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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어머니(박두연, 세례명 수산나)의 별세 소식이 미국에까지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메일로 조문해주신 분들에게 일일이 답메일을 보내드리지 않는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어머니는 명절 연휴의 끝날인 19일 아침 6시 반에 별세하셨습니다.

  췌장암이 급성으로 온 데다가 간과 폐로 전이되어 항암 치료의 시기도 놓친 상태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몸에 이상이 와 김천의료원을 찾아간 2월 2일부터 별세하기까지 그 병원과 서울의 중대병원에서의 검사 때를 제외하고는 큰 고통을 겪지 않으셨고(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합니다), 14일부터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여 18일 오후부터는 계속 주무시다가 눈을 감으셨습니다.

  장례 절차는 천주교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2월 21일에 장례미사가, 23일에 삼우미사가 김천 대신동성당에서 행해졌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소망대로 화장을 했으며, 양지바른 선산에 묻히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살아오신 날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인사를 이 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내 영혼의 둥지에 늘 함께 계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올 여름에 칠순을 맞으신다. 이번 설에 고향 김천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감회가 다른 때와는 다른지 낡은 종이 뭉치를 보여주셨다.

  “승하야, 이거 너한테 처음 보여주는 거다. 한번 보렴.”

  펼쳐보니 성적표였다. 일제시대 때 경성여자사범학교를 다니신 어머니의 성적표들. 한국 학생은 소수요 거의 다 일본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그 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어머니 평생의 자랑이었다. 성적표에 의하면 반에서 2, 3등을 도맡아 하고 평균 90점 밑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으니 자랑을 하실 만도 했다. 전교 1등을 한 학생만 원서를 내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학교에서도 계속 우등을 했으니 말이다. 체육과 음악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아 수석을 못하신 것 같았다. 경성여자사범은 해방이 되자 학교명이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로 바뀌고 남학생들을 모집해 남녀공학이 되었다고 한다. 경북 상주 고을을 떠들썩하게 한 재원이었으니 이 성적표만 보면 어머니의 생이 거기에 걸맞게 탄탄대로였어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근소한 표 차이로 낙선되셨다. 모아둔 재산이 없어 선거자금을 쓰지 않고 출마한 탓이었다고 한다.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 다시금 농사를 지으며 7남매를 키워야 했던 외할아버지는 딸이 4학년을 마치자 학업을 중단케 한다. 여기서부터 어머니의 생은 꼬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입학했을 때만 해도 동경사범 유학을 약속했던 외할아버지가 장녀의 도움 없이는 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1950년 5월말에 있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빚을 내어 확성기를 마련해 벽촌까지 다니며 선거운동을 해 당선이 되셨다.

  당선 한 달 만에 육이오가 일어났다. 한강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피난을 못 가신 외할아버지는 이웃 사람의 밀고로 납북되셨고, 지금까지도 생사 여부를 모르고 있다. 이른바 양가집 규수로 자라난 외할머니는 생활력이란 것이 없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전답 문서는 물론 집에 있는 재봉틀까지 들고 간 상황에서 외할머니는 살아갈 방도는 궁리하지 않고 넋 놓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외할머니와 여섯 동생이 굶어죽지 않게 하는 일은 장녀인 어머니의 몫이었다. 준교사 자격시험에 응시, 1등으로 합격한 어머니는 상주 중앙초등학교를 시발로 하여 청리초등학교, 서울 미동초등학교 등 학교를 옮겨다니며 교사로 봉직한다. 동생들은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대학교에 연이어 들어갔고, 어머니는 집안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11년 동안 처녀 가장 노릇을 한다. 옷 한 벌 마음대로 사 입어보지 못하고 맛난 것 한 번 제대로 사 먹어보지 못한 세월이었다.

  미동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을 때의 일화.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부르더라는 것이다.

  “상주에서 6학년 담임을 맡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두 번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 6학년 담임을 맡아주십시오. 부탁합니다.”

