려져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이미 여러 번의 대형 산불로 산에는 일반 남자의 키를 넘는 나무들이 없는 곳이 더 많아진 상태이다. 더구나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잡풀에 불이라도 붙거나 엎친데 겹친 격으로 바람까지 분다면 산 위에 위치한 집들은 꼼짝없이 전소되고 만다.
"캡틴! 뒤 좀 돌아보세요! 산꼭대기에서 연기가 나고 있어요!“
소방관 저스틴이 캡틴 굿맨의 사무실을 노크 없이 뛰어 들어와 숨을 헐떡이며 창문을 손으로 가리킨다.
"아니 저건? 당장 출동준비!"
알람이 울리자 일제히 출동준비를 하는 짧은 순간동안 캡틴이 소방대장에게 상황보고를 한다. 소방대장의 명령에 의해 몇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원들이 화재진압에 투입되었다. 이웃 소방서들도 줄을 지어 출동했을 정도로 엄청난 화마가 산을 벌겋게 달구면서 옆으로 옮겨 붙고 있다. 마치 태양의 절반이 이곳에 추락해버린 듯 눈앞이 온통 벌겋다. 소방헬기들이 근처 호수에서 퍼 나르는 물로도 쉽게 꺼질 줄 모르고, 우려했던 바람마저 화마와 한통속이 되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2시경. 화재는 거의 진압을 했지만 혹시 모를 마지막 불씨제거작업이 한창이다. 통행을 차단시켰던 고속도로의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차량들을 서행시키며 통행을 허용하고 있는 이때!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갑자기 차를 돌려 세우더니 한 소방차 안에서 배를 움켜쥐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뛰어올라 간다.
"저스틴 소방관님 괜찮으십니까?"
"아, 스캇! 여긴 웬일인가? 차량통제로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저를 알아보신 대원이 들어오게 해주셨어요. 근데 어디 아프세요?"
"아까 내 파트너가 불을 끄다가 갑자기 실신을 해서 실려 갔는데, 나도 컨디션이 좀 안 좋다네.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스캇이 그의 유니폼을 벗겨내고 때마침 도착한 구급차에 저스틴 소방관을 실어 보냈다. 스캇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저스틴 소방관의 유니폼을 챙겨 입고 곧바로 화재현장으로 뛰어올라 간다.
화재현장에서 전두지휘를 하고 있던 캡틴 크리스 굿맨. 푹푹 찌는 더위에 기력이 소진해버린 소방관들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다. 지난 3일 동안 잠은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갑자기 소방대원 한명이 현장에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멀찍이서 비틀거리며 소방호수를 들고 있는 대원들을 향해 뛰어간다.
"헤이! 거기 누구야?"
캡틴 굿맨이 스캇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만 거대한 바람소리와 소방헬기소리에 묻혀 버린다.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바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자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스캇이 잠시 멈칫하더니 소방대원들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거긴 낭떠러지라고!!"
캡틴 굿맨이 위험을 감지했는지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스캇의 뒤를 따라 쫓는다. 그리고... 스캇이 캡틴의 손에 거의 잡힐만할 즈음 두 사람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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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가 지났을까. 아까 까지만 해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나지만 필름이 끊긴 것인지 그 이후의 상황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퇴근할 때 즐겨 입는 흰 티셔츠에 검정 청바지 차림으로 화재가 거의 다 진압된 현장에 서있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는 사고당시와 응급처치 받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엔 회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서있는 또 한사람이 있다. 낯이 익은 얼굴인데..? 아, 맞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얼핏 보았던 얼굴이다. 얼마 전에 입사한 신참, 스캇 존슨이구먼!
"캡틴, 무사하셨군요!"
낭떠러지에서 같이 떨어졌었는데 그도 무사하니 다행이다.
"그래, 스캇. 자네도! 아깐 큰일 날 뻔 했잖은가. 무작정 그렇게 뛰어 들어가면 어떡하나?"
"죄송합니다. 지시사항만 따르라고 교육을 받아놓고선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그래야지, 앞으로는 조심하게.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니 만큼 실수가 있어선 안 되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아직도 높은 산에 막혀 연기가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산불은 완전히 진압이 되었다. 이번 불은 예전에 비하면 약과였다. 몇 년 전에 바로 이 La Tuna Canyon에서 대형 산불이 났었던 일을 떠올린다. 수백가구에 강제대피령이 내렸을 정도로 L.A.시 역사상 가장 큰 산불로 기록되었다. 스캇도 지구멸망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며 그날을 회상했다.
