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한다. 국내에서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부부의 날까지 몰려 주말마다 모든 사회 영역에서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고 한다. 허나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중에서도 어머니날을 되새기는 것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그 ‘참 사랑’을 표현하기는 참 어렵다. 다음은 과거 장성한 자식을 사고로 잃은故 박완서 작가의 구어체적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끝 부분을 나름대로 요약, 소개한 것이다. 백 마디 말보다 ‘웬수’같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략)....한 열흘 됐나, 친구 명애가 저더러 같이 병문안 갈 데가 있다는 거예요. 아픈 사람은 아는 친구의 아들이라 했는데, 가보니 친구는 병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어요. 몇 년 전에 차 사고로 뇌와 척수를 다쳐 하반신 마비에다 치매까지 된 거였어요. 오랜 병구완 때문인지 그 친구는 정말 파파 할머니가 돼 있더라구요. 그의 아들도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어요. 누워 있는 뼈대로 봐서는 기골 장대한 청년이었는데 살이 푸석하게 찌고, 또 표정도 근육이 씰룩거리고 있는 것 밖에는 희노애락과는 동떨어져 보여 서로 마주 보기가 민망했어요.
(중략) ㅡ아이구, 저놈의 대천지 웬수... 친구는 아들을 이름 대신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 밖에도 말끝마다 욕이 줄줄이 달렸어요. 오죽 악에 받치면 저럴까,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사간 깡통 파인애플을 아들의 입에 넣어주면서도 이 웬수야, 어서 쳐먹고 뒈져라,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아들에게 파인애플을 세 조각이나 먹이고 난 친구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아들이 깔고 있는 널찍한 요 위에서 아들을 공기 굴리듯이 굴리기 시작했어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한 묘기였어요. 욕창이 생길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짓을 한다나 봐요. 엎었다가, 바로 뉘었다가, 모로 뉘었다가 그 장대한 아들을 자유자재로 굴리며 바닥에 닿았던 부분을 마사지하는데 그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거였어요.
(중략) ㅡ아이고 이 웬수 덩어리 천근이야, 무겁기도 해라! 근심이 있나 걱정이 있나, 주는 대로 처먹고 잘 싸니 무거울 수밖에, 내가 이 웬수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지. 이 웬수야, 니가 내 앞에서 뒈져야지 내가 널 두고 뒈져봐라, 나도 눈 못 감겠지만 니 신세는 뭐가 되니. 몸이 성해야 빌어먹기라도 하지, 아이고, 하느님,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이 꼴을 보게 하십니까? .....(중략)
이러면서 병자를 요리조리 굴리고 주무르는데 그 말라빠진 노파가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지, 꼭 공깃돌 갖고 놀듯 하더라니까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어요. 우리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아이 참, 하면서 손을 내밀어 거들려고 했죠. 그러나 웬걸요! 우리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환자가 괴성을 질렀어요. 여지껏 공허하게 열려있던 환자의 눈이 성난 짐승처럼 난폭해지더군요. 얼마나 놀랬는지...그의 흐리멍덩한 눈은 엄마에 신뢰와 평안감의 극치였어요. 그때 비로소 악담밖에 안 남은 것 같은 친구 얼굴에서 자애(慈愛)를 읽었죠. 아이구 이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 하는 친구의 말로 미뤄 어머니 외에 아무도 그를 못 만지게 한 것이었지요. 저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날카로운 창 같은 게 가슴 한가운데를 깊이 훑어내렸어요. (중략)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요?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북받치더군요. 대성통곡을 하였어요. 그 친구는 그렇게까지 불쌍해할 것 없다고 화를 내더군요. 그러나 전 그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며진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제는 울고 싶을 때 우는 낙으로 살아요.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것도 안 할 거구요. 생각해보면 생때같은 아들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꾸미며, 왜 그리 독하게 세상을 살았는지.....(이하 생략)”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그 글속의 그 청년이 비록 엄마에게 ‘대천지 웬수’일망정 그녀가 곁에 있어 ‘엄마’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그나마 나에겐 그 ‘엄마의 웬수’가 되고 싶어도 이제 내 곁엔 그녀가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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