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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시적 현황과 지향성

  일시 : 2003년 1월 24일
  장소 : {시선} 편집부
  사회 : 홍용희(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 교수)
  대담자 : 배한봉(시인)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이재복(문학평론가)

  1. 우리 시단의 특징적 성격과 시적 유형도

사회자:안녕하십니까. 세 분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시단의 특징적인 현황을 살펴보고 아울러 앞으로의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가능성과 지향성을 탐색해보는 자리를 갖게 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문학적 상상력의 범주를 능가하는 전민족적 차원의 극적인 국면과 사건들을 현실 속에서 연속적으로 겪었던 해였습니다. 붉은 악마의 함성 속에서 이룩한 월드컵 4강의 신화, 거듭되는 반전 속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 한미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제기한 촛불시위 등의 자발적인 참여 운동은 우리들 스스로 우리들의 잠재적 역량을 경이의 시각에서 재발견하는 계기들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시단에서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시적 추동력으로 견인해온 큰 변화의 굴곡은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지난해에는 적어도 외양적으로 우리 시사에서 가장 풍성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편들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상당히 위압적으로 떠돌기 시작했던 문학의 종말이라는 풍문이 완전히 제압된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이러한 시의 양적 확대가 반드시 질적 심화와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섣불리 고무적이고 낙관적으로 평가할 사항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진지하게 우리 시단의 현황과 특징적 성격을 냉정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세 분 선생님께서 바라보신 지난해 우리 시단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과 시적 유형의 지형도에 대해 개략적으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승하:해마다 연말에는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며" 운운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지난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의 환희와 붉은 악마들의 열기가 아직도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드라마가 있었으니 노무현 씨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었지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확실히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두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이 촉발한, 한미관계의 재정립 요구를 위한 촛불시위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기록될 겁니다. 이밖에도 복제인간 탄생을 둘러싼 논란과 중동의 테러 다발, 미국의 패권주의 확산, 전세계적인 기상재해 등 파란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시단은 국내외의 이러한 격변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조금은 조용하게 1년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적 유형의 지형도를 그려보면, 순수서정시 계열의 작품이 여전히 주류를 형성하고 있구요, 80년대에 많이 거론된 해체시니 형태파괴시니 하는 것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형식상의 실험은 금방 식상함을 주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자체가 한물 가버려 그런 시를 쓰던 시인들이 힘을 잃은 것이겠지요.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승훈 선생은 이 점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여 '실험의식의 부재와 복고적 서정성으로의 퇴행'이라는 글을 최근에 발표하기도 했는데,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가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전에 민중시 계열의 작품을 쓰던 몇몇 분이 기운을 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의 지형도에는 여성시와 생태시가 들어갈 수도 있는데 진전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원로와 중견시인의 층이 두터운 것은 그렇다 치고, 신인의 무서운 도전의식이나 기성에 대한 확실한 반항의식 같은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거부의 몸짓이 아니라, 무언가 좀 새로운 시를 보여달라는 것이지요. 컴퓨터가 신으로 군림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구수한 숭늉 같은 전통지향의 시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학 문예창작학과가 많이 생겨나고 창작기법을 가르치는 사숙도 그에 못지 않게 증가했는데, 그로 인해 개성의 평준화가 이뤄진 것이 아쉽습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도 문예지를 통해서도 참신한 개성을 지닌 신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 등단의 자격을 주는 기성시인에게 어느 정도 잘못이 있는 거지요.

