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바다 속을 유영하는 詩魚들
ㅡ <문학세계> 17 호에 발표된 시세계 ㅡ
박 영 호
강물은 산과 산을 휘돌아서 대지를 가르고 바다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강물들은 서로가 만나서 서로의 몸을 섞고 함께 흘러 간다. 이러한 강물의 이치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결국 이와 같아서 우주라고 하는 큰 바다와 같은 세상의 공간 속에서 강물처럼 흐르며 살고 있고, 이러한 우주의 강물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또 다른 강물과 조우하며 먼 바다로 흘러 간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에 이르면 영혼의 강물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강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흐르는 것은 모두 강이고, 그 강이 바다가 되지만 그 바다는 다시 강물이 되듯이, 우리도 그 강물과 바다 사이를 오고 가며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따라 그 어디론가 떠 흘러 간다.
이러한 강과 바다 속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유영하며 살고 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속에는 많은 시인들이 풀어놓은 수 많은 시어(詩魚)들도 우리 곁을 함께 휘돌고 있다.
이러한 시어들은 바다로 나가 대양을 가르며 긴 항해를 하기도 하고, 더러는 평화로운 열대 바다 속의 안온함에 머물며 노래도 부르고, 더러는 살얼음 낀 북극 바다 밑을 지나며 고통스러운 항해도 하고, 끝내는 바다 물과 강물이 만나는 아늑한 자궁의 만(灣)같은 곳에서 몸을 섞어 새 생명인 수 많은 시어(詩魚)들을 쏟아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어(詩魚)들은 우리 인간 삶의 강물 속을 휘돌며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는 항해와 회귀, 그리고 삶의 애환이나 기쁨을 노래하고, 새 생명과 생의 환희나 삶의 지혜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시어들이 풀어 놓은 지상의 시어(詩語)들을 통해서, 그들이 지닌 삶의 참된 가치나 의미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맨 처음 살펴보는 시어(詩魚)는 희망과 귀향 그리고 과거와 미래와 출항과 회항이란 의미를 통해서 화해와 화합의 조화된 세계를 밝히고 있는, 인생의 한 기항지와도 같은 희망봉이라는 바닷가에서 부화된 김동찬의 ' 희망봉에서 희망은' 이란 시어(詩魚)다.
이제 시인은 삶이라고 하는 길고 긴 항해 끝에 나이 사십 중반을 넘어선 과거와 미래라는 두 시간의 강물이 만나는 희망봉이라는 바다 끝에 서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며 희망이란 늘 앞쪽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추억이나 향수처럼 떠나온 곳에도 있을 수 있어서, 출항이란 희망은 바로 귀향을 위한 희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바다에 몸을 섞고 욕망이라는 짐을 벗고 가볍게 돌아서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략)
이제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땅끝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희망 봉인가
(중략)
그럼으로 희망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빙 둘러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 것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
남극으로 흘러가는 그 커다란 물줄기가 느껴지고
내 가벼운 몸뚱이로 또 바다가 되어 몸을 섞으려니
희망은 아무래도 곡선이다
바람에 팔랑 날아가는 모자를
그냥 웃으며 저 시퍼런 바다에 날려보내는 것
빈 몸으로 돌아서더라도 웃음의 빈 자리
아연 햇살이 가득하다 <김동찬 '희망봉에서 희망은 ' 일부>
그가 다다른 희망봉은 바다라고 하는 지구의 둥근 강가에 있는 하나의 기항지(崎港地)라고 할 수 있다. 더는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그래서 돌아서서 가야 한다는 회항의 결심이 굳어지는 반환점 같은 곳이다. 그는 이제 희망봉(希望峰)이라는 산정에서 새삼스럽게 자신의 생을 돌이켜 보고, 이제 오르는 것을 멈추고 돌아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선으로 꺾이는 중단이나 좌절의 곡선이 아닌 강물처럼 둥글게 굽어지는 곡선이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과거와 현재가 접하는 불혹도 훨씬 넘어선 나이에 그는 이제 인생의 기항지나 다름 없는 케이프 타운 바닷가에서 더는 갈 곳이 없는 아득함을 느끼고 새삼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산봉우리 같은 희망봉이라는 바닷가, 이곳은 시작도 끝도 아닌 출항과 귀향이 함께 이룩되는 곳,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만나는 산정,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함께 껴안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강과 강이 섞이듯 휘도는 대서양과 인도양 물이 함께 보인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긴 강물과 같은 바다를 유영하던 시어(詩魚)가 과거와 미래라는 두 물줄기로 몸을 섞고 수정란이 되어 희망봉이라 둥근 자궁벽에 착상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새로운 시어(詩語)들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새롭게 깨닫고 있는 화합과 조화라는 것이다. 