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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메리칸의 뒤안길 / 꽁뜨 3題
                                                                                    손  용  상
                                                      
    1.풀 청소부 목사(目四)님

  사람들은 그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처음 그와 수인사를 나눌 때에도 소개시켜주던 선배가 그를 그렇게 불렀기에, 처음에는 정말로 그가 목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군대시절 군종병으로 복무했었기에, 그리고 그런 연줄로 미국에 와서 그냥 그렇게 ‘행세’만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두터운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아이들 문자로 목사(目四)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안경을 썼어도 근육이 제법 탱글 탱글하고 모난 얼굴이 꽤나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김새로 봐서는 서울 어디 뒷골목 술집의 기도 출신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생김새와 다르게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아무 화제나 빠지지 않고 꼭 끼어들며 “아, 그거 말이야, 나가 군대 있을 때 봤는데 말이시…… 어쩌고” 하는 잘난 척만 없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사실 그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일수록 속을 들여다 보면 구렁이가 앉아 있지는 않으니까.

그는 수영장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맡아 하는 풀은 스물댓 개 정도였는데, 주로 한적한 부자 백인동네의 개인 저택에 있는 것이라 했다. 때맞춰 물을 갈아 주고, 소독해주고 또는 물 이끼를 제거해주거나 수면에 떨어진 나무 이파리들을 건져내고 하는 작업이 그의 일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아주 쉬워 보이는 작업 같았지만, 그는 일만 갔다 오면 매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 해보더라고. 온 삭신이 다 아프당께. 이 일은 말이시, 하루에 다섯 탕 이상은 못 해여, 제기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고정 잡(job)이 있다는 일종의 자랑스러움이랄까,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가끔 푼돈도 만지는 것 같았다. 호기롭게 맥주 깡통이라도 사는 날은 그런 푼돈이 생기는 날이었다.

“월급 받았수?”
  내가 물어볼라치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경을 닦았다.
  “가끔 말이여, 풀장 모타가 잘 작동이 안될 때가 있거덩. 대충 뜯어보면 잔부속 한두개만 갈아끼우면 될 때가 있잖겄어? 그때는 말이시, 적당히 고개를 갸웃하다가설랑 바가지 좀 씌우는거지, 뭐.”
  “그래도 되는거유? 그러다 빵구나면 이거 될텐데……”
  내가 피식 웃으며 모가지 자르는 시늉을 하면 그는 오히려 딱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곤 했다.
  “이러언, 순진하긴. 이보라구, 그러니까 적당히…… 양심에 안 찔리게 하는 거라구 나는. 그러고 솔직한 말로다가, 코쟁이 부자 노친네들 을메나 노랭인지 아는감? 열심히 일해주는 대신 보나스삼아 좀 갈라먹자 이것이여.”
  “솔직해서 좋시다.”
  그러면 그는 단골 스토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말인즉 한국사람 얘기였다. 같은 동족끼리 사기치고 피 빨아먹고 하는 얘기들은 뱉어놓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나는 말이시, 적어도 그런 짓은 안 한다 이 말이여. 봐봐. 지난 번도 얘기했지? 거 뭐냐, 비자 사기치는 놈들 말이여. 그 사탕발림헌 선전을 보고 찾아간 우리 동포들 을매나 피를 토하겄나 말이시. 어디 그 뿐인감?”
하긴... 동감이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도 보고 들은 일이 어디 한 두가지였던가. 언젠가 안면 있는 어떤 사람의 딱한 사정이 떠올랐다.

얘기인 즉슨, 그 친구도 내 경우처럼 어찌어찌 미국으로 흘러와 체류비자가 만료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소위 F-1이라는 유학비자를 거금을 주고 신청했는데 변호사인지 사무장인지 하는 사람 왈, 처음엔 걱정일랑 마시오 하더니 반년도 훌쩍 넘어 10여개월이 다 되가자 “글쎄, 그게 빠꾸당했다네요.” 하더란다. 당초부터 싹수가 없다 했으면 꿈이나 꾸지 않았을 것을, 돈만 날리고 나니 황당해진 그 친구 어쩔 수 없이 매달릴 수 밖에.