배한봉:지난해는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감지되는 한 해였습니다. 홍 선생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대로 월드컵 때 그 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붉은 색이 거리를 메웠던 일이나 태극기를 패션化한 것, 또 대선 때 인터넷을 통해 홍보전을 펼친 것 등을 볼 때 우리 사회는 이제 젊은 세대가 그 변화를 주도하는 시대를 맞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단은 이런 떠들썩한 사회적 분위기와는 달리 특별한 쟁점이나 변화의 기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몇 가지 움직임을 찾아보자면 김상용·정지용·김소월·주요한·나도향·채만식 등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고문인들을 기리는 '100주년 탄생 기념 문학제'가 있었고, 지역 문인들의 결속과 지역문학 활성화를 위한 '지역문학인회'의 결성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미당 시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어떤 지향점을 찾는 논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지난해는 차분하게 내적 변화를 모색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담론 생산을 위한 잠복기로 보여집니다. 리얼리즘 계열·모더니즘 계열·전통 서정시 계열 등 3가지로 대별됐던 우리 시단은 1990년대 들어 페미니즘·생태주의·해체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다양해진 이념적 스펙트럼에 의해 가속화된 시단의 분화와 다채로워졌던 시인들의 감수성이 절정기에 이르러 잠깐 숨고르기를 한 시기가 바로 지난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양적 확산에 의해 시단이 프로와 아마추어 시단으로 양분되었고, 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시 전문지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시디지털신인상' '빈터온라인문학상' '인터넷 한국섬문학상' 등의 인터넷 문학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생산자-수용자란 이분법에서 매니아층이 중심이 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 현상은 버라이어티 문화쇼와 같은 적극적 오프라인 문화를 시도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화산업은 시의 상업화, 대중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는데요, 창의성과 감수성이 생산성 중심의 테크닉화, 사물화로 변질되는 기현상을 낳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우리 시단의 특징적인 성격이나 시적 유형을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곧 시인들의 시의 방향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외적인 변화보다 내적인 변화를 위한 힘든 싸움의 시기였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뚜렷한 특징 없이 모색기에 접어든 시 현실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시인과 평론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길을 찾아나가야 균형감각을 잃지 않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이재복:저 역시 앞에서 두 선생님이 그려주신 시적 지형도에 대해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우리 詩가 지향해야 할 당위성과 가능성에 대해 중점을 두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우리 시가 좀더 일상의 장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했습니까? 시는 즐거움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즐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시 교육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말 우리글'이라는 대안 교과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의 국어 교과서와는 너무 다르더군요. 그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문학이 일상의 삶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순수한 하나의 장르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활용되고 있는 쪽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시의 타락이 아니라 시의 본질로의 회귀라고 봅니다. 시가 문학이라는 제도 속에 갇히기 전에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적인 살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해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詩에 대한 논의도 이제는 협소한 문학의 단위 차원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 문화적인 차원에서 소통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세대들과 그들의 사회 문화적인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 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이야기의 반복일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詩의 지형도를 이런 사회 문화적인 현상을 통해 그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체가 되어 보여준 월드컵과 대선 그리고 반미시위의 그 감성적인 에네르기가 언젠가는 우리 詩의 에네르기로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이승하:저는 중앙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론과 시 창작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시인 지망생이 줄어들고 있어 맥이 빠지는데, 다른 대학 문예창작학과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넘치는 힘을 문학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세대는 활자가 아닌 영상매체에, 활자라도 컴퓨터 화면상의 활자에 친숙하여 책 속의 활자, 시집 속의 활자를 영 껄끄러워하니까요.
  시단의 외적인 특징을 저는 세 가지로 꼽고 싶습니다. 첫째, 문예지의 폭발적인 증가에 따른 지면의 확대와 신인의 대거 등장입니다. 해마다 100명 이상이 이른바 '정식 등단'의 절차를 거쳐 시단에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2월 두 달 동안 중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의 수가 32명이었습니다. 유명무실한 문예지는 조사하지 않았으니까 엄청난 수의 시인이 매년 탄생하고 있다고 봐집니다. 둘째는 사이버신춘문예를 공모하는 데가 계속 늘고 있고, 인터넷상의 작품 모집과 평가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아마추어와 기성문인 사이의 차이가 희박해졌다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시를 발표하고 시인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죠. 시가 과거에는 교과서 속에만 있었는데 이제 우리 생활 한복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시를 대하는 자세가 예전에도 엄숙하고 진지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시다, 그러니 별것 아니다, 라는 생각은 위험한 것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며 연구하지는 않고 내가 쓴 시를 성급히 발표하려는 풍조가 만연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우리 시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해마다 1백 명이 넘는 시인이 등장하여 시인의 나라가 된다고 하여 시의 나라가 되는 건 아닐 거예요. 제 개인적으로는 고급독자층이 두터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지상에 짧은 시나 시의 일부분을 싣고 평자가 몇 마디 하는 것도 시의 본질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시는 짧은 문장 하나로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어야 하는 광고 카피가 아니거든요. 셋째는 지난해만의 현상이 아닌데, 베스트셀러 시집과 정통문학권 시집과의 차별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용택 시인이 {연애시집}이라는 시집으로 그 그룹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이색적입니다.