"그랬겠지. 나도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온 하늘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건 처음 봤거든. 아무튼... 이번 산불을 3일 만에 진압한 것도 천만다행이야.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옆으로 옮겨 붙는 속도가 빨랐어. 맞불작전도 방향을 바꾸며 불어대는 강풍 때문에 실패를 해서 아쉽긴 하지만 인명피해 없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봐야지."
도움은커녕 일을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는 스캇에게 그만 됐으니 다시 마무리작업 현장으로 가보자며 주위를 살핀다. 사람, 바람, 차량, 소방헬기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너무 조용하다. 곳곳에 하얀 연기만 아니었다면 화재현장 이었다는 것도 잊을 뻔 했을 정도이다.
"자네 혹시 내 유니폼 어디다 두었는지 아는가?"
"모르겠어요, 캡틴. 제가 입던 것도 없는데요?"
스캇은 저스틴 소방관의 유니폼을 몰래 입었던 것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까 사고를 당해서 응급조치를 하느라 벗겨둔 모양이다. 유니폼과 방독면 없이 현장에 다시 투입된다면 질식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산화탄소를 머금은 연기 가운데서 방독면도 착용하지 않고 서있는데도 숨을 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유니폼도 없이 평상복을 입고 둘이 화재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의아스럽긴 하지만 신참이 당황하기 전에 먼저 안심을 시켜야겠다.
"저건 연기가 아니라 구름일수도 있네."
실제로도 산이 높다보니 구름이 걸쳐있는 경우가 많기에 시야가 완전히 트일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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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캡틴 굿맨!!" "크리스!!"
연기가 조금씩 걷히고 시야가 트이고 있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스캇이 목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른다. 나도 스캇과 함께 여기! 라고 외친다.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우리 측 목소리는 메아리쳐 들리지 않고 있다. 저들의 목소리는 이쪽에선 들리는데 저쪽까지는 우리 두 사람의 소리가 전달이 안 되는가보다. 바람이 소리를 건너편까지 실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반팔셔츠 차림인데도 춥지가 않다. 스캇은 아까부터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갑자기 왜 표정이 시무룩해져있냐고 물었더니 뜬금없이 아직도 모르시겠냐며 반문을 한다.
"캡틴, 우리....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게! 불은 이미 제압했다고!“
이 상황이 긴장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은 오로지 침착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캇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때 많이 놀란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를 해준다.
"조금만 참게! 일행들과 합류하면 곧바로 병원에 가서 친찰을 받아보자고. 내가 함께 가주겠네."
그 순간 사람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찾았어요!!!"
"저 낭떠러지 아래...!!"
"오 마이 갓!!! 빨리 밧줄과 사다리를 가져와. 헬리콥터 출동시키고!! 서둘러!!"
부캡틴인 싸이몬의 목소리다. 스캇에게 싸이몬은 내 친구라고 말해줬다. 이제 그들을 만나 함께 하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스캇은 내 말을 들었으면서도 기쁜 내색이 없다. 대체 왜 이러지..?
"캡틴, 우리...죽은 거 맞아요. 저들이 말하는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사람들..바로 캡틴과 저예요."
"뭐라고? 우린 여기 있잖은가? 아까부터 자꾸 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지?"
스캇이 내게 발아래를 보라며 손가락으로 내발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에 가려 발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내가... 공중에 떠있다. 우리 두 사람이 서있는 발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죠, 캡틴?"
"자네 말대로 우리가 정말 죽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우리 둘이서 대화가 가능한 거지?"
"그야 저도 알 수 없죠. 확실한 건... 육체는 죽었다는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캡틴.. 저 때문에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신 거잖아요. 저만 성급하게 안 뛰어들었어도..."