그 조화의 의미는 바로 빙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러한 자신의 영혼과 몸뚱이를 바다에 몸을 섞는 것으로 결국 그것은 행복이고 곡선이라는 것이고, 그 곡선은 원으로 이어져 둥글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다에 둥글게 몸을 섞고 난 그는 이제 다시없이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앞으로 직선으로 달려오던 그 욕망이라는 짐을 내려놓듯이 바람에 날려가는 모자에 조소를 보내며, 비워있는 빈 가슴으로 돌아서는 그는 새로운 생의 가치와 자연의 축복을 새삼 깨닫고 '아연 햇살이 가득하다' 라고 생의 환희를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결국 바다는 생명을 상장하는 생명의 근원이고, 이는 신의 천지 창조에서도 그렇고, 고대 신화나 노자의 물의 논리에서도 그렇고 과학적인 물리적 이치로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물이 근원인 강과 바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몸을 섞어, 흐르는 강물과 둥근 곡선인 원의 이치를 통해 화해와 조화와 그리고 평화와 안식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처럼 둥글게 휘도는 바다와 강물처럼 둥글게 휘돌아가는 곡선을 통해서 포용과 융합에 이르는 삶의 모습을 극히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또 다른 시가 있다. 김내수의 '원을 그리다' 가 바로 그렇다.
인생이란!!
원을 그리는 것
해가 원을 그리며 어디론가 가듯이
나도 돌고 돌며 간다
<중략>
무한한 것, 원을 그리며 무한한 것
갔다 했더니 반드시 오고
왔다 했더니 언듯 허무히 가버린 것
<중략>
가고, 가고 또 가다가 돌아 오는 것이야
해가 그러하듯
달과 별이 그러하듯이
<김내수 '원을 그리다' 일부>
위의 시 역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곡선과 그리고 가고 온다는 둥근 윤회의 이치를 통해 인생은 원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원이라는 것은 돈다는 유동의 의미가 있어야 그 개념이 확실해 진다. 따라서 원을 그린다는 것은 곡선을 의미하고 곡선의 흐름은 늘 살아있는 율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움직이는 원은 부딪침이 없는 조화와 화해를 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삶이나 생의 가치를 보다 상징적인 율동의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인생이란 '슬픈 것이다.' 아니면 '행복하다 '는 등의 단정적이고 단편적인 표현은 직선의 의미일 수 있고 곡선과 같은 율동의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인생이란 즐거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고, 행복 할 수도 슬플 수도 있다는 희로애락의 여러 물줄기가 함께 휘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시인은 자연의 물리적 근원인 태양이나 별 달 의 움직임을 통해 밝히고 있고, 인생 역시 시작도 끝도 없는 곡선상에서 돌고 돌면서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도 결코 끝이 아닌 무언가의 회전의 도정에 있다 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영원이라는 원 속의 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불교적 윤회사상이나 기독교의 부활과 구원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왔다 했더니 그것 온 것이 아닌 허무히 가버린 것 ' 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되돌아 와버린 것일 수도 있는 인생무상을 표현하는 것이고,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가고, 가고 또 가다가 돌아 오는 것이야 '라는 표현은 김동찬의 '희망봉에서 희망은' 에서의 '그럼으로 희망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 빙 둘러 돌아가기로 마음 먹는 것이다.' 란 표현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처럼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이 함께라고 하는 두 사람 모두 다 곡선과 원과 흐름이라는 율동과 조화가 핵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결국 두 시어가 함께 같은 강물을 따라 강과 바다를 휘둘러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이란 그저 가면 그 길은 이내 돌아오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고, 이는 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다 보면 이렇게 좋은 날도 있을까 하는 날도 올 수 있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고, 더러는 불행한 것으로만 알았던 과거의 삶이 행복했었던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강물의 세계를 우리들의 보다 근원적인 삶이나 생명의 원천의식으로 생각하는 시어의 세계가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탯줄과도 같은 끈으로 이어진 모성의 강물 속에 살고 있음을 표현한 김 행자의 '강가에서' 란 시어(詩魚)를 살펴보자.
