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157
어제:
184
전체:
5,020,782

이달의 작가
2009.07.27 14:03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조회 수 486 추천 수 1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이월란(09/07/26)



습작파일이 보통 30페이지를 넘어가진 않았다
세상에 아부하느라 근 한 달만에 열어본 습작노트 #21은 무려 45페이지나 되었다
퇴고받지 못한 낙서장이 13페이지나 된다, 시 10개쯤은 거뜬히 건지겠다
아직도 어지러운 마음 속에 그래도 시를 써보겠다고
빛과 어둠을 조작하듯 마우스로 까맣게 드래그한 낙서장들을 모두 선택했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이 보여주는 메뉴 중 번개처럼 스치는 불길한 예감
단순무지한 컴퓨터 앞에서 조롱당하고 있다는 익숙한 느낌으로
나는 왜 복사하기 대신 오려두기를 선택했을까
온갖 악재들이 본시 가벼운 친절을 미끼로 삼듯
빈문서를 띄우기도 전에 <저장하시겠습니까?>
친절한 질문에 난 또 왜 불길한 예감 앞에 무릎 꿇고 거수경례 붙이듯
<예>라는 곳을 비수처럼 클릭하고 만 것일까
오려두기로 영원히 삭제당한 파일은 마우스 속에 잠시 들어 있었겠다
그리고 남은 여생처럼 빈문서를 띄웠을 때 암선고를 받고
시한부의 기한을 묻는 말기환자처럼 붙여넣기를 선택했을 때
모니터 오른쪽에 수직으로 붙어선 바는
전신마비에 걸린 듯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마우스 속에서 사라진 13페이지, 생명은 연장되지 않았다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사이에서 아직도 못다한 말들을 품은 채
순간처럼 정지해버리는 목숨처럼
어둠 속에 붉은 밑줄처럼 걸려있는 십자가들이 익히 말해오지 않았던가
하나를 위해 열 개를, 스무 개를 버려야만 한다고


그리고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사이, 파일이 닫히고 열리는 사이
분실신고센터의 자동응답기에 대고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현금 두둑히 잃어버린 지갑의 색깔을 말하듯
이 시를 썼다는 사실
분실된 지갑 속에 있던 신용카드의 정지요청을 하듯
내게 잃어버린 파일이 있었다는 기억의 인출조차
영원히 정지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나는
맘에 쏙 들었던 몇 개의 시가 들어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혀를 콱 깨물고도 싶지만 (말도 어눌한 인간이 혀까지 짧으면 쓰랴)
태(胎)는 본시부터 사라지는 것들 속에 묻혀있어
내겐 애초부터 잃어버린 파일같은 건 없었던거다

  
오려두기로 선택된 나의 파일은 지금 누구의 검지 끝에서 클릭되고 있는가
습작노트 #22, 하얀 백지가 아직도 낯설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1 시를 먹고 사는 짐승 이월란 2009.08.13 331
730 시가 내게 오셨다 이월란 2009.08.13 441
729 처녀城 이월란 2009.08.06 406
728 마로니에 화방 이월란 2009.08.06 445
727 하지(夏至) 이월란 2009.08.06 280
726 폭풍 모라꼿 이월란 2009.08.06 274
725 디스토마 이월란 2009.08.06 312
724 견공 시리즈 인간시계(견공시리즈 10) 이월란 2009.08.06 373
723 망할년 이월란 2009.08.01 455
722 제3시집 페르소나 이월란 2009.08.01 449
721 빛꽃 이월란 2009.08.01 274
720 시작노트 이월란 2009.08.01 413
719 통화 중 이월란 2009.07.29 318
718 오일장 이월란 2009.07.29 346
717 당신의 봄 이월란 2009.07.29 388
716 아버지의 뒷모습 이월란 2009.07.29 338
715 투명인간 이월란 2009.07.29 319
714 기도 이월란 2009.07.29 272
» 오려두기와 붙여넣기 이월란 2009.07.27 486
712 시스루룩(see through look)의 유물 이월란 2009.07.27 390
Board Pagination Prev 1 ...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