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26 07:05

민족 학교 설립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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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학교 설립에

교회 앞 일반 기숙사에 거주 하는 제이슨이 주일날 안보이더니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한다. 목사님 이하 우리들은 우리가 무심 하였구나 반성을 하고 서로 미안하여 다투어 병원에 문안을 갔다.
교통사고가 나서 혼수상태라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한다. 그동안 혼자서 죽음과 사투를 했다 하니 이시대가 왜 이렇게 단절로만 달려가는가 싶다. 바로 교회 앞에 거주하는데, 그리고 그 기숙사 안에는 전도사, 집사,12명이 방을 나란히 하고, 수시로 얼굴을 맞대며, 한집식구가 되어 살고 있다. 그러함에도 바로 옆방에 살던 제이슨이 그렇게 사투를 벌리고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교회적으로 수치이고, 슬픔이고 민족 적으로 슬픔이다. 제이슨이 병원에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을  캘리포니아 사는 부모님이 전화로 알려 와서 우리가 알게 되었다. 다음날 제이슨 부모님이 하와이로 달려 왔다. 부모님은 아들을 수발을 한다고, 짐 보따리를 큰 것을 들고 아들이 사는 기숙사에 들어 왔다.
  제이슨 아버지, 어머니는 하와이 살다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간 분이라 하와이를 잘 알고 있다. 제이슨도 이곳에서 자라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제이슨 한인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혼혈아인가 했다. 목소리도 굵고 얼굴도 거무스름하고 한국말은 잘 못하여, 처음엔 한국아이가 아닌 줄 알고 ,한국말로 저애는 튀기인가 얼굴은 왜 저렇게 검어 ,밥맛없어 하였다고 한다. 제이슨 그 말을 알아듣고 화를 냈다고 한다.   부모가 말하는, 아들제이슨은 문화의 벽을 넘지 못하여,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하와이를 뜨고 제이슨은 남았다고 한다.
  문화의 벽, 언어의 벽, 누가 메워 줄 것인가. 내 아이들도 문화의 벽이나, 언어의 벽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님 따라 이민 와서 이 땅에 뿌리 내리느라고 힘겹게 접목되어 가며, 고등학교 올라가고, 대학을 다닐 때에는 자기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된다. 부모님들도 그때쯤 되면 숨 돌릴 여유가 되어 돌아보면 아이들은 제 뜻대로 훌쩍 자라있다. 아이들이 미국에 동화 될 수 없고, 그렇다고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아닌, 이질감, 그걸 무엇으로 메워 나가는가, 고민을 하게 된다.
   동료 전도사가 하는 말이 5년 만에 아들이 하와이 방문하여 하는 말이, 나는 누구냐 하고 정체성을 말하더라 한다. 왜 일찍 한글을 안 가르쳤느냐, 물어오더라는 것이다. 그때는 살기에 급급하여 탁아소에 맡기고 일하느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미안하다 말했다고 한다.
  우리 목사님이 민족 학교 설립 계획을 내어 놓고 기도를 시작을 하였을 때 조금 떫었다. 2년 전에 마약 환자 치료 센터 “사랑의 집”설립 계획을 내어 놓고 내어 놓고 기도 할 때는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와이는 마약과 전쟁하는 곳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자녀나, 자기가 마약에 손대고 고생한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한국 교회를 돌아보면 그런 가정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교포들의 적극 후원 하에 사랑의 집을 구입하여 지금은 그 마약 환자 치료 센터는 잘 운영 하고 있다.
   목사님이 민족학교 설립을 발표 할 적에, 이 계획안은  우리 민족에 국한 되어 있어서 호응이 적을 것이라는 것 이라고 생각 하였다.그러나 의외로 호응 하는 분이 많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를 알리자는 한인들의 뜨거운 가슴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이번에 제이슨 보며, 내 생각이 달라졌다. 제이슨 한국말을 잘하였으면 우리는 제이슨과 거리가 멀지 않았을 것이고,  제이슨 역시 교회와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는 제이슨을 이웃 나라 청년 정도로 생각하고 관심이 없었다. 교회 오면 왔네 하고, 안 오면 그럴 사정이 있었겠지 하였던 것이다. 무관심 속에서 며칠 기숙사에 안 들어 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을 안 했던 것이다.
  나의 큰 아들이 목사가 되어 강대상에서 설교를 한국말로 할 때는 억지 춘향이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큰아들 목사는 어른들과는 말을 잘 안 하려고 한다. 혹시 실수라고 하면 어쩌나 싶다고 한다. 어른들이 말을 걸어올까, 슬슬 피해 간다. 큰 아들이 하와이서 목회 할 적에 저 목사 건방져, 인사도 안 받아,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저린 가슴으로 그럴 때마다 우리 아들이 어려서 이민 와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해서라고 설명을 할 때도 있지만, 내가 가르치지 못하여 그래요 내 탓이에요 하지만, 이만자의 서러움을 우리는 다 격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민족을 모르고, 뿌리를 모르고, 자라서 나는 누구인가 할 때 무어라고 대답을 할 것인가, 다시 조명이 되어 왔다.
   내 아이들 넷 중에 큰놈만 겨우 (13살 이민) 한글을 읽지만, 밑에 아이들은 내가 낸 시집이나 수필집을 읽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이민 와서 전문직을 가지고 있으니, 생활에 어려움이 모르니 그런 질문은 던지지 않지만, 그것도 슬픔 이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못 가르쳤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들의 후세들은 조국을 모르고 자랄 것이다.
   내가 우겨서 손녀를 한글학교를 보내고 있다. 그랬더니 “할머니 사랑해요” 하고 한글로 편지를 썼다. 이제라도 늦지 않는다. 뿌리를 알려 주자 다급 하여 온다.
   오늘도 민족 학교 설립을 기금 마련위해, 연일 하루에 만두를 만개씩 만들고 있다. 박 집사님 부부는 코피 나겠네, 하면서 진작 이렇게 내 아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 줄 걸 한다. 온 교인과 목사님도 하루 종일 만두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면 되고, 그럴 때 도움의 손길이 올 것이다, 말씀하시는 목사님이시다.
하와이는 미국에 첫 이민지이다. 이승만 박사, 박용만 장군, 안창호 선생님 이어  하와이 땅에 민족 학교를 세워 동포가, 민족이 하나 되면, 우리 한민족의 자리가 넓어 질것이고, 우리의 목소리도 높여 질것이다. 민족 학교 설립은 한민족의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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