나를 살게 하는 건
말없이 바라볼
저 강물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내려놓고 찾아가
엄마 ㅡ
하고 부르면
흰 머리소건 풀어 흔들며
목화밭을 달려 나오는
어머니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김 행자 '강가에서' 전문>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살아 올 수 있는 것은 저 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물인데, 그 강물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를 늘 사랑으로 다독거려주고 지켜주는 모천으로서의 강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휘돌고 살아가는 강물의 여로에서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는 떠나온 고향과 모천을 생각하고 마음에 위안을 받는다. 이처럼 모성은 우리의 정신 세계의 가장 근원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우리의 모성과 이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렇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이 모천의 힘이라는 것이다.
'나를 내려 놓고 찾아가 '에서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외형적인 나를 말한다. 이는 현실적인 삶의 고통일 수도 있고, 현실적인 욕망일 수도 있는 것으로, 이를 내려놓고 나면 내면의 근원적인 나만 남는데. 이것이 바로 모천과 모성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있는 곳 그래서 '달려 나오는 목화밭'은 언제나 우리에게 포근한 안식과 위안을 느끼게 하는 바로 모성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고, 이러한 모성이 그 강물 속에 흐르고 있기에 우리는 괴롭거나 외로울 때도 지치지 않고, 바로 향수나 귀향의 꿈을 꿈꾸고 다시 우리의 마음을 둥글게 돌아가게 하는 귀항의 닻을 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귀향의 항구인 모천이 없는 항해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외롭고 슬픈 유랑의 항해인가를ㅡ
흰 목화와 흰 수건과 달려 나오는 흰 모습의 어머니, 이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우리 영혼의 강물이며 이러한 강물이 있기에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가다가도 다시 돌아서는 안식과 평화와 귀향과 회귀를 꿈꿀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사물이나 생명의 존재 근원을 바다와 강물이라고 하는 자연의 정화(淨化)의 섭리를 통해서 자연의 구실이나 절대성이나 그 가치와 함께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있는 시어다.
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에 품고 돌아와 풀어 놓은
잔해는 허영의 바다에 이는 물결 되어
차오르다가 기울며 큰 품으로 돌아 가 안기고
(중략)
어쩌다 나무 한 그루 거기
그렇게 서 있게 되었는가
< 김신웅 "빈 터에 서서 "일부 >
사물이나 우리 생의 존재 사유나 그 가치를 빈터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서 강물과 바다라고 하는 그 큰 흐름의 순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 그루 나무가 그곳에 서 있게 된 것은 어쩌다가 그렇게 서 있게 된 것이 아니고, 회색 겨울 하늘이나 가지 위에 앉아있던 새의 날개에 얹힌 고통이나, 햇빛이나 바람 같은 좋고 나쁜 모든 세파가 함께 들끓는 허영의 바다에서 차오르다가 기울며 큰 품으로 돌아 가 안기는 흐름으로 인해 결국 나무 한 그루가 그곳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역사(役使)를 하나의 바다의 몸짓인 '큰 품으로 안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리고 나무가 그렇게 그 곳에 서 있게 된 것도 모두가 바다가 차오르고 기우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이는 너무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같지만, 이는 극히 사실적이고 물리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나무를 비롯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바로 자연과 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고, 회색 겨울 하늘이나 햇빛 그리고 바람도 기실은 모두가 물과 바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가 나무 한 그루가 거기/그렇게 서 있게 되었는가'
라는 끝 구절에서 표현된 그 나무는 바다에 이는 물결로 차오르다 기울며 큰 품으로 돌아가 안긴 바다라고 하는 자연이 이룩한 것이고, 우리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렇게 자연이라는 큰 품 속에 이렇게 살고 있고, 그 자연이라는 큰 품은 바로 세파의 포효를 모두 끓어 안고 있는 바다라고 하는 큰 강물이라는 것이다.