그들은 그렇다면 정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민국에 새로 어필해서 여하간 합법체류를 하게 해줄테니 또 몇 천불을 가져오라고 하더라나.
욕지거리가 나와도 어쩌랴!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한국으로, 친구들에게로 구걸하다시피 그 돈을 마련해서 갖다 바쳤는데, 이상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유학비자가 나왔다고 하면서 축하 말씀(?)과 더불어 온갖 생색을 다 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놈이 알고 보니 가짜일 줄이야!

“있잖아요, 즈그들도 여기 처음 왔을 때엔 고생 했을테고 우리 같은 사람 심정 누구보다 잘 알것 아니에요? 그런데 두 번씩이나 사기를 치면 되겠어요? 사람이라면 두 번째는 돈 아끼라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 가증스러워요.”
그 친구는 분해하기 보다는 사람이 싫어진다고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그 때 그 얘기를 들은 목사는 또 한 번 입에 거품을 물며 사기꾼들을 성토하다가 문득 그 친구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었다.

  “좋은 경험 했구먼. 하지만 웃고 마소. 열나서 속 끓이면 병난당께. 헌데, 난 당신이 걱정이구만?”
  “네?”
  “이 동네 말이시. 신참이 와서 두어번 당하고 나면 억울해 갖고, 나중에 꼭 복수를 하더란 말이여.”
  “복수요?”
  “으응, 그렁께…… 당한 사람이 한 일이년 구르고나면 빠꼼이가 되갖고, 또 새로온 놈 똑같이 벗겨 먹더라 이거여. 그래야 본전을 찾응께…… 당신은 그러지 말더라고.”
  “에이, 아무리……”
  그 친구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상 일 누가 알까? 어차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비정함만이 가득한 정글 속 아닌가. 후회없이 부끄럼없이 헤쳐갈 수 있을까.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2.  “낭만에 대하여”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나는 리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녹음기를 틀었다. 타고 다니는 차가 워낙 고물이라 카세트 테이프를 끼우는 구멍만 뻥하니 뚫려 있었기에 나는 조그만 녹음기를 하나 사서 들고 다니며 심심하면 테이프를 틀거나 욕지거리를 뱉어내곤 했다.

쌩쌩한 고급 차에 CD까지 달린 오디오도 빵빵한 그것에 비하면 한심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놈은 내가 미국에 와서 구입한 최초의 친구였다. 가끔 자기가 뱉어놓은 욕지거리도 다시 들을 수 있었기에 아내 정임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든 동반자였다.

녹음기에선 최백호가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70년대식 다방에 마담과 마주 앉아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고 어쩌고 하는 가사였는데 제목이 ‘낭만에 대하여’라든가. 탱고 곡이긴 하지만 귀에 익은 멜로디도 아니고 노랫말도 다소 낯선 것이었는데, 이놈이 묘하게도 그의 가슴에 물을 뿌릴 줄이야.

낭만이라…. !
낭만이라 함은, 우리가 살아온 정서로 봐선 우선 떠오르는 것이 해질녘의 바닷가라든가, 바람 부는 산등성이, 겨울날의 주막집…… 뭐 이런 막연한 상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어떤 배경이나 풍경을 아련히 그리며 왠지 쓸쓸해져 그 조용한 배경에서 일상을 잠시 잊고 싶었다고 할까.

그건 아마도 북적대는 인파에 늘 시달리는 우리네 본능이 소위 낭만을 찾고 싶을 때만큼은 좀 조용한, 고요한 그것을 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술잔 기울이며 멋있는 폼으로 담배 한 대 피워물고 있는 제 모습을 어떤 괜찮은 여자라도 봐줘서 어떻게 썸씽이라도 생긴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이런 생각 안 해 본 놈 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말하자면 낭만을 찾는다면 최백호 노랫말처럼 앞에 한복 입은 다방 마담이라도 함께 앉아 있어야만 외롭네 어쩝네하는 구라도 술술 나오지 백날 혼자 앉아 그 놈을 찾아본들 가슴에 멍만 더 커갈 뿐일터였다.