말을 잇지 못하겠다... 그래서 필름이 끊긴 거였다. 죽었으니까. 갑자기 아내 니콜과 두 딸 Rose, Lily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내가 죽다니... 이렇게 빨리 죽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건가? 아직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도 많이 있는데... 앞날이 청청한 스캇도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자네 탓 하지 않을 테니 너무 자책하지 말게.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네."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할 필요도 없을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가. 인명피해를 막고 생명을 구하는 게 아닌가. 나는 살아서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럼 된 것이다. 나는 소방관(fire fighter)부터 시작해서 화재, 자동차 충돌, 화학물질 유출 등... 다양한 긴급 상황에서 대중을 보호하는 공무원으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소방 장(Sergeant)으로 진급되고, 소방 위(Lieutenant) 이후에 지금의 직위인 소방 경(Captain)으로서 소방대장(Battallon Chief)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미련은 없다. 미련은 어차피 살아있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일 테다. 목이 메인다...
"스캇, 자넨 내 꿈이 뭐였는지 아는가?"
스캇은 단번에 소방국장님(Chief) 아니겠냐고 답한다. 아까보다는 표정도 한층 밝아진 듯하다.
"아닐세... 나는 비영리재단을 설립해서 어려움에 처한 소방관 가족들을 돕고 싶었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네. 누구나 먹고 자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단지 먹고 살기위해 태어났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역시 캡틴은 제가 생각했던 분이세요. 많은 사람들이 캡틴을 존경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냐. 아닐세. 나도 뒤를 돌아보면 후회할 일들이 많다네."
구조헬리콥터가 도착했다. 기다란 줄에 두 사람을 차례로 실어 올리더니 이내 산을 넘어 사라졌다. 흰색의 bag이었다. 사망한 게 확실하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노란색 bag으로 우리를 실어갔을 테니까. 부 캡틴인 싸이몬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고 있다. 고맙네, 싸이몬.. 행복하시게. 그리고...내 아내, 니콜을 잘 부탁하네..
싸이몬은 크리스의 대학교 후배이자 같은 대학야구팀에서 활동을 했었다. 크리스는 4번 타자였고, 싸이몬은 포수였다. 대학졸업 후 크리스가 소방관이 되자 싸이몬도 같은 길을 걷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우정도 두터웠고 가족끼리도 오랜 동안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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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크리스 굿맨. 45세. 간호사인 아내 니콜과 17살인 큰딸 Rose와 14살인 둘째딸 Lily가 있다. 아내 니콜은 늘 사고위험을 달고 사는 남편 크리스에게 헌신적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시시피 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소방국장(Chief)으로 은퇴를 하셨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딸이기에 니콜이 결혼 후 간호사가 된 것도 오로지 남편인 크리스 때문이다. 남편이 근무하는 소방서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스캇 존슨. 24세.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만난 제넷과 잠깐 사귀다가 대학입학을 하며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었다. 제넷은 곧바로 폴을 만나 연애를 하다가 딸 하이디가 태어났는데 스캇의 아기임을 알고 폴과도 헤어졌다. 가출소녀였던 제넷은 우울증, 술, 마약중독으로 자살시도까지 하자 결국 시관계자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하이디는 어린이보호시설에 위탁되었다. 제넷과 자신 사이에 딸이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6살짜리 어린 아이가 심장이식 대기자라는 말에 스캇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보호시설의 연락을 받고 하이디를 만나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중 소방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힘들어하는 저스틴 소방관을 보고 차를 돌렸다가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과거에 후회할 일들이 많은지 묻는데... 인생선배로서 듣기도 부끄러운 질문이다.
"나도 사람인걸. 단지,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는 거지. 뭐든지 다 때가 있거든. 그 적절한 때를 놓치면 궁금증이 영원히 묻혀버릴 수가 있어. 지금의 내 경우처럼 말일세."
