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다케시마의 날과 독도칙령기념일 소고■ 왜 ‘독도칙령기념일’ 명칭으로 국가 기념일이 지정되어야 하는가? 2월22일을 두고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한국 사회는 일본에 의한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맞대응 하는 격으로 10월25일을 소위 '독도의 날'을 명칭 하여 기념일로 하자는 잘못된 문화를 낳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독도의 날'이 되면 마치 이날이 독도 영토 주권에 권원으로 오인하게 하려는 일본 전략에 휘말려 드는 것입니다. 한국은 소위 '독도의 날'을 기념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그해가 법정1회차년 기념일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독도 역사에서 후손들은 일본보다 올해로 무려 17년이나 뒤떨어지는 독도 역사를 만들어주는 오류를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독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일본보다 뒤 쳐지는 역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주는 잘못된 역사와 문화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독도의 날'이 아니라 1900년10월25일 대한제국칙령제41호를 반포한 참 역사를 직접 거명하여 '독도칙령기념일'이 되어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에 의한 한일간 역사인식에 문제에 상처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금년 10월25일이면 122주년이 되니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과는 비교 될 수가 없습니다. 한일간 역사 인식에 문제로 다투고 있는 독도에 진실한 역사를 두고 우리가 스스로 불리한 변조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사유입니다. 일본은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만들어 중앙 정부 차관 급 요인이 참석하는 행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 이목을 집중 시켜 ICJ(국제사법재판소) 제소에 빌미를 잡으려고 하는 치밀한 전략에 휘말림을 막는 길은, 대한제국칙령제41호 반포일을 소위 '독도의 날'이 아니라 올해로 122주년이 되는 ‘독도칙령기념일’이 되어야 하는 사유인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독도 침탈에 날조 역사 '다케시마의 날' 근원이 되는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속에 숨겨져 있는 '고시하지 못한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점을 이해하고 나면 일본이 펼쳐 놓은 소위 다케시마의 날이 허구라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 원본은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 시청 독도 담당자가 직접 "당해 원본이 보관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현재 시마네현보에 편철되어 있는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 고시 문서는 하급 기관 아이카무라에서 회람 용으로 보관하던 것을 수거하였다”는 증언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현존하는 시마네현보는 그들 말에 의하면, 태평양 전쟁 패전 당시 일본 천황에 의한 무조건 항복에 반기를 든 자국 폭도들에 의해, 당시 시마네현 마쓰에 시청 목조 청사가 불탈 때 함께 소실(1945.8.24)되어 재 편철 되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재편철되었다고 하는 시마네현보 마저 날조로 드러난 정황을 보면, 당해 고시를 하달받았다고 하는 당시 시마네현 지사 송영무길이 재직하기도 훨씬 전(18년 전) 문서에, 송영무길 수결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현존하는 시마네현보는 후일 목적에 의한 조작된 정황도 드러난 것입니다. 한국 전 와중에 샌프란시스코 협약을 대비한 일본은 독도 침탈을 획책하고 미국에 로비 하기 위해 챙겨간 '독도 역사 날조 사료'에 불과 한 것입니다. 일본 역사에서 성공한 하급사무라이들의 반란이 ‘메이지 유신’입니다. 하급 사무라이들이 반란에 성공을 하자 국민 동조에 고심을 하게 되면서, 발상 된 것이 '천황'을 제조하여 人神으로 세운 國家神道에 발상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신 격화 하여 사람 위에 존재하는 人神에게 절대 복종을 강제하는 시스템을 구성한 것입니다. "天皇は、日本國の象徵であり日本國民統合の象徵であつて、この地位は、主權の存する日本國民の總意に基" "천황은 일본 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 출처: 일본 국 헌법(日本國憲法) 제1장 '천황(天皇)' 한 마디로 일본에 있는 모든 신 위에 살아있는 사람을 천황으로 두고 '國家神道'를 세운 것입니다. 일본 메이지 정부 태정관(총리 대신)과 외무대신은 1869년 12월 조선국 국교 재개를 빌미로 내정을 조사하기 위하여 외무성 관료 세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후 실제 메이지 정부 외무성은 신정부 수립 직후인 1869년 12월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午(1870년)4월 외무성 고위관리인 출사 - 사다하쿠보(佐田白茅) -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 사이토 사카에(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14개 항목의 지시를 내렸는데, 그 중 하나가 죽도(당시 울릉도)와 송도(당시 독도)가 조선의 땅인지 조사하라는 명령입니다. 