다음 역시 위의 시어와 똑 같이 나무와 강물을 통해서 자연과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강물을 표현한 시다.
(전략)
우리는 이렇게 서서 숲을 이루고
마주 보며
팔을 벌려 껴안고
사랑에 빠진다.
너와 나의
깊은 가슴속에는
연륜마다 아롱져
출렁이는
사랑의 그윽한 물결. (정용진 '나무'의 일부)
우리와 나무는 서로 마주 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강물을 주고 받고 살고, 나무가 사랑의 강물로 함께 숲을 이루듯 우리도 사랑의 강물로 세상을 이루고 산다.
이처럼 나무의 강물은 바로 숲이고 우리의 숲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에는 크고 작은 많은 사연의 강이 있다. 그러한 강물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그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큰 강으로 연연하게 흐르는 강물이 바로 사랑의 강물일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강물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강물이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가치 있는 생명을 위한 사랑으로서의 강물일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강물은 '연륜마다 아롱져 출렁이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영원으로 까지도 이어갈 수도 있다는 영원성까지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랑의 강물은 영혼의 강물이라고 할 수 있고, 모두를 함께 껴안는 자연 친화나 인류애 까지도 포함하는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사랑의 절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직접적인 육체의 율동을 통해서 극히 유희적이고 낭만적인 강물을 표현한 배정웅의 '탱고'란
작품을 보자.
이는 강과 바다에서 뛰노는 시어들의 모습을 실제 인간의 몸짓과 음악과 언어 등 모든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종의 원시종합 예술인 발라드 댄스<Balad dance)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보다 근원적인 율동은 바로 강이나 바다의 굽이치며 휘도는 흐름이고, 이를 따라 사는 우리들의 가장 근원적인 율동은 바로 우리 인간의 육체를 직접 움직이는 율동이다.
레꼴레따 언덕에서 반도 네온이 한차례 울었다
그럴 때마다 잘생긴 남녀가 뱀처럼 서로 얽혔다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현이 따라 울었다
그럴 때마다 잘 생긴 남녀가 다시 얽혔다
(중략)
어느 강과 강의 물굽이처럼 서로 얽혀서는
안고 돌리고 눕히고 일으키고
간고 펴고 풀고 미끄러지고
일어나서 또 돌고 흐르고 <배정웅 '탱고' -아르헨티나에서-' 일부>
우리 육체의 율동 중에서 리듬이 있는 예술적 율동은 바로 춤이고, 그 춤 중에서도 우리의 삶이나 살아있는 생의 모습을 가장 원색적이고 낭만적이고 열정적으로 나타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탱고(Tango)라고 하는 춤이다.