이 말이 끝나자마자 스캇이 내게 과거로 되돌아가보고 싶냐는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로 되돌아가다니...그게 말이 되는가...?"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단지,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가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한 뒤 연락을 끊은 이유나, 반 친구가 체육시간에 락커룸에서 나의 새 신발을 바꿔치기 해놓고도 끝까지 안했다고 잡아뗀 이유, 내가 키우던 강아지를 훔쳐가려다 들키자 오히려 화를 내면서 강아지가 자신을 물으려 했다고 우기던 옆집 아저씨... 이런 잘잘한 일에 대한 진실이 궁금한 게 아니다. 그러고 보면 나와 같이 궁금증을 안고 저세상으로 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일거란 생각이 든다. 갑자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아내 니콜과 친구 싸이몬의 관계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친구와 아내를 사랑했기에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지낸 것이다. 큰딸 Rose가 태어나던 날. 제왕절개수술이 잘 끝났다는 문자를 받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싸이몬에게 먼저 병원에 가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내가 뒤늦게 병실에 도착을 했을 땐 산모인 니콜의 침대커튼이 둘러쳐져 있었다. 싸이몬이 니콜에게 무언가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들려왔고 잠시 후, 니콜이 싸이몬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싸이몬이 일어서더니 그녀와 오랫동안 포옹을 했다. 키스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거니와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커튼 뒤로 보이는 그들의 실루엣뿐이었다. 순간 싸이몬이 Rose의 친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병실에 막 도착한 듯 연기를 해야 세 사람 모두가 당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두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지기 시작해왔었다.
"캡틴! 저게..뭐죠?"
죽음직전에 과거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서 지나간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떠오르던 순간 두 사람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온몸이 원을 그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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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침대에 니콜이 누워있다. 큰딸 Rose가 태어난 날이다. 아기의 머리가 거꾸로 있어서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 니콜이 울고 있다. 비스듬히 앉은 니콜의 가슴위에 Rose가 잠들어있다. 니콜은 아기의 얼굴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다. 싸이몬이 병실로 들어선다.
"니콜, 축하해요! 수술을 했다던데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싸이몬. 바쁠 텐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긴요. 크리스는 날라 오고 있을 거예요. 마음은 이미 나보다 더 먼저 도착했을걸요. 하루 종일 태어날 아기생각에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어요. 아빠가 된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에요!"
니콜이 두 눈에 금세 고여 버린 눈물을 훔쳐내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랑스런 내 아내...
"이름이 Rose라고 했죠? 참 예쁘게 생겼네요. 작년에 우리 딸 수잔이 태어났을 때 우리 부부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그때 내가 우리 딸을 위해 지은 시가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요. 아기가 깨지 않게 살살 외워 볼게요."
"네, 좋아요. 들려주세요."
싸이몬이 기억을 더듬으며 딸을 위해 지었던 시를 읊고 있을 때 내가 병실에 도착을 한 것이었다.
"저... 싸이몬. 부탁 좀 하나 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제가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지금 배에 통증이 심해요. Rose를 좀 더 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미안하지만 Rose를 아기침대로 옮겨 눕혀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Rose가 깨지 않게 살살, 조심조심 안아들어야겠군요."
싸이몬이 Rose를 정말 유리다루 듯 천천히 안아들어 올리더니 산모 옆에 놓인 아기침대에 눕힌다. 내가 두 사람이 포옹이나 키스를 하고 있다고 오해를 했던 건 바로 싸이몬이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를 니콜에게서 안아드는데 지체한 시간 때문이었다. 커튼하나 사이로 엇갈려버린 진실이라니!
"오, 이런!!!! 내가 무슨 상상을 했던 거야!!!"
"왜요 캡틴? 뭐가 잘못됐나요?"
"휴우...아닐세... 잘못 된 건 하나도 없었어. 내가 혼자 오해를 했던 거지. 싸이몬처럼 좋은 친구를 나는 오랜 세월 겉 따로 속 따로 대한 것이나 마찬가지네. 비록 티는 안냈지만 마음으로는 죄를 지은 거나 다름이 없지. 정말 내가 두 사람한테 면목이 없어..."
순간 싸이몬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에게 마음속으로 니콜을 잘 부탁한다는 말이나 했으니...정말 미안하네, 싸이몬. 자네 같은 좋은 친구를 오해했다니....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싶지만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눈물은 육체를 통해서만 나온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과조차 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야 한다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캡틴, 친구와의 오해가 풀리신 거네요!"
