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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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9.07.27 14:03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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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이월란(09/07/26)



습작파일이 보통 30페이지를 넘어가진 않았다
세상에 아부하느라 근 한 달만에 열어본 습작노트 #21은 무려 45페이지나 되었다
퇴고받지 못한 낙서장이 13페이지나 된다, 시 10개쯤은 거뜬히 건지겠다
아직도 어지러운 마음 속에 그래도 시를 써보겠다고
빛과 어둠을 조작하듯 마우스로 까맣게 드래그한 낙서장들을 모두 선택했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이 보여주는 메뉴 중 번개처럼 스치는 불길한 예감
단순무지한 컴퓨터 앞에서 조롱당하고 있다는 익숙한 느낌으로
나는 왜 복사하기 대신 오려두기를 선택했을까
온갖 악재들이 본시 가벼운 친절을 미끼로 삼듯
빈문서를 띄우기도 전에 <저장하시겠습니까?>
친절한 질문에 난 또 왜 불길한 예감 앞에 무릎 꿇고 거수경례 붙이듯
<예>라는 곳을 비수처럼 클릭하고 만 것일까
오려두기로 영원히 삭제당한 파일은 마우스 속에 잠시 들어 있었겠다
그리고 남은 여생처럼 빈문서를 띄웠을 때 암선고를 받고
시한부의 기한을 묻는 말기환자처럼 붙여넣기를 선택했을 때
모니터 오른쪽에 수직으로 붙어선 바는
전신마비에 걸린 듯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마우스 속에서 사라진 13페이지, 생명은 연장되지 않았다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사이에서 아직도 못다한 말들을 품은 채
순간처럼 정지해버리는 목숨처럼
어둠 속에 붉은 밑줄처럼 걸려있는 십자가들이 익히 말해오지 않았던가
하나를 위해 열 개를, 스무 개를 버려야만 한다고


그리고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사이, 파일이 닫히고 열리는 사이
분실신고센터의 자동응답기에 대고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현금 두둑히 잃어버린 지갑의 색깔을 말하듯
이 시를 썼다는 사실
분실된 지갑 속에 있던 신용카드의 정지요청을 하듯
내게 잃어버린 파일이 있었다는 기억의 인출조차
영원히 정지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나는
맘에 쏙 들었던 몇 개의 시가 들어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혀를 콱 깨물고도 싶지만 (말도 어눌한 인간이 혀까지 짧으면 쓰랴)
태(胎)는 본시부터 사라지는 것들 속에 묻혀있어
내겐 애초부터 잃어버린 파일같은 건 없었던거다

  
오려두기로 선택된 나의 파일은 지금 누구의 검지 끝에서 클릭되고 있는가
습작노트 #22, 하얀 백지가 아직도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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