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여름

2019.09.03 06:14

문진순 조회 수:7

괜찮은 여름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문진순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가을을 품고 성큼 다가온다. 발밑에 밀쳐둔 삼베 홑이불을 끌어올리는데 피부에 닿는 촉감이 벌써 서걱거린다.

 물이 데워지기도 전에 누른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찬물이 섬뜩하여 놀라면서도 계절이 바뀌는 시간의 온도차는 서늘한 바람만큼 달달하다. 앞서서 달려오는 계절을 맞으며, 여름의 끝자락을 아직 놓지 못했다.

 올여름 강원도 정선 딸네 집에 갔었다. 따라다니며 도와주지 않아도 될 만큼 손자들이 자라서, 가고 싶은 대로 행선지를 정해 나누어 돌아다니니 나름대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8일 동안 머물며 전국적으로 동시에 개봉되는 영화를 시골의 작은 영화관에서 네 편이나 관람하는 호강도 누리는 괜찮은 여름이었다.

 전주에 오기 전날 일제강점기 때 무장독립군 투쟁 사실을 근거해 만들었다는 '봉오동 전투'를 보았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선두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작하는데 독립군들은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봉오동 지형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들며 일본군이 예측할 수도 없는 지략을 펼치며 죽음의 계곡으로 유인한다. 독립군들이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첫 승리를 거둔, 19206월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훈련된 일본군과 어제의 농사꾼들이 연합하여, ‘총알도 나눠 맞으면 살 수도’ 있다는 믿음과, 죽을힘을 다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독립군을 보며 울컥하는 가슴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봉오동전투가 내게 주는 메시지는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다문화가정의 일본 여성이 퓨전요리를 지도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간단하면서도 맛있다는 오코노미야끼를 팀별로 열심히 만들어 사진도 찍고, 나누어 먹으며 손자들한테 솜씨를 자랑해도 되겠다고 좋아하는데 TV화면에 납작한 양은 도시락밥에 계란 프라이로 덮은 사진이 클로즈업 (close-up) 되면서 계란 흰자위에 익히지 않은 노른자가 반짝이며 흔들리는 화면이 다가왔다. 갑자기 ‘이건 뭐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어지는 강사의 멘트, 이미지(image)화된 일본 국기 같다는 말이 섬뜩해서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내가 받은 느낌을 실무자에게 이야기하며 교육에 세심한 배려를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언짢고 속상해야 할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나라 국기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제대로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던가? 스스로 자문해보니 부끄러웠다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는데 뒤도 보고 살아야 했다. 잊어야 할 것, 잊지 않아야 할 것도 구분하는 역사를 익히고 살아야 했다. 내가 가진 보편적 가치는 무엇이며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주인이 발로 차는 강아지는 온 동네 사람이 다 찬다'는 단순한 속담을 되새기며, 내가 가진 내 것을 지키면서 스스로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내 나라도 더욱 사랑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이 글을 정리하고 TV를 보다 다시 한 번 놀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지로 소개된 일본인 강사의 멘트에서 ‘NO-아베’를 떠올렸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불씨를 댕겼다.

                                                                   (2019.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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