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73 추천 수 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미리 써본 가상유언장(假想遺言狀)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심화반 안세호


작년에는 가상주례사(假想主禮辭)를 쓴 일이 있었는데 올해에는 가상유언장을 써보기로 한다. 원불교에서는 인간이 육신을 버리고 영혼만이 영계로 떠나는 의식을 천도재라하고, 이를 집전하는 법사를 예감(禮監)이라 이르며, 이 의식에는 유족과 친척·친지들이 다수 참여하여 정성껏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

이때 "열반전후(涅槃前後)에 후생 길을 인도하는 법설(法說)"을 들어보면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은 바가 다 전생에 지은 업보요, 이승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서 받게될 것이라고 하며, 이것은 부처나 조사나 범부중생(凡夫衆生)이나 다 같이 받게될 바 천업이라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한 평생을 회고해 보면 우선 분에 넘친 생애를 누려왔다고 생각되어 마치 농부가 입도선매(立稻先賣)한 기분이 든다. 곧잘 한 일도 없이 지나친 상을 받은 기분이다. 다만 나날이 참회반성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들어 유서를 남기고자 한다.
첫째, 형제간에 우애하여라. 형제란 얼마나 소중한가. 외톨이로 자란 사람들은 든든한 형이 하나 있었으면 하기도 하고, 뒤에서 감싸줄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외로워하기도 하는데, 너희들은 2남 4녀인지라 언니 오빠 누나가 다 있어 마음의 부자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둘째, 너희들은 자녀복도 많다. 1남 3녀를 둔 집이 둘, 1남 1녀를 둔 집이 하나, 2남을 둔 집이 셋. 이러니 얼마나 다복하냐? 거기에다 직업도 다양하여 의사가 넷, 대학교수가 둘, 회사원이 하나, 자영업(土建業)이 하나로 물질적으로도 중류는 되니 얼마나 행복하냐?  
      
셋째, 가능하면 너희들 대에서는 우리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일조하기 바란다. 이 일은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일이자 너희들에게 빚으로 남기고 간다.

넷째, 남의 집의 예를 보면 부모 형제간에 서로 신앙이 달라서 불화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너희들은 다행히 일원가족(一圓家族)이 되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신앙심은 그 깊이에 따라서 법열(法悅)을 느끼고 깨우침(覺)이 각각 다르니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다섯째, 세상을 순리대로 살아가거라. 무엇보다 재물에 몰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많은 재물을 남기지 못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기 바란다. 필요이상의 재물은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임을 명심하거라. 명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한 평생을 평가해 보면 그 잘못된 원인은 탐진치(貪瞋痴)라. 항시 마음을 잘 챙기고, 또 날마다 마음 챙기기에 힘써라. 일체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느냐 (一切唯心造)? 다 자란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시 아버지로서의 노파심(老婆心) 때문이라고 봐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말을 남기려 하오. 내가 당신과 만나서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당신 덕분이오. 만일 당신이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소. 그러고 보니 당신은 우리 가정의 뿌리였구려. 당신이 젊은 나이에 6남매의 장남인 나에게 시집와서 묵묵히 살아왔고, 6. 25의 전란 속에서도 상황 따라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미덕을 수행하였으며,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말없이 부도(婦道)를 지켜 왔던 게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 오늘의 결실을 이루게 되었으니 정말로 천만번 감사하오.

우리는 서로 먼저 가야한다고 우겼지만 이제 당신을 두고 내가 먼저 가게되어 미안하오. 나는 경오생(庚午生) 당신은 신미생(辛未生)이니 왔던 순서대로 내가 먼저 떠난 1년 후에 당신도 맘 편히 오시구려. 그럼 이제 모두 눈물을 거두고 웃음으로 나를 보내주기 바란다. 나도 웃으며 떠나련다. 사랑하는 아들딸들 그리고 사위들·며누리들·손자들·조카들·질부들아! 부디 건강하게 복되게 잘들 살아주기 바란다. 나 이제 그만 가련다. 안녕!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 해 바 라 기 천일칠 2005.02.07 288
53 철로(鐵路)... 천일칠 2005.02.03 251
52 아들의 첫 출근/김재훈 김학 2005.02.03 616
51 생선가시 잇몸에 아프게 서 량 2005.02.03 875
50 미인의 고민/유영희 김학 2005.02.02 471
49 동학사 기행/이광우 김학 2005.02.01 603
48 봄 볕 천일칠 2005.01.31 306
47 삶은 고구마와 달걀 서 량 2005.01.29 578
46 해 후(邂逅) 천일칠 2005.01.27 253
» 미리 써본 가상 유언장/안세호 김학 2005.01.27 573
44 막 작 골 천일칠 2005.01.27 531
43 화 선 지 천일칠 2005.01.20 524
42 <도청> 의원 외유 정진관 2005.01.25 1067
41 오늘은 묻지 않고 듣기만 하리 전재욱 2004.11.30 515
40 유 영철을 사형 시켜서는 안된다!!!<사형제도 폐지> J.LB 2004.11.29 405
39 작은 창가에만 뜨는 달 전재욱 2004.11.29 429
38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이승하 2004.11.27 1013
37 장 마 천일칠 2005.01.11 331
36 채 송 화 천일칠 2005.01.10 321
35 촛 불 천일칠 2005.01.02 416
Board Pagination Prev 1 ...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Next
/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