미국은 더 했다. 외롭고 쓸쓸해서 공원을 찾든 바닷가를 가든 말도 잘 안 통하는 희고 검은 친구들만 우글댈 뿐, 누가 와서 너 외롭지? 하고 말이나 걸어주는 놈이 있었던가. 나는 녹음기 보륨을 조정하며 혼자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인간이 낭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공연히 최백호가 밉살스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옛날 캠퍼스 시절의 한 친구 녀석이 떠올라 삐딱해진 머리와는 달리 마음이 젖어왔다.

녀석은 나보다 훨씬 이전에 미국엘 왔다. 유학이었다. 고생고생 말이 아니었으나 청운의 뜻을 품고 드림랜드를 왔으니 얼마나 멋지냐,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다가 어느 해 성탄절을 맞았다고 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막상 명절이 다가오니 한 놈 두 놈 다 빠져나가고 완전히 녀석 혼자만 외톨이가 되었다고 했다.
언젠 혼자 아니었나? 하는 오기로 기숙사 뒤뜰에 홀로 앉아, 만리타향으로 큰 꿈을 안고 온 한 청년이 진솔한 고독을 만끽해보는 것도 또한 낭만이 아니랴 싶어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보고 말이라도 걸어주길 기대했었는데, 도무지 몇 시간이 지나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니 이건 낭만이 아니라 절망이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는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나가 다운타운으로 갔다고 했다. 오로지 사람 냄새를 맡으려고.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놀아줄 사람도 없었고 새벽이 넘어가자 거리마저 텅텅 비어 있었다고 했다.

“야! 한국엔 말이야, 밤늦게 들어가다가 보면 동네 어귀에 포장마차도 있고 구멍가게 앞에 평상 펴놓고 소주 마시는 아저씨들도 있잖어? 그러다 보면 런닝셔츠 차림의 아는 얼굴이 ‘어이, 늦었네. 일루와 맥주 한잔해. 날씨 되게 덥네. 그래 유학 준비는 잘 되가?’ 하면서 불러주기도 하잖어?”

이런 말들이 그리워 그는 한 때 미칠 것 같았다고 썼던 그의 편지가 생각났다. 맞아! 나는 담배를 빼어 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낮이건 밤이건 정신 없이 일에 휘몰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이 곳은 혹성이었다. 마켓이나 몰이 아니면 그나마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든 곳. 도대체 여기 사는 놈들은 허구헌 날 집구석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말이면 주말이라고 즈들끼리 놀고, 평일이면 옆눈도 안팔고 일에 매달리고…. 동네에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곳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면, “얌마! 넌 아직도 미국을 몰라서 그래.” 라고 모두들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이! 누구 없어? 퇴근하고 누구 나랑 술 한잔 할 놈?”
“운전 안 해? 음주운전 걸리면 돈이 만불이나 깨져, 임마!”
“우리 마누라 도끼눈 뜬다. 애들 픽업도 가야 돼.”

  -염병할!
  나는 혼자 생각에 녹음기가 멎은 것도 모른 채 차창 밖으로 찍 침을 뱉었다.
  “늦었네. 피곤하지? 얼른 씻고 나와. 상 차려 놓을게.”
후줄근하게 들어서는 내 모습에 아내가 앞치마로 손을 훔치며 상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 밥 안 먹을래. 소주나 한 잔 주라”
  “왜?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놀란 듯 조심스레 물어왔다.
  “일은 무슨… 암일 없어. 그냥… 낭만이나 수입하면 어떨까 해서”

