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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되어  (4)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끝나고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고 그 때 그녀는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며 병원 마당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주홍의 부신 햇살로 눈이 시려왔다.

병원 뜰에 마련된 벤치에는 간간이 환자들이 나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주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자신만을 들여다 보고 있는듯 보였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세상과의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에 버거워 자기에게 꼭 맞는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녀가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만난 모든 환자들은 다 혼자만의 세상이 있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갇혀버린 세상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천진함으로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아무도 가늠 못할 갈망이 담겨 있었다.

병원 뜰을 한 바퀴 돌아서 그녀는 한 쪽 구석 자리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는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았는데 그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여윈 그의 몸과 더불어 한 없이 슬퍼보였다.  
잔뜩 움츠려 앉았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병원 입구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문을 통해 그 사람이 지금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 그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처럼 그 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믿음이 1년이 넘게 한 곳만 바라보며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일까?
그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지 않는 기다림이, 그 갈망이 그녀의 마음에 작은 물살을 일으키며 다가옴을 느꼈다.    

“어떻게 지냈어요?  잠은 잘 자요?”
그녀는 의사가 된듯이 그의 일상을 물었다.
“병원에서는 잘 자요.  약을 먹으면 기운이 없지만 밤이 되면 금새 잠이 들어요.”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  그의 말소리는 전과 다르게 분명하고 또렸했다.  
“병원에 오기 전에는 잘 못 잤군요?”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는게 소원이었어요.  언제나 나는 꿈을 꾸었어요.  병원에 와서도 가끔 꿈을 꿔요.  전처럼 무서운 꿈을 꿀 때도 있지만 옛날 내가 살던 집이나 어릴 적 내 모습으로 내가 꿈에 나타나기도 해요. 그리고 그 사람...”
그는 얘기를 또박또박 끊어가며 매우 분명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에서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띄고 계속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지요?  나는 선생님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여러번 만난 것 같은데 언제 또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안 나요.”
“선생님이라 부르지 마세요.  나는 여러분들과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에요.  내 이름은 수경이에요, 민 수경.”
“수경...씨...”

그가 눈을 들어 안경 넘어 아득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목소리, 깨끗하게 다듬어진 조각같은 얼굴선, 훤칠하게 큰 키, 더구나 그는 최고의 명문대 의대생이었다.  어디로 보아도 그는 모자람이 없는 젊은이었다.  
그런 그가 이 곳, 정신병원에서 1년이 넘게 가두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거부하고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 그였다.  
자신이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어긋나 버린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는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녀의 가슴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글픔일지 애틋함일지... 아련히 먼 곳으로 부터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혹은 차 안에서 어딘가에서 만났을 수도 있어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난 수경씨를 틀림없이 만났어요.
  처음 병원 오신 날, 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요.  수경씨가 왜 병원에 왔는지도 알아요.    
  그가 오기 전에... 이제 그가 오겠지요, 수경씨가 왔으니...”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해요.  
  하지만 수경씨는 알고 있다는 걸 난 알아요.  아주 오래 전부터 수경씨는 나와 특별한 사
  이였다는 것을요.”  
그녀는 말을 잊지 못했다.  
온 몸이 전율로 떨려왔다.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천천히 슬픔으로 변하여 가슴에 채워졌고 그렇게 가득한 슬픔은 울음으로 터져나올 것같았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사건에 맞닥뜨리거나 혹은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혼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을 때나, 캄캄한 밤에 알 수없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든지 종종 맞게 되는 그런 순간들에서 그녀는 엄마의 환영을 보곤 했다.  
그런 때의 첫 순간에도 그녀는 무섭고 두려운 전율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때도 두려움은 곧 슬픔이 되어 가슴을 내리 눌러 숨막히게 했는데 그 막힌 가슴은 눈물로 흐느끼는 목소리 그 후에나 뚫어지곤 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 자리를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이 밀려들었지만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는 간절한 그의 눈빛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그녀도 그가 바라는 세상에서 왔다고 말 해 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     *     *     *     *     *     *     *     *     *

나비도 그림자를 만들 수 있을까?
한 없이 얇은 날개를 공중으로 저어대며 머무를 줄 모르고 나르는데
바쁜 날개짓만큼이나 바쁘게 나비는 제 그림자를 지우고 다닌다.
나비도 분명 그림자를 만들겠으나
꽃그늘에 가리우고 땅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유난히 빛나는 어느 밝은 날, 내 영이 새 힘 얻는
어느 순간에는 나비의 그림자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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