  2. 생태와 생명주의가 던진 대안적 패러다임의 화두

사회자: 우리 시단의 시적 유형과 성격의 윤곽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맥락과 징후를 진단해주셨습니다.
  근자에 들어 생태문학 내지 생명주의 문학이 보편화되면서 그 경계의 외연이 너무 확대되어 자기 동일성의 범주가 모호해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적 유형의 경계의 벽이 지나치게 선명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생태 내지 생명주의가 가졌던 대안 패러다임의 중요한 화두로서의 소임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효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 경계의 외연의 확대보다는 오히려 심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 선생님들의 견해를 듣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해 {우포늪 왁새}라는 좋은 생태적 세계관에 입각한 시집을 발간한 배한봉 선생님 그리고 이승하 선생님께서 집중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주시지요.

배한봉: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선조가 가졌던 정신, 전통적 가치관 속에는 생명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공동체 정신, 즉 두레가 그러하고, 샤머니즘을 포함한 유불선 정신이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런 생명의식의 재현과 현대문명에 의해 상처받고 또 사라져간 원시성 회복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잘살기 위한 것입니다. 자연과 모든 생명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재앙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생태)주의가 유행의 물살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첨단 기술 문명은 사람들에게 비정한 경쟁과 투쟁을 강요하잖아요. 그 속에서 쟁취한 물질적 성공 뒤에 숨겨진 고독하고 공허한 문명의 실존은 물질적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적 '무거움'의 고통이고, 유토피아에 대한 상실감이고, 인류 미래의 실상을 알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경제 지상주의적(물질적) 가치관과 인간 중심의 윤리관(개인주의적 인생관)은 승리와 패배의 원리가 지배하는 인간관계를 형성시켰으니까요. 결국 '인간과 자연', '삶과 정신'이 교감하고 하나로 조응하는 큰 질서를 찾으려는 이런 노력이 생명(생태)시를 탄생시켰을 것이고, 무수한 담론을 촉발시켰을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의 이념이 지배해온 인간 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발레리나 토인비가 말한 문명의 죽음을 우리 세대나 우리 자식들 세대에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은 곧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죠.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원의식 같은 게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그러니까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변모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공생적 삶으로 가는 한 출구로써의 자연과 대지, 혹은 뭇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이 화두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방법론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남현의 글 중에 "이제 문인들은 생태시와 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살 수 있는 시 유형과 시운동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보여주어야 한다. 녹색문학은 그에 적극 참여한 시인들과 작가들, 그리고 평론가들에게 실천적인 사상가가 된 느낌을 주며 바로 이런 느낌이 문학 위기의 극복의 의지나 힘으로 발전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새삼 느낀 것은 시인과 시 평론가는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입니다. 리얼리즘이든 다다이즘이든 전통서정시든 얼마만큼 지속적으로 대상을 육화시켜 가슴에서 터져 나오게 하느냐 하는 것, 그리하여 거시적으로는 여러 경계를 허물어 어떻게 하나로 묶느냐 하는 것, 시인과 시 평론가의 이런 실천적 사상가가 되려는 노력이 생태적 관점을 넘어선 생명시의 큰 맥을 만들고,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군요.