먼 곳에서 반도 내온 가락이 한 차례 은은하게 울려오자, 바다와도 같은 무대 위에서 강물이 물굽이 치듯 남녀가 뱀처럼 얽혀서 인생이라고 하는 애상과 낭만과 열정과 사랑을 춤추고 있다. 이는 일종의 강과 강이 함께 엉켜 휘도는 물살처럼 남녀가 관능적으로 얽혀 희로애락이란 인생의 강물 속에서 육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강물 속의 인어(人魚)들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탱고란 원래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이민을 온 알젠치나 서민들이 그들의 이민생활의 애환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 추기 시작한 춤이다. 따라서 초기의 전설적인 탱고의 가수 칼로스 카르델(Calos Gardel)의 탱고 가락 속에서 우리는 서민들의 서글픈 모습과 함께 이민자들의 힘든 삶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탱고의 가락과 춤은 우선 그늘진 비탄과 고통을 바탕으로 하는 구성진 가락이 깔려 있지만, 그 가락 속에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과 꿈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경쾌함이 있고, 이것이 다시없이 밝은 느낌으로도 표현되는 것이 바로 탱고의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밝은 미소를 짖게 하는 그런 비탄과 낭만이 함께 녹아 있어서 그 누구 할 것 없는 모든 부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유명한 탱고의 시인인 힐다 겔다 (Hilda Guerra)가 "탱고는 그저 춤이 아니다. 시와 음악과 춤과 그리고 삶의 철학이 녹아 있다"라고 말했듯이 탱고는 일반적인 즐거움에서 추는 춤과는 사뭇 다른 인생의 모든 가치와 모든 이름다움을 함께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탱고 춤에 열광하고 있는 남미인들은 탱고의 경지를 '안개 위의 뜬 구름(Come mube de niebla)처럼 형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 이라는 환상적인 표현들을 한다. 이는 결국 탱고란 영혼과 영원의 경지를 넘나드는 구름이나 강물 위 안개 같은 세계라는 뜻일 것이다. 인생이 허무해서 그리고 서글퍼서 춤을 추게 되지만 한데 엉겨 한참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 보면, 고통도 슬픔도 모두 안개 속의 뜬 구름처럼 멀어져 가고 가벼워 진 가슴 속에 다시 새로운 꿈이 젖어 드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탱고의 가치는 서글픈 슬픔과 고통까지도 끌어안고 다시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그런 생동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마취 곡과도 같은 경쾌한 리듬이 애상도 고통도 모두 녹아나게 하는 화해의 한강물로 이는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인생 강물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 네온과 바이올린이 울었다고 하는 시간과 공간을 알리는 청각적 여운과 뱀처럼 얽힌 남녀의 관능적 모습을 울었다/얽혔다/울었다 /얽혔다.' 라고 표현하는 시어(詩語)들의 율동과, '강과 강의 물굽이가 얽혀서는/일으키고/미끄러지고/ 흐르고 '라는 시어(詩魚)들의 율동이 하나의 동영상(動映像)처럼 우리에게 감동의 물결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다음은 자연을 상징하는 바다와 육지가 빚어 농은 흰 백사장의 모래톱을 통해서 숭엄한 자연의 역사(役使)와 우리 인간의 삶과 시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다.
흰 이빨을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파도와
한 발작도 물러설 수 없는 육지의
한 일억 만 년쯤 대치에
파도와 육지의 찢어진 육체의 흔적이 모여
이렇게 질펀하게 흰 모래가 되었거니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모진 바람과
등을 떠밀려도 갈 곳 없는 파도의
한량 없는 시련이 퍼렇게 남빛 멍으로 남은
그 고통의 밀도가 침전되고 밀려와서
하얀 백사장으로 표백되어 누웠거니 (김호길 '백사장 전문')
육지와 바다라고 하는 대자연이 빚어놓은 자연의 숭엄하고 순결한 모습과 함께, 자연의 무구한 시간의 강물 속에서 인간이 겪은 시련을 통한 역사적 삶의 궤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자연의 끊임없는 역사(役使)로 빚어진 자연의 모습을 흰 모래로 표현하여, 자연의 그 숭엄하고 순결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 알의 흰 모래는 일찍이 하나의 산이 수 억년을 지나는 동안 한 알의 모래로 부서져 내린 것이라 할 수도 있고, 이는 다시 언젠가 다시 바위산으로 굳어지는 자연의 길고 긴 윤회의 강물이 표현된 표현된 셈이다. 아울러 수 억만년의 오랜 세월 속에서 인간이 투쟁하면서 겪은 인류의 쓰라린 삶의 고통과 그 시련의 역사를 남빛 멍울이라는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고, 이 멍울은 다시 오랜 세월을 두고 바다에 침전되어 남은 앙금이 바로 하얗게 표백된 흰 모래톱이다. 따라서 하얗게 표백된 이 모래톱은 모진 바람과 멍울진 파도를 통해서 이룩된 인류의 빛나는 투쟁과 개척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도 있고, 자연이 이룩한 숭엄한 가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거대한 자연 속에 흐르고 있는 시간의 강물을 통해서 남빛 멍이라는 시련과 하얀 모래톱이라는 자연의 순결하고 숭엄한 모습을 통하여 인류의 자연에 대한 개척과 투쟁 역사의 궤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그리고 육지와 바다 와 남빛 멍울과 흰 모래빛이 극히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우리의 눈에 번져 드는 점이 이 시어의 감각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장엄한 지연과 인생, 이를 아우르는 지상에서 가장 큰 바다의 강물을 나타낸 큰 시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홍수라고 하는 강물을 통해서 자연의 위대한 힘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 힘을 잠그는 일종의 힘의 절제나 조화를 통해 파괴와 매몰의 의미가 아닌 또 다른 생명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개혁과 지혜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의 힘인 홍수는 뒤덮고 부수고 쓸어가기도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잠재우고 잠그고 스며드는 것도 역시 물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숨어있는 묵시적(默示的)인 힘인 사막에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게 될 생명의 힘라는 것이다.