일본 정부는 명치 9년(1876년) 일본 전 지역으로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행하게 됩니다. 이 때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 참사(島根縣參事) 사카이 지로(境二郞)는 竹島(당시 울릉도 지칭)와 松島(당시 독도 지칭)를 지적에 포함시켜야 할지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하게 됩니다. 이 질의를 받은 일본 내무성은 5개월 여 간에 걸쳐 17세기 이래 조선과 일본간에 교신한 관련문서를 모두 조사해 본 후,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국 스스로 당시 울릉도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할 때 근거로 삼은 것이 그 동안 교신한 양국의 사료에 근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두 종류 문서는 그 중 일부 일본측에서 공개된 중요한 사료입니다. ■ 은주시청합기(1667) 隱州視聽合記 일본 지방 관리가 1667년 오키 섬을 둘러본 뒤 자신이 보고 들은 오키 섬의 역사, 지리 등을 상세히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일본의 북쪽 한계를 오키 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료가 주는 의미는 당시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료입니다. ■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0년)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일본은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부가 붕괴되고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내세워 '國家神道'를 만들면서 조선을 무단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내용》 [송도(당시 일본에 의한 독도 지칭)는 죽도 옆에 있는 섬이다. 송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기록된 바가 없으나, 죽도(당시 일본에 의해 울릉도 지칭)에 관한 기록은 원록 연간에 주고받은 서한에 있다. 원록 연간 이후 한 동안 조선사람을 파견해 거류하게 했으나 이제는 이전처럼 무인도가 되었다. 대나무와 대나무보다 두꺼운 갈대가 자라고 인삼도 저절로 나며 그 외 어획도 어느정도 된다고 들었다. 이상은 조선의 사정을 현지에서 정찰한 내용으로 그 대략적인 것은 서면에 기록한 대로다. 일단 귀국해서 사안별로 조사한 서류, 그림, 도면 등을 첨부해 보고하겠다. -이상- 午(1870년)4월 외무성 출사 - 사다하쿠보 - 모리야마 시게루 - 사이토 사카에] 일본 내무성은 다음해인 1877년 3월 17일 이렇게 내려진 결론에 대하여 당시 일본 최고의 행정기관이었던 태정관(우리의 총리실 격)에 '日本海 內 竹島外一島 지적 편찬에 대한 質稟書'를 올려 최종 결심을 구했습니다. 이에 태정관은 동년 3월 29일 “품의한 취지의 竹島外一島之件에 대하여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心得)”이라고 내무성에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어서 4월 9일자로 시마네현에 이 지령을 전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지역에 포함시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렇게 명백한 자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외면하고, 또 부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당시 관련자들의 정신 상태까지 거론하면서 부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시마네현지적고시사업태정관지령'으로 명칭만 봐도 일본 정부가 직접 관계한 공식 명령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적 고시는 개인이 실시할 수 없기에 국가에 의한 공공직무라는 사실을 두고 보면, 한일간 독도 이견에 원인을 역사인식에 오류로 잡고 인내하며 바로잡아 가야하는 한국인에 사명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1902년 들어 러일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은 '내무성훈령87호'로 황급히 시마네현 지사에게 '독도를 자국영토로 귀속하는 고시를 하라'고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 침탈과 대륙 침탈을 획책한 후 열강들의 반대여론을 피해가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한 대목입니다. 국운 존폐에 운이 걸려 있는 러일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일본 중앙정부가 격렬한 해전장이 될 동해 재해권을 거머쥘 수 있는 단 두개뿐인 섬,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열강들에게 들키지 않게 강탈해야 할 절체절명에 정황을 드러내준 증거일 뿐입니다. 타국에 섬을 지방 지사가 편입토록 고시하라는 훈령을 내렸다는 뜻은 중앙정부가 도마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배경을 스스로 자백한 내용인 것입니다. 