"그러게 말일세. 안 그랬다면 영원히 진실을 알지 못했을 테지.“
내가 너무 속이 좁았어... Rose가 친딸인지 의심까지 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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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또 한명의 형제처럼 지내던 알렉스 첸(Alex Chan)이라는 중국인 동료가 있었다. 알렉스는 나와 함께 근무하는 소방서에서 방화수사관으로 근무를 했는데 수년전에 La Tuna Canyon에서 대형 산불이 났었을 때 알렉스는 가족과 함께 중국에서 휴가여행 중이었다. 온 산이 불에 활활 타오르면서 회색재가 하늘에서 눈 오듯 바람에 휘날리며 동네 전체를 덮어씌웠다. 주민들이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는 상태가 되자 추가 대피령까지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산불이 며칠째 쉽게 꺼지지 않자 상부에서 방화수사팀을 모두 집합시켰다. 알렉스에게도 급히 돌아오라는 연락을 했었으나 그의 얼굴은 그 이후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알렉스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아 애를 먹었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연락이 끊긴 게 의아했어. 우리 소방서에서는 알렉스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 알렉스의 분석력은 천재수준이었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곳에서 단서를 찾아 범인검거에 압도적인 공을 세웠거든. 경찰은 차량사고에 이은 화재가 산불의 원인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의심 가는 부분들이 많았어. 산불은 동시간대에 반대편에서도 시작되었거든. 동네 주민들의 제보와 사진을 너무 뒤늦게 입수 했지만 말야. 그들도 대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거지. 얼마 후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알렉스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었어. 사고로 그의 둘째딸도 죽었다고. 그게 다야. 우리는 비보를 전해 듣고 한동안 넋이 나간사람들처럼 아무 말도 못했지. 소방대장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려달라고 해봤지만 자기도 전해들은 게 그것뿐이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하더군. 알렉스의 죽음에 대해선 아직도 궁금한 게 많다네."
"동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많이 슬펐겠어요, 캡틴..."
"맞네.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친군데 어떻게 죽었는지 너무 궁금했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다시 블랙홀의 도움으로 이미 중국에 도착해있다.
알렉스 첸. 사고로 죽은 해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대학기숙사에 있는 그의 큰딸은 인턴프로그램 때문에 남기로 하고, 아내와 둘째딸만 데리고 중국으로 3주 휴가를 떠났다. 췌장암에 걸리신 아버지를 큰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밀검사를 다시 받은 다음 수술까지 시켜드릴 생각이었다. 하필이면... 알렉스의 가족이 쓰촨 성에 도착한지 3일 만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병원 2층에서 아버지의 정밀검사가 밤늦게까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머지 가족들은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가 병원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려고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병원전체가 몇 분 동안 계속 흔들리더니 이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알렉스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건물 안은 정전상태였고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부서져 내린 건물의 잔해들을 헤치며 미친 듯이 아내와 둘째딸이 있던 곳으로 향한다. "여보!!!! Shiny!!!" 알렉스의 목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눈에 띄는 부상자들을 구해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두고 내 가족만 먼저 찾아 나설 수가 없던 것이다. 혼자서 초인간적인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다. 알렉스 혼자서 구출해낸 부상자들만도 32명이나 된다. 물파이프가 터졌는지 여기저기서 물 새어나오는 소리가 나고 있다.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무너진 건물더미를 헤치며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던 중 그만 끊어진 전기 줄이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감전이 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와 작은딸은 내려앉은 건물더미에 깔려 이미 사망한 뒤였다. 지진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다행히 알렉스의 아내는 생명은 건졌지만 두 다리를 잃었다. 32인의 증언을 토대로 알렉스의 목숨을 건 구출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시민권자이지만 자국민을 구해낸 용감한 시민으로 국가차원에서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중국내의 미 대사관에 의해 알렉스의 근무지에도 비보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알렉스...훌륭한 내 친구. 정말 자랑스럽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고통 없이 아버지와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길..."
"캡틴 주위에는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그 뭔가가 있는 것 같고요. 저는 부끄럽네요.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해서 소방관이 되려고 했었거든요."
알렉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풀렸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왜 소방서에서는 알렉스의 사고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의 고국인 중국에서는 국비로 장례식까지 치러주었는데 적어도 우리는 형식적인 장례절차도 없었다. 내 직속상관인 소방대장은 알렉스가 타국에서 죽었고 장례까지 끝났으니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고만 말했었다. <상부의 명령이니 질문은 거기까지만!>이라고 했다. 내부적으로 뭔가 있었던 것 같다.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이자 부하직원의 마지막 가는 길을 그런 식으로 매듭짓는다는 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알렉스의 큰딸은 사고로 부모를 잃은 그의 친구 딸이거든. 내가 그에게 입양전문 변호사를 소개시켜줘서 잘 알지. 미국에 여행 왔다가 교통사고가 났었어. 딸만 남겨두고...."