이승하:일단 용어를 뭐로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태시·생명시·생태환경시·환경시·생태주의시 등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저는 생태시를 골라 쓰겠습니다. 생태문학이 외연의 확대보다는 심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홍용희 선생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환경문제를 거론한 시들을 모아 펴낸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1991, 다산글방), {이 땅에 살기 위하여}(1991, 우아당) 같은 시집을 보면 80년대에 발표된 시들 중 상당수는, 물론 제 시까지 포함해서 현장 보고 차원의 시였습니다. 언론이 보도하는 정보를 시의 소재로 삼아 쓰거나, 국가의 정책이나 재벌의 횡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현실참여적인 생태시였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전세계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었고, {녹색평론} 등에 좋은 글이 많이 실림으로써 이 문제를 대하는 시인들의 의식도 성숙해갔습니다. 특히 평단에서의 연구는 동양정신 혹은 동양적 사유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는 데로 진행되었는데, 최동호·이남호·신덕룡·정효구·김영석·이은봉 선생 등의 작업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시인의 이름은 너무 많아 거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생명 옹호의 노력과 생명에 대한 예찬, 즉 인류의 생존과 다른 생명과의 공존에 대한 평론가의 논의는 90년대 시단의 주된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일반 독자에게 널리 전파되어 환경문제를 나와 내 이웃 및 후손의 생명에 직결된 문제임을 깨닫도록 해야 할 터인데,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생태시가 생산되고 있는데도 우리네 생활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지요. 저는 생태시가 소재 활용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탐색으로까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모더니즘의 주된 명제인 문명비판이란 것이 사실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문명의 혜택을 뿌리칠 수 없지만 그 문명을 마냥 고마워할 수도 없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와 채팅이 초래한 범죄가 날로 늘고 있고, 음란사이트와 자살사이트 폭탄사이트 등의 폐해도 날로 늘고 있지만 우리는 각종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고 있으며 E-메일을 편리하게 쓰고 있습니다. 저도 생태시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데 자기 모순에 빠져 상심할 때가 많습니다. 책은 나무를 베어와서 만드는 것이니까요. 살아가는 가운데 종이 한 장을 아끼는 등 작은 것들을 몸소 실천하고, 작은 실천들이 모여 시민운동이 되지 않는다면 생태시라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적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생태환경 보호를 표방하는 어느 잡지의 청탁을 받고 시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여러 재벌기업의 자동차 광고, 윤활유 광고, 리조트 광고 등 온갖 상업적인 광고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시민운동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태시가 양산되는 것은 탁상공론이 되기 쉽습니다.