말랐던 사막에 비 내려
거센 물살 온 들을 뒤덮고
넘치며 부수고 쓸고 가
길은 길대로 열리는
너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물 밑으로 잠그는 힘, 바람이여
바람이여 황토빛 이미지로
삼켜버리는 물의 힘이여 < 석정희 '홍수' 전문>
우선 홍수라고 하는 강물을 통해 사막이라고 하는 비 생명적인 죽음의 황량한 땅에서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강물의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홍수의 힘은 사막을 뒤덮는 파괴의 힘만이 아닌, 스스로의 힘까지도 스스로 다스리는 자연의 보다 근원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홍수의 힘은 사막을 뒤덮는 그 물리적인 파괴의 힘만이 아닌, 스스로 밑으로 잠기고 삼켜버리는 그래서 노아의 홍수처럼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세계를 불러 일으키는 부활과 재생의 힘을 암시하고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에 새롭게 길을 내고 흐르는, 그래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하는 자연의 생산적 열정이 바로 사막의 강물인 홍수란 것이다. 그럼으로 사막과 같을 수도 있는 우리의 지친 삶이나 고통도 그리고 그릇된 사회의 모습도 홍수라고 하는 큰 개혁의 힘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나 재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혁과 재활의 힘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자연의 파괴적인 물리적 힘까지도 '밑으로 잠그는' '삼켜버리는 힘' 등의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을 통해서 다음에 떠오를 연상(聯想)의 세계를 독자에게 안겨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연상의 세계는 당연히 사막에서 다시 꽃이 피고 다시 만물이 살아나는 새 생명과 부활의 모습일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이 시와 함께 실린 그녀의 또 다른 강물의 시다
널
건너에 두게 하는 강
난
그 강을 건너고 싶다. (석정희 '강'의 전문)
이 시 역시 시인 개인의 강을 이원적으로 구성해서 현실과 피안 그리고 너와 나를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그 사이에 흐르는 강을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너와 나 사이를 흐르는 강은 현실의 강처럼 내가 건널 수가 없다. 그러나 시인이 '그 강을 건너고 싶다' 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강을 건널 수도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소망이라는 마음의 강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강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강을 통해서 피안이라고 하는 이상의 세계에 이르고 싶은 개인적인 꿈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가 남다르게 눈길을 끄는 것은 시가 특별하게 짧고, 시의 구성 역시 3.5조에 의한 음조의 배치가 마치 '양장 시조'의 형식이나 고국 남도에서 유행되고 있는 '두줄 시'와 가까운 단순한 구성으로, 압축과 생략 이라는 시의 근원적인 특색을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이러한 강물 속의 물과는 극히 상극(相剋)이라 할 수 있는 불이라고 하는 부활과 재생과 열정으로서의 생명의 상징성을 통해서 또 다른 강물의 세계를 나타낸 두 시어(詩魚)들이 있다.
먼저 가을이라는 계절적 변화와 가을 잎 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인간의 그릇된 말과 자연 파괴가 끼치는 해악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과 가치에 대한 재생의 열망을 가을 산의 붉은 강물을 표현한 조윤호의 '가을 잎사귀'를 보자.
(전략)
눈이 시리게 파란 잎사귀들은
어느새 노랗게 시들고
여기 저기 구멍이 쏭쏭 뚫려
”왠 일인가?" -하고 생각해 봤더니
봄날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의 파편자국이었다.