"저런... 알고 보면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네요. 세상 살기 참 힘든 것 같아요, 캡틴."
"꼭 그렇진 않아, 스캇.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아름다울 수도, 어두컴컴한 시궁창일수도 있게 돼.“ 내 경험상으로 그렇다네, 스캇..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어야 했네요, 캡틴.“
7
갑자기 옅은 갈색머리에 아담한 체구의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내 어머니한테 궁금한 게 많았었다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원인모를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셨지. 그래서 난 어머니에게 최대한 마음 아픈 질문을 자제하며 살았네. 어머니가 슬퍼하실까봐."
스캇이 어머니가 어디에서 살고 계시냐고 묻는 바람에 갑자기 죄스런 마음이 생긴다. 양심의 가책...
"우리 집에서 10여분 떨어진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계시 다네. 나와 와이프가 함께 살자고 여러 차례 권유를 했는데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으신지 혼자가 편하다고만 하셔."
"그러셨군요. 그런데 뭐가 궁금 하신대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네, 흰 티셔츠와 검정청바지...“
내 기억으로는 어린 시절 나는 늘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친구들이 매일 같은 옷만 입는다고 많이 놀렸었고 내방 옷장엔 검정색과 흰색이외엔 다른 색의 옷이 없었다. 처음엔 어머니의 취향이 좀 독특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우연히 어머니가 색맹인걸 알게 되었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고 느낄 즈음, 이미 내가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살던 집에 도착해있었다.
나의 5살 생일파티가 한창이다. 12명의 친구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엄마가 직접 만든 케이크에는 Happy Birthday Superman~!이라고 쓰여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히어로 캐릭터를 좋아했기에 슈퍼맨유니폼이 더러워져도 벗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생일케이크의 초를 끄다가 망토에 불이 붙어버렸다. 모두가 놀라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엄마는 일초의 망설임 없이 나에게 달려들어 손으로 불을 껐지만 엄마의 옷으로 옮겨 붙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 불은 엄마의 눈에 손상을 입혔고 결국 시신경의 염증으로 인해 색맹이 된 것이다.
<엄마.........나 때문이었군요!>
"나 때문에 눈이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늘 옷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네. 신호등 색을 구별하지 못하니까 자동차 운전도 못하신 거였지...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왜 늘 학교까지 걸어서 데려다 주냐고 불평이나 하고... 내가 마음 아플까봐 끝까지 말씀을 안 하시고 사시는 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부족한 아들인지 알겠어..."
"아닙니다, 캡틴! 어머니께서는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너무 자책마세요."
잠깐 동안이지만 너무 많은 사실들을 알고 나니까 솔직히 내가 대화가 부족했었다는 걸 실감했다. 조금만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물어봤다면, 조금만 더 마음을 읽어드렸다면... 정말 후회스럽다... 후회만 남기고 이대로 떠나야한다니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나와 스캇의 주위를 맴돌던 블랙홀이 사라지고 다시 처음의 그 자리, 산꼭대기에 되돌아와 있다. 이젠 갈 시간이 가까워 진건가? 아직은 세상과 작별하기엔 너무 젊은 스캇을 보니 더 안타깝다. 블랙홀은 스캇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은 채 사라졌기에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생전 단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딸과 이별을 해야 하는, 세상을 다 잃은 듯 보이는 그의 얼굴... 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마움을 느꼈던 블랙홀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스캇의 마지막 기회를 가로챈듯한 죄책감마저 들고 있다.
"캡틴은 죽은 게 아니래요. 아직 할일이 남아있어서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실 거래요. 정말 다행입니다. "
그럴 리가..? 스캇에게 갑자기 초능력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아니면.. 블랙홀이 사라지기 직전에 그에게 뭐라고 귀띔이라도 해준 걸까. 스캇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중에 떠있던 나의 두발이 흙을 밟고 서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며 스캇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실 저는 신참소방관이 아니에요, 캡틴."
"뭐라고?"