일본은 위와 같은 그 간의 자국 정황들과 숨겨야 할 대륙 침탈 야욕으로 인해 독도에 관한 한 국제적으로 공인되는 아무런 행위도 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러일전쟁 직후 조선(당시 대한제국)땅에 대륙을 향해 세워야 할 '일본 국가 이전 계획'이라는 당시 제국 일본의 야욕으로 볼 때 독도 크기는 당시에는 드러낼 가치도 없는 작은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당시 일본 무력은 조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제압하였고, 외교권을 박탈할 정도에 실행단계에 있었으며, 대륙을 침탈하여 꿈에도 그리던 대륙일본(만주국) 건설을 실행할 수 있는 실천계획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독도 하나로 일본의 야심을 국제사회 열강에게 보여 재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시마네현고시40호를 고시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정황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고종황제가 '칙령제41호'를 반포하였고 국제사회 호소와 노력에 의해 더욱 주춤해 하던 일본에 정황인 것입니다. 반란죄로 감옥에서 사형언도되어 집행을 기다리던 황실 근친 청년 이승만을 구제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허락하며, 당시 미국대통령 영애(공주)의 내한(대한제국) 요청 밀사를 전한 사례는 대한제국의 급박한 상황에 따른 국제사회 호소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고종황제는 유학을 허락 받은 이승만 편에 자신에 ‘황룡포’를 선물 전달하면서 방한(대한제국)을 기대했으나, 물론 일본의 방해로 방일 목적만 완수하고 되돌아 가게 됩니다. 미국과에 결별을 선언하는 일본에게 한미접촉이라는 불안요인으로 작동되어 오히려 강제병합을 재촉하는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의 고시를 실행하지 못하게 된 사연은 또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대륙 침탈 팽창주의에 물들어 그동안 개항 지원을 받아오던 미국과 결별하고, 영국 유학파 이등박문을 필두로 영일동맹을 추진하게 되자,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과 반대에 노출되지 않아야 하는 절대 다급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일본이 처한 불가항력적인 상황하에서 국가 행정력 누수와, 시마네현 지도층들에 의한 의도된 누락 등, 복합현상으로 인해 당해 고시를 중앙정부가 정식으로 고시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식민지 선점 주의가 팽배하던 열강들 간 국제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갈 눈치를 크게 봐야하는 신생 제국 일본의 성장 과정에 걸림돌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사유도 한몫으로 작동합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은 자국 상황과, 대한제국이 펼친 부단한 저항력에 밀려, 그들이 주장하는 1905.2.22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를 중앙정부가 나서는 정식 고시를 실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 놓이다 보니 시마네현 마저 공식절차로 실시하지 못하였고, 시마네현 당시 지사 송영무길의 역사관에 비친 실낱 같은 양심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역사는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 원본이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사유를 회람용 사본이라는 허구에 사료를 보여주고 있고, 뒷 받침 할 궁색한 역사를 날조하며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만들어 허구에 역사를 보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먼 훗날 시마네현고시40호가 원본으로 나타난다 해도 정식고시하지 못하고 폐기된 자료일 뿐이며, 관보 개재 등 국제간 공인되지 못한 날조 기록물이기에 증명될 수 없는 허구에 불과 할 뿐입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 탄생 뒷배가 되는 소위 '시마네현 고시40호' 원본은 일본정부 어디에도 보존되어 있지 않음이 직접 확인된 사항입니다. 심지어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에 관한 텍스트가 한일 외교행랑 등 어떠한 경로로 라도 이 땅으로 전달된 사항이 없다는 사실도 한국외교부에서 직접 확인된 사항입니다. 독도와 같이 영토주권에 관련한 중요한 사건은 국제간 공인 되어야 하는 절차 중에 관보에 수록되는 등, 정부간에 이루어진 절차 등으로 드러난 과정에 의해서 인정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역사인식에 문제로 상처를 안고 있는 독도를 이해하는 한국인이라면, 소위 시마네현고시40호는 고시되지못한 일본에 의한 일방 주장일뿐입니다. 날조된 역사를 두고 한국 일각에는 고시했다고하며 우리 스스로 선 인정, 후 반론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시마네현고시40호는 정식 고시되지 못한 날조에 주장일 뿐입니다. 한국사회는 진실한 독도역사를 가려버리는 소위 '독도의 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영토주권으로 정당성과 당위성이 함께하는 '대한제국칙령제41호' 반포 역사를 직접 거명하는 '독도칙령기념일'을 만들어야 옳바른 독도 역사가 됩니다. 올해로122주년이 되는 10월25일은 '독도칙령기념일'이 되어야 독도역사에 정당성이 함께하는 122주년에 역사가 이어지게 됩니다. 영토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지키는 것입니다. ※ 참고자료 1.「독도 문제의 진실」- 정태상 2.「독도와 스카핀」- 나홍주 3.「독도사관연구소 관보」- 한민족역사문화지명사연구소 ㅡ한민족독도사관연구소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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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2 08:23
■소위 다케시마의 날과 독도칙령기념일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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