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6.02.01 11:13

봄날의 기억-성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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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기억
                                                     성민희


친구와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나왔다. 아스팔트 위로 스쳐간 봄볕 흔적이 따스하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그림자도 어느새 훌쩍 길어져 있다. 서둘러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우회전하려고 길가 쪽 차선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쾅, 자동차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내 눈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나와 같은 방향에서 직진하던 차 앞머리를 반대편에서 좌회전하던 차가 들이받았다. 노란불에 뛰어든 직진 차도 잘못이고, 앞에서 달려오는 차를 기다리지 않고 좌회전을 시도한 차도 잘못이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무조건 좌회전한 차의 잘못이라고 들었다.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선 두 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직진 차에서는 금발의 중년 부인이, 좌회전 차에서는 머리를 질끈 묶은 작은 히스패닉 여자가 내린다. 금발여자가 우아하게 손가락으로 길모퉁이를 가리킨다. 차를 돌려서 길 한쪽으로 옮기자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여자. 각자 자기 차에 탄다. 금발여자의 벤츠가 서서히 움직여 길가에 서는데. 작은 여자의 차는 그쪽으로 따라가는 것 같더니 멈칫하고는 방향을 돌려 달아나 버린다. 금발은 멍하니, 도망가는 차를 대책 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어머 어머만 연발했다.


몇 년 전, 나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 직진하던 내 차를 좌회전하던 차가 들이받았던 것이다. "교통에 방해되니 차부터 먼저 길가로 옮길까요?" 터번을 머리에 쓴 중동 남자가 점잖게 말했다. 내가 허둥대며 시동을 거는 순간 그는 차를 홱 돌려서 반대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너무나 황당했지만 사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다 여기며 씁쓸히 돌아섰다.


매연을 피우면서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는 작은 여자의 차가 눈앞에 보인다. 갑자기 정의감이 막 솟아난다. 옳지. 마침 내가 가는 방향. 이대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거야. 미안하단 말은커녕 뺑소니라니. 액셀을 힘껏 밟는다. 크락션도 울린다. 나의 흥분에 옆자리의 친구도 서라는 손짓을 쉬지 않고 보내며 뺑소니차 추격전에 합류했다.

                                  

   세 블록가량을 마치 곡예 하 듯 쫓아갔다. 차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따라가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도망가는 모습이 괘씸해서 멈출 수가 없다. 드디어 여자도 지쳤는지 작은 골목길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갔다. 속력을 줄이더니 마침내 그 차가 길옆에 섰다.


우리는 와다닥 차에서 내렸다. 마치 교통순경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 손을 아래위로 젖히며 유리창을 내리라는 시늉을 했다. “왜 남의 차를 받아놓고 도망을 쳤어요? 당신은 힛 앤 런...” 그녀가 울고 있다.


고개를 들이밀고 차 안을 살폈다. 차 안에서 꾀죄죄한 가난의 냄새가 확 풍긴다. 뒷좌석 카시트에 앉은 아기의 손을 너덧 살은 됨직한 누나가 두 손으로 꼭 잡아 주고 있다. 둘 다 발그레 홍조 띤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내 눈과 마주친 아이들의 눈망울이 몹시 흔들린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나 보다. 새벽 일찍 베이비시터에게 맡겼던 아이들을 이제 데려왔구나. 서로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나도 햇살 눈부신 창밖을 내다보며 한 살배기 딸을 종일 그리워하던 날이 있었지.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던 시간, 카시트에 앉은 딸에게 ‘itsy bitsy spider’ 노래를 불러주며 집으로 향하던 날이 있었지.


친구는 어느새 차 꽁무니에 가서 플레이트 번호를 적고 있다. 친구를 불렀다. 메모한 종이를 받아 여자에게 티켓인 양 건네주며 말했다. "어서 가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운전도 천천히 하고….”


어리둥절한 여자와 친구를 뒤로 한 채 내 차로 걸어가며 중얼거린다. ‘금발 여자는 벤츠를 탔던데 뭐. 그녀도 내 맘과 같을 거야. 케네디 대통령이 연설했잖아. 우리는 하나뿐일지도 모르는 이 지구에서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시고,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야. 아무도 없는 우주공간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 치던 샌드라 블록도 생각해 봐. 함께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자목련 가지 위로 사뿐 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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