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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5월 13일 어제와 14일 오늘, 1박 2일로 양평에서 있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MT에 갔다왔습니다. 그래서 구상 선생님 2주기 추모제에 갔다올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죄스런 마음에 제가 예전에 썼던 2편의 산문을 미주한국문인협회 카페에 올릴까 합니다. 앞의 것은 구상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썼던 것이고 뒤의 것은 돌아가시기 직후에 썼던 것입니다.

  1. 관수제를 울렸던 그 울음소리
      
  구상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이 친구를 데려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고 할까요. 아마도 제가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는 이 글이 활자화될 무렵이면 선생님께서는 천국의 시인이 되어 지상 세계에서의 추억을 노래하고 계시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쾌유를 빈다느니 하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외람되게도 저는 선생님이 큰 고통 없이 병자성사를 치르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따님 자명 선생님과 사위 되시는 분을 뵙고 장례 절차를 상의하면서 이제는 정말 돌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은 아마도 1993년이나 94년쯤일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지요. <국민일보>에서 사제간의 만남을 특집 기사로 매주 한 번씩 게재할 때였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우리 사회가 워낙 살벌해지다 보니 사제간의 아름다운 관계조차도 무너지고 있다고 여겨 그런 특집을 마련했던가 봅니다.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한 지면에다 저는 선생님을 어떻게 만났으며, 어떤 것을 배웠고, 어떤 감화를 받았으며, 어떤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국민일보사에서는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던 것인데 수많은 제자 중 저를 지목해 사제지간의 정을 엮어나가는 기사를 쓰게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정말 저를 믿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쌍용그룹 홍보실 소속의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신문기사를 보고 홍보실장님이 우리 회사 직원이 신문에 이렇게 크게 나와서 아주 뿌듯했다고 덕담을 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토요일 오후에 저는 문화부 임순만 기자와 사진기자와 함께 선생님의 서재인 여의도 관수제(觀水霽)를 찾아갔습니다. 파안대소로 웃으시던 그 모습, 그 음성,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아아, 이제 천수를 다 누리시고 하느님의 부름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까.

  저는 선생님이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오시면서 세상을 향해 원망하지 않고 결 고운 시로 승화시키신 것을 초인적인 의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시를 쓰신 적이 있지요.


  어머니
  神父 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에다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한가위] 제2연


  선생님은 1946년 12월, 고향 원산에서 문우들과 어울려 '응향'(凝香)이란 이름의 동인지를 냅니다. 지방에서 나온 동인지에 불과했지만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자본주의의 퇴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여겨 '시집 {凝香}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하고 조사위원단을 평양에서 원산으로 급파하죠. 이미 공산화된 북한 사회에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뜻이 담긴 글은 타기의 대상이었습니다. 모더니즘 문학이나 순수문학도 마찬가지였고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란 데서는 공산주의라는 이념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문학 이외의 문학에 대해서는 발을 못 붙이게 완전히 파문을 시킬 작정으로 원산에서 나온 이 동인지를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귀띔해준 사람이 있어 선생님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게 되지요.

  선생님의 월남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남북 분단이나 동족 상잔의 전쟁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북한 당국의 조치가 좀 완화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셨을 테고, 북한에 계신 어머니를 남쪽으로 모셔올 생각도 했겠지요. 그러나 38선이 놓이고, 북한 문단에서 낙인이 찍힌 선생님은 고향 땅을 다시는 못 밟게 됩니다. 신부님이었던 형님이 납치, 처형된 이후 어머님은 대녀의 집에 의탁하다 돌아가셨는데 무덤이나 만들어 드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가위를 맞아 백만 시민이 성묘 길에 나섰다는 언론 보도를 보며 선생님은 비탄에 잠깁니다. 산소조차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 세월의 회한이 어느 정도였으면 시의 마지막 연 두 행을 "어머니/어머니"라고 썼을까요.

  선생님의 시련은 폐결핵이라는 병마가 덮침으로써 이어집니다. 1966년 일본으로 건너가 큰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선생님은 소생하시지만 폐를 한쪽 절단하게 되지요. 폐활량이 보통사람의 반의 반도 안 되어 언덕길이나 계단을 오를 때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며, 조금 오르다 쉬고 조금 오르다 쉬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몸을 빠져나간 결핵균은 작은아드님 '성'의 몸을 덮쳐 식구 중 가장 먼저 앞세우게 되지요. 작은 병원을 하며 선생님의 수발을 들던 사모님은 1993년 11월 5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경기도 안성의 성당 묘지에 시신을 안치하고 선생님은 많이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도 곧잘 하고 몸도 튼튼하여 한양공대를 나와 베트남전에도 갔다오신 큰아드님 '홍'도 이름 모를 병을 앓다 아버지에게 참척(慘慽)의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앞세운 선생님은 교통사고를 당해 또 한 차례 생사의 고비에 서십니다. 그때 선생님을 일으켜 세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시(詩)가 아니었겠습니까.