(중략)
그럼 내년 봄날
다시 보자는 소리 들리고
내 마음은 갑자기 빨간 잎사귀 같이
활활 탄다. <조윤호 '가을 잎사귀'의 일부>
부드러운 나무의 언어를 통해 삶의 지혜와 함께 불타듯 피어 오르는 새 생명에 대한 열망을 열정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사색적 자연시이며 생태시인 동시에 생명시라고 할 수 있다.
노랗게 시들고 구멍이 뚫린 가을 나뭇잎을 통해서 먼저 인간의 자연 파괴의 해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남에게 끼친 상처나 해악에 대한 자기 반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수확의 결실을 맺는 가을을 맞아 한 해의 삶의 결실에 대한 개인적인 반성일 수도 있지만, 자연에 대한 우리 인류의 엄숙한 반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의 사랑의 정신이 나타난 교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붉은 단풍잎을 통해서 내년 봄이라는 새 생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새 생명과 재생의 삶에 대한 열망을 '활활 탄다'라는 표현으로 생과 삶의 잔상인 낙엽에서 새로운 계절에 대한 열정적 꿈을 붉은 마음의 강물로 표현한 힘있는 생명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물과 불이라는 이원적 (二原的)개념으로 보면 이는 어쩌면 불이 물보다 앞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은 불과 물 둘 사이에서만 생성과 존재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생명이란 개념은 역시 연기의 둥근 강물 속에 모두 함께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소진이나 소멸이라는 의미의 불을 통해서 죽음과 생이라고 하는 두 세계를 대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태숙의 화장(火葬)을 보자.
그대가 이승을 뜨는구나
흔적 없이 사라지는 구나
얼마나 뜨거워져야 한 생애 무심히, 무심히 지우는가
지운다고 지워질 수 있는가
'희망가' 구성지던 낮은 음색
빗 속에 선명하고
슬픈 문신 같은 그대 떠나던 날
세상도 뜨거워 비를 뿌리지만
아득히 타 들어가는 저 흐릿한 산 봉우리들
이승을 떠나는 그대는 고요하고 고요한데
살아있는 육신들
건너 휴계실에서 밥을 먹는다
먹는 일이 그렇게 슬프게 보이더니
까맣게 탄 가슴들
눈 환한 기억의 길 위에서 툭툭 부서져 내리는
흰 눈처럼 순결한 내 아버님 보내는 날 <장태숙 '화장'(火葬)의 일부>
이 작품은 화장이라고 하는 불을 통한 소진과 소멸을 통해서 인생 무상과 죽음이란 허무의 슬픔과 함께 생전의 그 생의 모습을 '아득히 타 들어가는 저 숭엄한 산 봉우리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생에서 죽음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낮은 음색과 내리는 비, 그리고 흐릿한 산봉우리들 -모두가 어둡고 음울하지만, 타 들어가는 불길만이 뜨겁게 달아 오른다는 표현처럼 화장의 불길은 생명이라는 육신을 지우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지운다고 지워질 수 있는가'하고 말한다. 이는 불길 속에 육신이 소진되어가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영원이라는 세계가 열리는 윤회의 강물로 이어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강물은 현실적으로 시인의 가슴 속에 되살아 나는 것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이승을 떠나는 고요한 죽음과 살아 남아 있는 육신들의 생의 모습을 둘째연 서두에서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은 슬픔으로 새까맣게 타 들어 가는데, 사라져버린 부친의 죽음의 모습은 차라리 시인의 기억 속에서 흰 눈처럼 순결한 모습으로 새롭게 살아 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워질 수 없는 윤회의 강물이다. 뜨거운 불길의 강물 속에 육신의 생은 사라지지만, 그 모습은 시인의 가슴 속에 흰 눈처럼 순결한 모습으로 피어 오르고 또 다른 강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의 강물과 죽음의 강물이 이어지는 영혼과 영원의 강물이다.
이는 결국 생과 사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윤회적 표현과 함께 구원과 부활이라는 영생의 세계가 하나의 강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ㅡ 문학세계 17 호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