  경기여중에 몇 명, 이화여중에 몇 명을 합격시키느냐에 따라 학교의 명예가 판가름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그해 입시에서 경사가 일어났다. 어머니 반에서 경기여중에 6명이 지원을 했는데 전원이 합격한 것이다. 한 반에서 특정 일류 중학에 전원 지원하여 전원 합격한 것은 미동초등학교 사상 처음 있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화여중 4명 등 다른 아이들도 지원한 학교에 대거 합격하여 어머니는 교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청리에서 경찰관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지서 주임이 인사를 하러 왔으니 교직원 전원이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어머니는 필사본 회고록 <설원을 걸어온 나의 발자국>에다 아버지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 지서 주임은 나이가 스물 대여섯 되어 보이는 미남 청년이었다. 약간 수줍어하는 듯하였고, 말은 별로 잘하지 못하였다. 인상은 좋은 편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목소리가 아주 굵고 부드러웠다. 과단성이 좀 없어 보였다. 경찰관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다. (…) 그는 나의 이상형이 아니었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은 내가 무척 싫어하는 것이었다. 내 마음을 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사람이 진실해 보여서 약간 호감이 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란히 서 있는 일곱 명의 여선생 가운데 나 한 사람이 번쩍 눈에 띄면서 바로 저 사람이 나의 배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눈에 이미 결정을 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2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구애하고 구혼하여 왔다.

  상주에서 올린 결혼식에 미동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내려와 축하를 해주었고, 몇 해 전에 가르쳤던 중앙초등학교 아이들이 축가를 불러주었다. 학교에 사표를 내고 상주군 외서면 지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내려간 어머니의 생이 그 시점부터 평탄하게 전개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1년 내지 2년 단위로 전근을 다니는 아버지의 월급은 최저생계비 수준이었다고 한다. 여섯 식구가 60년대 하급 경찰관의 월급에 목을 매고 살기에는 너무 벅찼다. 전근지 김천에서 아버지는 경찰복을 벗었다. 그 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형을 대구 할머니 댁으로 보내니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김천초등학교 교내 매점을 인수하여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시내에 문방구점을 열었다. 어머니가 대구로 물건을 하러 간 동안 아버지가 상점을 봐야 했으므로 부부가 장사에 매달리게 되었다. 문구점이 커져 나중에 도매를 겸하게 되자 하루 평균 다섯 짝의 물건이 들어왔다. 운명에 휘말려 문방구점 주인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장사 일이 도무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로 인한 충돌은 어머니의 가슴에 큰 상처가 되었다. 두 분의 허리에 생긴 고질병은 장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 몫까지 하며 사신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병마는 단 하루도 어머니를 떠난 적이 없었다. 30대의 협심증, 중년기의 귓병과 관절염, 노년기의 심장병과 요통……. 상점 문을 닫고 집에 와 다리가 아프다는 말씀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내가 어머니 다리를 두드려드리면 “아이고 시원하다, 아이고 시원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장사를 그만두신 지는 이제 겨우 5년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자라난 집은 비닐장판을 들치면 물이 축축이 배어 있는, 햇빛 한 뼘 안 들어오는 지하실이었다. 가게는 지상 1층이었고 물건은 상당수 2층 창고에 있었다. 하루에 계단을 수십 번 오르내리는 삶을 어머니는 30년 살아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회고록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걸어온 길도 그저 한 인생의 과정이었지 결코 남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며, 그 시대에 우리 민족 대다수가 겪었던 일을 나도 역시 겪으며 살아온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고.

  이렇게 담담히 술회하시지만 어머니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우리 현대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고 본다. 육이오가 일어나 외할아버지가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서울공대와 서울미대에 들어갔던 두 외삼촌이 학업을 마쳤을 것이고, 외갓집 모든 식구와 외사촌 동생들의 운명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올해 연세 어언 일흔, 인간의 평균수명으로 미루어보더라도 10년을 더 사실 것인가 20년을 더 사실 것인가. 그런데 나는 문방구점 지하실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해 고등학교를 두 달 다니고 그만둔 뒤 가출과 자살기도 사건을 주기적으로 일으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곤 했다. 언젠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전화기를 붙들고 장시간 통곡을 했다. 수면제에 의지해 살아간 나의 5년 세월을 지켜보며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어머니의 손을 떠올리며 시를 한 편 쓴 게 있다.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손은 깊은 계곡이다
  물 흐르지 않는

  내 손은 약손 승하 배는 똥배
  배 쓸어주시던 손길 참 부드러웠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황폐하다
  첫사랑을 잃고 서럽게 울었을 때
  손수건 꺼내 내 눈물 닦아주셨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자갈밭이다
  30년 동안 공책과 연필을 파신

  그 손으로 무친 나물의 맛
  그 손으로 때린 회초리의 아픔
  이제 곧 동이 터오면
  세 번째 수술을 받으시는 날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어떤 손」 전문

  내가 시인이 된 데는 어머니의 문학적 감수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장사 일에 지쳐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어머니의 교양과 훈육은 내 마음에 양식이 되었다. 내 영혼의 둥지에서 어머니는 늘 모이를 물어다주는 어미 새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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