  흰 홑이불에 덮여
  앰뷸런스에 실려 간다.
  
  밤하늘이 거꾸로 발 밑에 드리우며
  죽음의 아슬한 수렁을 짓는다.

  이 채로 굳어 뻗어진 내 송장과
  사그라져 앙상한 내 해골이 떠오른다.
                                     ―[임종 예습] 1∼3연


  선생님은 임종 예습을 참 많이도 해오셨습니다. 84년 생을 살아오시면서(선생님은 1919년 생이시다) 입원을 하신 회수만도 수십 번은 되실 겁니다. 이제는 임종 실습을 하고 계신 건가요,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가시면서. 면회 사절. 저는 선생님의 임종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날 관수제에서 해주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 평생 가슴에 새길 금언을 말씀해주셨지요.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겉으로 번드르르하게 외면치레를 할 게 아니라 감동을 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시인들조차 말의 치장만을 노리고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선생님이 쌓아올린 높은 시 세계의 언저리에라도 언젠가는 이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시는 아직도, 여전히, 말의 치장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 늘 가슴에 새기고서 한 명 참된 시인으로 남은 생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의 아픔과 마음의 고통을 시를 씀으로써 이겨내신 선생님을 본받아서 말입니다. [임종 예습]의 마지막 3연을 비통한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아버지, 저의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늉만 했지 옳게 섬기지는 못한
  그분의 최후 말씀을 부지중 외우면서
  나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난다.

  또 숨이 차온다.
                                     ―[임종 예습] 6∼8연


  선생님, 부디 편안한 밤 맞이하시기를!


  2. 시인과 인간이 일치된 큰 어른


  구상 선생님!


  선생님을 경기도 안성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하고 와서 이 글을 씁니다. 지난 사흘이 꿈만 같습니다. 어제와 그제, 강남성모병원에는 정말 줄기차게 많은 사람이 조문을 왔습니다. 천주교 사제와 수녀·수사는 물론 웬 스님은 또 그렇게들 오시는지. 참 많은 장애인이 왔고, 문인·정치인·언론인·기업인·외국인·지방의 관리……. 아무튼 몰골이 꾀죄죄한 시장사람 같은 분에서부터 정부 최고위직 인사까지 우리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이 와서 조문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인간 구상'의 엄청나게 큰 스케일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참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이었고, 그것은 '시인 구상'과 '인간 구상'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인으로서의 명성은 대단한데 인간 됨됨이가 퍽 실망스러운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보들레르나 베를렌느의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일화를 많이 남긴 국내 몇몇 시인을 저는 그분들의 살아생전에 직접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시인들의 시는 좋아합니다만.

  그토록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데는 선생님의 대인관계가 원만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고, 사랑으로 대하고,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고, 넓은 아량으로 포용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속인의 빈소인데 신부님과 스님이 그렇게 많이 찾아온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요.

  제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조교를 할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학교를 중퇴한 어느 선배는 비승비속으로 살아가면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 후배 저 후배 찾아다니며 기식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얼굴에 상처가 난 상태로 학과 사무실로 찾아와 구상 선생님께 용돈을 달라며 떼를 썼습니다. 제자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셈이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따끔하게 꾸짖은 뒤에 돈을 좀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선생님이 참된 스승의 모습으로 각인된 최초의 일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면 선생님은 언제나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제 누이동생과 허리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 아내의 건강을 오히려 더욱 걱정하셨습니다. 타인에게는 늘 너그럽고 인자하셨지만 자신에게는 더없이 엄격하셨기에 40여 권의 저서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욱한 제자가 소소한 고민에 휩싸여 선생님이 머무셨던 하와이나 일본으로 고해성사를 하듯 주절주절 편지를 써 올리면 선생님은 반드시, 떨리는 필체로 답장을 해주셨습니다.


  자네의 병약도 파란도 그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고 정녕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함께 지는 용기와 인내와 사랑으로 나아가세. 그때 비로소 신령한 변화를 그 모두에게서 맛볼 것이네.  
  