  3. 페미니즘 시의 의미와 당위성 및 그 전개 과정

사회자:예, 그렇습니다. 생태문학은 인식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차원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생활철학으로 내면화가 요구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역시 우리 시단의 중요한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페미니즘 계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1990년대 이래 문단 전반의 경향이기도 합니다만, 여성 시인들과 여성성의 시들이 우리 시단에도 전면에 등장해서 주도해나가는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직접적으로는 남성 중심적 세계에 대한 부정과 비판에서부터 우리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강퍅한 수직적인 경직성의 문화에 대한 수평적인 부드러움과 포용의 문화의 섭수라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의,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 시인과 여성성의 시의 함수관계, 그리고 페미니즘 시의 그 동안의 전개 과정과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바람직한 당위성과 지향성에 대해 이재복 선생님께서 집중적으로 논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재복:여성 시에 대한 논의야말로 문학이라는 범주 속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 문화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라고 봅니다. 흔히 90년대를 여성시의 확립 시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여성시의 자기 정체성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여성의 교육 기회의 증대와 중간계급으로의 편입,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과 시민의식의 성장, 서구 페미니즘 이론의 유입 등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런 요인이 토양이 되어 90년대에 여성시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91년 고정희의 죽음은 상당히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90년대 이후 여성 혹은 여성성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시를 쓴 시인들로는 김승희·천양희·노혜경·김혜순·박서원·나희덕·김선우·김언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시 세계는 여성 혹은 여성성의 범주로 묶을 수 있지만 일정한 편차를 보여줍니다. 김승희의 경우에는 우리 문화에 도사리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남근을 읽어내거나 그것이 가지는 부조리를 아이러니컬하게 풍자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천양희·나희덕·김선우는 여성이 가지는 포용성과 융화성을 내세워 남성의 사회 문화적인 세계를 뛰어넘는 여성성의 순수함을 노래하고 있지요. 특히 김선우의 경우에는 에코페미니즘적인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박서원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체험한 내밀한 상처를 분열된 의식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상처가 직접적인 가해자가 남성인지 혹은 남성성으로서의 이 사회 문화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상처만큼은 여성성의 감각을 획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김언희는 그 대상이 아버지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아주 격렬하게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를 해체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지나쳐 그것이 극단적인 엽기의 차원으로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시인들로부터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에 의해 난도질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이것보다 더 불안한 것은 그녀의 시적 상상력과 표현의 매너리즘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노혜경은 다른 어떤 여성시인들보다 여성성의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극대화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봅니다. 그가 레이스마을 이야기에 보여준 세계는 여성성의 유토피아적인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봅니다. 이런 유토피아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성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억압적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레이스마을이라는 유토피아는 타자가 스며들 틈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봅니다. 김혜순의 관심은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론적인 차원에 닿아 있습니다. 그가 들고 나온 프렉탈이라든가 환유적인 글 쓰기가 바로 그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다분히 크리스테바적이지요. 이들 여성시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페미니즘적인 경향이 우리 詩를 풍요롭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보여준 여성성에 대한 자각과 발견은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사회 문화 구조가 해체되지 않는 한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여성의 현실이 많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억압적인 부분이 많이 있지요. 제가 남성이기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당하는 억압의 실체를 피부로 실감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선언 이후에 우리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아주 상징적인 말을 보았거든요. 그것은 바로 '살류쥬'라는 말이에요. 얼핏 들으면 무슨 고상한 불어 같지만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살려달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부산 경남 쪽의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문화 동인 단체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여성은 억압 속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성시인들이 계속 비명과 유토피아적인 꿈을 꾸어서는 안 되리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 여성시인들이 좀더 여성을 억압하는 실체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혔으면 합니다. 단순히 남성을 적으로 정해놓고 그것에 대한 한풀이라든가 남성과는 다른 차원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만을 보여준다면 자본이라든가 그것이 행사하는 권력과 같은 실체에 대해서는 덮어둘 위험성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여성의 해방을 외쳐왔고 많은 부분에서 그것을 성취했지만 자본의 권력이 행사하는 권력 특히 비쥬얼한 사회 문화적인 구조 속에서의 여성은 과거보다 더 큰 억압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하:저도 몇 마디 보태겠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이 땅의 여성분들이 억눌려 살아왔기 때문이겠지만 한때 우리 시단에는 페미니즘적 시각의 시들이 적지 않게 발표되었습니다. 박서원·이연주·김언희·노혜경 등이 가부장제 중심 사회의 제 모순을 강력하게 비판했었구요, 김승희·최승자·김혜순·김정란 등도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한 시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뒷 세대인 나희덕·김선우는 이런 분들보다 훨씬 부드러워, 여성성과 아울러 모성성을 제고한 시인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시집을 낸 강신애·김명리·류외향·박지영·이순현·이사라·정채원·조말선·한명희 등의 시집을 보니까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피해의식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시는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겹구나 하는 것은 십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는데, 여성운동의 방향 자체가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 여성해방에서 남녀평등으로 바뀌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래도 여성성의 추구와 여성의 지위 향상은 21세기도 여전히 살아 있는 화두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문중의 재산이 여성에게는 상속되지 않고 있고 고용의 평등이 제대로 안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신체 구조의 차이가 성차별을 야기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 21세기에는 반드시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민중시와 노동시의 새로운 특징적 양상과 그 의의

사회자:예, 여성성 시의 변주 양상을 섬세하게 짚어주셨습니다. 여성성 시의 양상과 참여 시인들도 매우 다양화되었음을 알겠습니다. 특히, 여성성의 시가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육박해가고 있는 측면은 여성성의 시적 본령이 단순히 여성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그럼 이번에는 민중시의 계보에 대해 살펴볼까요. 지난해의 시를 개괄해볼 때 민중시, 노동시의 계보가 어느 정도 약진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도시와 농촌의 노동 현장에 거점을 두고 그 생활의 굴곡과 곡절을 노래한 시집만도 최종천·유승도·이면우·이중기 등에 걸쳐 다양하게 발표되었습니다. 이들 노동시 내지 민중시의 종전과 변별되는 특징적 양상과 그 의의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보기로 하지요.