이렇게 용렬스러운 투정이라도 부려야 기분이 좀 풀리려나. 나는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아내에게 공연히 퉁명을 부리며 웃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3. 곗돈 네다바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 정임이 소파에서 훌쩍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입성도 아무렇게나 걸치고 머리를 산발한 채 꺽꺽거리는 모습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아니,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이 아줌마가 도대체 무슨 큰 일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감춰진 객기가 발동됐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아내는 성격이 좀 별났다. 어느 때에는 아기처럼 천진난만, 순수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아주 못말리는 장돌뱅이다 싶을 정도로 못 말리는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먼 이국 땅에서 극적으로 만나 어영부영 살림을 시작한 후, 신랑이 된 나에게만큼은 어떤 마누라가 그리할까 싶을 정도로 지극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의 기질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3중 구조의 성격이랄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가끔 나는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 술망나니 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났고, 그랬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눈치 코치만 동물적으로 발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 이상으로는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우리네 주변에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모든 것이 본인하기 나름인지라 유독 내 아내라고 남달리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을 삐딱하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왔어? 밥 안 먹었지?”
그녀가 벌개진 눈자위를 스윽 문지르며 엉거주춤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아니, 괜찮아.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 어린 애도 아니고…”
“치이… 자기는 친구 편지 읽다가도 울었으면서…”
그녀가 엉뚱한 소리를 뱉어내며 우는 듯 웃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갑자기 나를 끌어안으며 임자 만났다는 듯 어깨를 떨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러언, 정말…애기같이 왜 이래? 도대체 무슨 일인데? 얘길 좀 해봐…!”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공연히 아내가 안쓰러워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느낌이 그래서인지, 처음 만나 그녀를 안을 때와는 달리 어쩐지 탄력도 줄었고, 몸도 야윈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가 혹 이 여자에게 뭔가 나도 모르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았는지, 그래서 나로 인해 무슨 일이나 일어난 것이 아닌지 더럭 의심이 생기며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젠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얼마간 빈둥거리며 매일 잠만 자고 있을 때였다. 밤 늦게 들어온 그녀가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이구, 집안 정리나 좀 해놓지…… 운동도 좀 하고. 천상 한국 남자라니까.”
그때 그녀가 무슨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 날 이후 공연히 섭한 마음이 들어 며칠을 아내와 대화도 끊은 채 밤 늦게까지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괜스레 울퉁불퉁 심통을 부리며 그녀를 괴롭혔었다.

결국엔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가 속으로는 삐죽됐을지 몰랐으나 겉으로는 아양 섞인 사과를 하며 고물고물 나의 거시기를 성나게 함으로써 서로 풀고 말았지만, 생각해보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용렬스러운 한국산 남정네가 어디 나 같은 놈 뿐이겠는가?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니까? 혹시……나 때문에 무슨 일 있는 거야?”
나는 정색을 하며 포옹을 풀곤 다그치듯 물었다. 그녀는 내 옷자락으로 눈물을닦으며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나, 돈 떼였어!”
  “뭐?”
  “돈 떼였다구! 그 망할 계집애한테!”
그녀는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듯 나의 옷자락을 놓고는 휴지에 팽 코를 풀었다.
“그 망할…계집애가 누군데?”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내가 어눌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나를 밀치곤 독해진 표정으로 식탁으로 갔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밑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리며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 있잖아… 내 후배라고 소개해줬던, 스탠드 바 하던 그 계집애”
“아…! 그런데?”
  “그 계집애가 글쎄, 내가 곗돈 탄 걸 알고는 급하다면서 이틀만 쓰자더라구…지 체크까지 끊어주면서.”

나는 언젠가 인사를 나눴던 그 “망할 계집애”를 떠올렸다. 그녀의 후배라는 꽤나 곱상하고 활달한 인상이었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아내의 돈을 네다바이 했다고? 나는 풀썩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삼만. 그 돈으로 우리 둘이 가게 차릴 밑천 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녀가 부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많기도 하다. 난 그 돈 있으면 은행 차리겄네, 흐흐… 근데, 체크 받았다며? 그건?”
  “그 체크? 오늘 은행에 입금했더니 잔금이 없다고 나오더라. 그것만이면 내 말을 안하지.”
  “또 있어?”
  “게다가 분실신고까지 된 수표라는 거야.”
  “분실 수표? 아니, 걔가 자기한테 끊어준 거라며?”
  “글쎄, 고계집애가 그래 놓고는 또 분실신고를 했나 봐. 나쁜 것! 그리곤 가게 문 닫고 행방불명이야.”

세상 참! 듣고 보니 완전히 계획적인 네다바이였다. 결과적으로 내 아내만 호구였던 셈이었다. 이 나라 이 바닥에 오면 대충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는건지?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그녀의 볼을 가볍게 쥐었다.

“어쩌겠어! 일단 잊어버려. 살다보면 고계집애 어디선가 한번은 만나게 될 거야. 우리가 어느날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났듯이 말이야. 오늘 저녁…내 혼내줄게.”

“차암, 기가 막혀서…”
비교적 낙천적인 아내가 내가 지껄인 흰소리에 아울러 함께 혀를 차며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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