"저는 미래의 소방관을 꿈꾸던 컴퓨터엔지니어에요. 캡틴이 근무하시는 소방서에서 매년 진행하는 봉사프로그램에 지원을 해왔고요. 그래서 저를 아시는 겁니다."
"아....그랬나? 내가 정신이 없었군!"
그가 젊은 혈기의 신참이라서 화재현장에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소방관으로서의 완벽한 교육을 받지 못한 봉사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
"제 딸이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답니다. 제 운전면허증에는 장기기증자 표시가 되어있고요."
"자네의 심장을 딸에게 이식하겠다는 말이군. 절차가 필요할 텐데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지?"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신의 도움을 받아야겠죠."
"신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네. 계속 애기해보게."
"제 심장은 딸에게 이식이 될 거고, 제 눈은 캡틴의 어머니께 기증하게 될 거에요."
"아니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캡틴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어머니가 남은 인생동안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스캇...정말 고맙고 면목이 없네... 자네를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믿기지가 않아!"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제게 생명보험이 있어요. 보험금 일부를 집구입비와 의료비로 사용하면 세금혜택이 있다고 해서 가입했던 거예요. 그 생명보험금은 캡틴에게 전달될 겁니다."
그런 큰돈을 내게 왜 맡기려는지 물었다. 스캇의 몸은 아까보다 조금 더 높이 떠있어서 내가 고개를 쳐들고 대화를 하고 있다. 블랙홀처럼 갑자기 사라질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캡틴이 비영리재단을 설립하셔서 도움이 필요한 소방관 가족들을 지원해주시면 좋겠어요. 저도 나중에 부자가 되면 꼭 하려고 했던 일이었거든요. 저는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캡틴께 부탁을 드릴 수밖에요. 단지...제 딸 하이디를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게 너무 마음이..." 그가 말을 잇지 못한다.
"스캇... 자네 마음 이해하네. 나도 잠시 전까지는 자네와 똑같은 마음 아니었겠나. 자식을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지...자네만 괜찮다면 하이디는 내가 입양해서 친딸처럼 돌보겠네. 약속하지!"
"정말이십니까, 캡틴?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웠네. 사람이 태어난 이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자네를 통해서 아름다운 죽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네. 나도 앞으로 덤으로 얻은 인생이다 생각하고 이웃과 나누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겠네."
"저는 처음부터 캡틴이 지역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실 분이라고 믿었어요. 전 이제 가야합니다. 캡틴, 감사합니다. 행복하시고,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네, 스캇! 평생 자네를 잊지 않겠네!"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눈을 껌뻑거리지 않았다. 덕분에 빛의 속도로 스캇이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
<삐빅~삐빅~삐빅~삐빅~>
"박사님, 여기 보세요! 심장박동기가!!!“
심폐소생술 도중에 멈춰버렸던 심장박동기가 다시 뛰기 시작한다.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어요! 살았습니다, 박사님!!“
응급실에서 크리스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던 의료진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진다.
"이건 기적일세!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까 그 스캇이라는 젊은 환자의 장기이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
"네, 박사님. 그분 따님에게 심장이식을 하게 될 거랍니다. 캡틴 굿맨의 어머니는 안구이식을 받게 된다고 하고요."
"잘됐군! 두 사람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네. 자네가 스캇의 소지품에서 장기이식관련 서류를 일찍 찾아내지 못했다면 시간이 많이 지연됐을 게야."
입원실로 옮겨진 뒤 아내와 딸들이 뛰어 들어와 나의 양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이 담당의사가 뒤따라 들어온다.
"며칠 동안 입원하면서 정밀검사를 더 해보겠지만 현재로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시적인 가벼운 뇌진탕으로 보고 있거든요."
아내 니콜이 감사하다며 기쁨의 눈물을 연실 닦아내고 있다. 사랑스런 나의 아내를 다시 보게 되다니..
"현장에 있던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죽은 젊은 친구, 스캇을 구하려다가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을 한 거였어요. 그런데 스캇이 캡틴을 꽉 안은 채로 떨어져서 캡틴이 다치지 않고 기절만 한 겁니다. 스캇은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고 머리를 크게 다쳐 응급실에 도착 후 사망했습니다. 헬리콥터로 실려 올 때 두 사람이 다 흰색의 bag에 실려 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캡틴이 가늘게나마 호흡이 남아있어서 응급조치를 한 겁니다. 기계에선 호흡이 끊겼다는 신호가 나오는데 얼마 후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난 거지요.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더군요. 마치 할일이 남아있으니 더 있다가 오라고 누군가 덤으로 살아나게 해준 것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박사님! 정확히 보신 거예요..!>
9
병원에서 퇴원 후 며칠 뒤에 출근을 하니 가장먼저 싸이몬이 뛰어나오며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 오게, 친구~! 다신 못 보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아는가?"