  선생님은 이렇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선생님의 생애를 더듬어봅니다. 선생님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간 받으신 상훈은 금성화랑무공훈장(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서 받은 훈장. 민간인 최초라 함),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이었고 영면하신 이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광의 뒤안길에서 선생님이 겪어내신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고뇌를 저는 아주 조금 알고 있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 유학 가 있다가 학살당한 형, 신부가 되신 또 다른 형은 공산당에게 납치를 당했으니 순교하셨겠지요. 어머니의 죽음은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관은 썼는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선생님은 시 [한가위]에 쓰셨습니다. 이산가족의 일원이 되신 경위를 더듬자면 선생님의 시 몇 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일본 니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시작에 전념해 원산 거주 시인들의 사화집 {凝香}에 [길] [여명도] [밤] 등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 발표가 선생님의 운명을 바꿔놓게 됩니다. 평양의 북조선문학예술동맹에서 바로 그 작품에 반인민적 반동시라고 낙인을 찍어 조사단을 원산으로 급파하게 됩니다. 구상 선생님께 그 사실을 귀띔해준 사람이 있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 남한으로 오시게 된 선생님은 어머님과 형님의 안부를 자나깨나 걱정하는 이산가족의 일원이 되십니다.

  폐결핵에 걸려 마산요양원 생활도 하신 선생님은 1966년에 일본 오리모또 병원의 오리모또 원장 집도로 한쪽 폐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십니다. 그런데 두 아드님 중 작은아드님이 아버지 젊은 날의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큰아드님 역시 병명이 확실치 않은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두 아드님은 선생님의 마음을 그다지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 듯합니다. 선생님의 서간집 {딸 紫明에게 보낸 글발}을 보면 두 아드님에 대한 걱정이 차고 넘치거든요. 10년 먼저 돌아가신 사모님을 안성 공원묘지에 안장할 때, 날씨가 몹시 궂었습니다. 장례 절차를 빨리 끝내자고 서두르시는 선생님의 마음, 왜 제가 몰랐겠습니다.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배려가 선생님의 아내 사랑보다 앞선 것이었지요. 아, 선생님의 가족사를 제가 너무 시시콜콜 얘기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한국 문단의 큰 별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상한 선생님이었고, 대자들에게는 인자한 대부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늘 제자와 대자들, 그리고 당신이 문단에 내보낸 시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잘 되기를 늘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주변 사람들, 특히 장애자들과 사형수와 무기수 등 형을 살고 있는 죄수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겨우겨우 꾸려가던 {솟대문학}에 2억을 쾌척하신 것은 겉으로 드러난 예이지, 정말 선생님은 세인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을 내시는 바람에 두 번째 필화를 입고 8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시면서 선생님은 현실문제에 참여할 것인가, 문학의 길로 걸어갈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셨는데, 그때 평생 문학의 길로만 걸어가기로 굳게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입각 제의를 받고도 일본으로 피신, 경향신문 동경지국장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의 얘기는 제가 선생님을 만나 대담한 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지요({라쁠륨} 1999년 가을호).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 허모씨로부터도 입각을 권유받았지만 수염을 기르면서까지 거부한 것은 선생님의 올곧은 정신과 시를 위한 순교자적 자세를 잘 말해주는 일화입니다. 대학교 총장 제의도 숱하게 받았지만 그 어떤 감투도 마다하고 선생님은 시인의 길로만 걸어가셨습니다.

  그렇지요, 선생님은 1946년 이래 시인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국내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영역시집 4권에 불역시집, 독역시집, 스웨덴어 번역시집, 스페인어 번역시집, 일역시집 등 10권이 넘습니다. 선생님 시의 기독교적인 정진의 깊이와 구도를 향한 동양적인 발상이 외국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 시에 나타난 구도적인 사색에 의한 그 정신의 깊이와 초월의 무게는 앞으로 후학들이 두고두고 연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공적인 직함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문예진흥원 이사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성천아카데미 명예회장, 제2차 아시아시인대회 서울대회장, 세계시인대회 명예대회장 등 그야말로 명예직이었지 실제적으로 어느 단체의 리드로서의 역할은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한겨레신문 최재봉 문학전문기자의 말대로 선생님은 "문단의 큰 어른이면서도 이렇다 할 감투를 쓰지 않음으로써 문학적 순결과 위엄을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왜 굳이 시인의 길만을 걸어가시려 했는지, 그 뜻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겠습니다.

  저는 중앙대학에서 선생님께 시를 배웠고, 사람됨의 뜻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크신 사랑을 배웠습니다. 관수제를 쩌렁쩌렁 울리던 그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제 가슴속에서 선생님의 웃음소리와 미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구상 선생님! 오래오래 선생님을 잊지 않고 선생님이 이 땅에 와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고 저 역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애쓰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계신 곳은 육신의 고통과 정신의 고뇌가 없어 평안하십니까? 지금도 시상을 떠올리고, 떨리는 손으로 시를 쓰고 계시겠지요.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4년 5월 14일 밤
             제자 이승하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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