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50
어제:
232
전체:
5,033,195

이달의 작가
2008.12.02 13:25

빨래를 개면서

조회 수 291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빨래를 개면서  


                                                                         이월란




건조기에서 방금 꺼내어 바닥에 쏟아 놓은 마른 빨래를 나는 좋아한다
따끈히 품고 있는 드라이머신의 열기는 내가 잊고 사는 삶의 체온 같다
팔과 다리가, 후드와 양말이, 펜티와 셔츠가 뜨거운 터널을 통과하며
핏줄보다 더 사납게 엉겨붙은 옷가지들은 한 지붕 아래
한 솥밥을 먹고 산다는 의리 때문인지 아직도 서로를 놓지 못한다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가슴처럼 그렇게, 따뜻하다
두 손으로 감아 쥐고 두 볼에 대어보면
멀어질까 안타가운 마음처럼 그렇게, 또 따뜻하다
찬 겨울길을 종종 달려와, 숨넘어가듯 시린 두 손 헐레벌떡 넣어보던  
저 바다 건너 온돌방이 이처럼 따뜻했었지 않나


손다림질로 보송히 펴지는 구불진 구김살들을 또한 나는 좋아한다
내 옆에서 깊어가는 한 남자의 주름을 닮아 있지 않나
구겨진 하루의 잔상들을 손다림질로 가지런히 펼쳐
명절 아침의 새옷처럼 서랍 속에 차곡차곡 넣어 두는 내일의 옷들
미리 검증받은 비밀처럼 쌓아 두는 것도 나는 좋아 한다


천변의 휴지조각처럼 항간의 땟국물에 절은 소맷자락도  
젖고 마르고 또 젖고 마르는 밤과 낮의 경계에서
물미역 감는 정결의식을 치른 후


반팔 한 쪽 접으며 노을 한 줄기 끼워 두고
뭉쳐진 청바지 주머니 펼치며 달빛 한 줌 넣어 두고
뒤집어진 양말 다시 뒤집으며 별빛 한 가닥 숨겨 두고
시름 엉킨 보무라지 털어내고 기럭아비 같은 안부 한 마디 새겨둔다


난폭한 물살을 거치고, 회전날개의 회오리를 이겨내고
세제의 쓰라림을 견뎌내고, 빙글빙글 마찰의 현기증을 살아낸
얼룩진 눈물과 땀찬 세월까지 탈수된 정갈한 허물들
바람을 뚫고 귀가한 날포랭이들의 외피가 나는 이렇게 좋은 것이다
무늬하루살이들의 환생이 새삼 반가운 것이다

                                                                       2008-12-01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25 그대가 머문 자리 이월란 2011.05.31 915
1024 버리지 못하는 병 이월란 2008.05.09 865
1023 비행기를 놓치다 이월란 2012.01.17 841
1022 로또 사러 가는 길 이월란 2011.12.14 742
1021 요코하마 이월란 2011.05.31 740
1020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 이월란 2009.01.02 732
1019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하는 일은 이월란 2010.03.30 722
1018 사유事由 이월란 2008.05.09 715
1017 레드 벨벳 케잌 이월란 2010.10.29 715
1016 외로운 양치기 이월란 2010.05.25 701
1015 F와 G 그리고 P와 R 이월란 2010.09.20 683
1014 스키드 마크 이월란 2010.12.26 676
1013 공갈 젖꼭지 이월란 2012.02.05 663
1012 강촌행 우등열차 이월란 2010.06.07 662
1011 흑염소탕 이월란 2009.10.08 661
1010 고양이에게 젖 먹이는 여자 이월란 2008.05.10 653
1009 날씨 검색 이월란 2010.11.24 652
1008 향수(鄕愁) 이월란 2010.05.18 639
1007 애모 이월란 2008.05.07 635
1006 눈먼자의 여행 이월란 2010.01.29 63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