"고맙네, 싸이몬! 그리고... 그동안 너무 미안했네. 용서해주게나..."
"나한테 뭐 잘못한 게 있었나?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지!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줬으니까!! 하하하"
덤으로 얻은 인생덕분에 싸이몬과 변치 않는 우정을 지속하게 됐다.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싸이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싸이몬을 덥석 끌어안자 영문을 모르는 그가 나의 등을 두들겨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싸이몬과 인사를 끝내고 곧바로 소방국장실로 향했다. 국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조만간 표창장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데 나는 무슨 표창장이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국장님, 이번 사고로 잠깐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어디를 좀 다녀왔습니다."
"자네도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건 아니겠지, 설마? 하하하!"
"그건 아니고요. 알렉스가 중국에서 사고로 죽은 날을 보고 왔습니다."
국장이 놀라며 정말이냐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버벅 거리며 물었다. 그가 많이 당황한 듯 보인다.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믿기지가 않았으니까요. 문제는, 그 당시 국장님의 태도였습니다. 소방대장이셨을 때 내부 사고기록을 줄이려고, 좋은 근무평가를 유지하려고 알렉스 사건을 쉬쉬했던 것을요. 곧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었고, 국장님이 소방국장 후보로 추천된 상태였더라고요. 많은 생명을 구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는데 자신의 욕망을 위해 꼭 그러셔야만 했습니까?"
국장은 고개를 떨구며 모자를 벗더니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그동안 마음 편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자네가 이렇게 와서 양심적으로 살라고 말해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네.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 할 생각인건가?"
"아닙니다! 단지, 정부차원에서 남아있는 유족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장 실행에 옮기겠네! 이번에 확실히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의 유족에게 도움을 주도록 함세."
"감사합니다, 국장님. 국장님은 저의 롤 모델이십니다."
"부끄럽네, 크리스....“
10
싸이몬과 함께 비영리단체를 설립해서 운영을 하기로 했다. 우린 여전히 소방서에서 근무 중이고, 니콜과 싸이몬의 아내가 시간을 조율해서 관리를 맡기로 했다. 스캇의 생명보험금은 고스란히 <Scott Johnson Foundation>의 은행구좌에 적립되었다. 성공적으로 안구이식 수술을 받고 퇴원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오니 아내 니콜과 두 딸들이 더 좋아한다.
"할머니~ 함께 살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우리 예쁜 옷 많이 만들어주세요~"
"그럼, 그래야지. 우리 손녀들 방도 무지개 색으로 꾸며주마!"
<딩동~~!>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며 우르르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서 문을 열었다. 어린이보호시설원장의 손을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는 여자아이. 스캇을 쏙 빼어 닮았다.
"아빠가 말했지? 이번에 수술 받은 너희 동생, 하이디야."
"와우~!!! 반가워, 하이디~!! 나는 Rose, 여긴 Lily. 앞으로 친하게 잘 지내자~"
하이디가 밝은 표정으로 언니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이층 방으로 올라간다. 니콜이 원장을 응접실로 안내하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하이디의 옷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하이디가 방 한켠에 쌓여있는 선물 꾸러미들을 보았는지 누구 것이냐고 언니들에게 묻고 있는 중이었다.
"하이디, 이건 너의 아빠가 일하던 소방서와 네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보내준 선물이란다. 모두 하이디가 건강해진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거야. 이 방은 네가 언니들과 함께 사용하게 될 방인데 할머니가 이 방을 무지개 색으로 꾸며주실 거야. 하이디가 우리 가족이 되어서 정말 기쁘단다."
"Thank you, Captain!“
"어? 내가 캡틴인 걸 어떻게 알았지?"
"아빠가 전해 달래요."
푸른 눈의 금발소녀 하이디가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스캇...>
*2018 해외문학 작품상-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