배한봉:저는 어떤 경향의 시든 가슴 밑바닥을 치는 서정이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좋은 시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서정시는 시대에 따라 그 속성을 조금씩 달리 하지만 주관적 정서에 의한 내밀한 울림이 그 밑바탕을 이룬다는 특성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 80년대에는 투쟁적 구호성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지난해뿐 아니라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기 성찰과 자연 대상물을 객관화시킨 탐구적 서정성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데는 아마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신경림이 {농무}에서 보여줬던 건강한 해학과 공동체 의식을 내포한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 민중과 노동자가 가진 질기디질긴 생명력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면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하리라 봅니다. 여하튼 노동현장의 여건 개선 등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시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그들 삶의 가장 밑뿌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굴곡과 곡절이란 어느 시대건 또 누구에게건 존재하므로 공감대가 형성될 때는 돌아서서 아무도 몰래 눈물을 뚝뚝 뽑아내고 말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서정성 깊은 노래야말로 민중시·노동시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여기서 종전과 변별되는 90년대 노동시·민중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하:중요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민중시 하면 김남주이고 노동시 하면 박노해다, 이 두 사람의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민중시, 노동시가 사라졌다는 식의 예단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90년대에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시인의 작업이 비교적 뜸했던 것이 사실인데, 근년에 들어 다시금 살아나고 있어 무척 반갑고 고무적입니다. 홍 선생님이 거론하신 시인들의 작업을 평론하시는 분들이 좀더 애정을 갖고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작품의 수준이 지난날의 과격함과 무모함을 딛고 일어서서 퍽 안정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즘에는 이분들의 시집에서 메시지가 너무 강한 시, 르포 같은 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종천 시인은 용접공이죠. 산업현장의 애환을 다룬 이전의 노동시와 달리 최종천의 시는 자신과 동료의 노동에 철학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거칠음, 깊이와 넓이, 치열함과 침착함이 잘 뒤섞여 오히려 멋진 조화를 이룬 시를 쓰고 있지요. 일용직 철근공인 김기홍의 {슬픈 희망}은 1987년에 낸 {공친 날}보다 진일보한 시집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전히 거칠지만 그 바닥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겨 있습니다. 시가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면, 또 공상이나 가상현실이 아닌 지금-이곳이라는 현실에 기초한 것이라면, 이런 작업은 정말 중요한 것이지요. 김기홍은 문단의 평가에 대해 눈치보지 않는 시를 씁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확실히 피력하여 믿음직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중기의 시에는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그나마 지탱하게 할 수 있었던 전통 가락이 살아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역시 운문정신의 산물이 아닙니까.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블루칼라에 못지 않게 많은 화이트칼라의 애환을 다룬 시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있긴 있을 테지만 김기택의 {사무원} 외에는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여성인력(주로 음식점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의 삶이 우리 시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현장에 뛰어든 탈북자와 연변 조선족도 꽤 되지요. 근로조건이 개선되지 않은 사업장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구요. 물론 이런 문제는 소재주의의 차원에서 슬쩍슬쩍 다뤄질 것이 아니라, 체험의 육화와 문학적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야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년에 작품세계에 변화가 온 하종오·오봉옥·홍일선·김신용 등의 작업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재복:박노해 이후 민중이니 노동이니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지는 않았는데 지난해에 접어들어 여러 좋은 시인들의 시집이 나오면서 그것이 다시 담론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들의 시가 박노해가 보여준 노동의 생경화와 관념화 그리고 단순화가 변증법적으로 극복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박노해의 출현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반응을 보이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그의 시를 평가하는 지식인 집단의 노동 콤플렉스가 작용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해 박노해가 노동 현장 혹은 노동 체험을 표나게 내세웠지만 과도한 폭로와 부정성의 노출로 인해 오히려 노동 현장의 생생함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 네 명의 시인들의 시는 나로 하여금 조금 더 이들이 살아가는 노동 현장에 관심을 갖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노동이나 민중적인 삶에 대한 리얼리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노동 현장을 보여준다고 억압받는 자들의 외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물·사랑·용서·화해·절망·희망 등과 같은 사람의 일이 있어 다양하게 녹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이 네 명의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노동이라는 동일한 주제 속에서 다양한 편차에 대한 발견이 우리 시로 보아서는 퍽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면우나 유승도의 시에서 엿보이는 노동과 자연 속에서 깨닫게 되는 무소유와 관용 그리고 넉넉함 같은 덕목은 그것이 노동의 현장을 희석시키는 관념의 언어들이 아니라 그 자체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리얼리티를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천의 노동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시편들은 아주 유니크하게 보였습니다. 이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5. 세대별 시인간의 특성과 성과

사회자:예, 고맙습니다. 노동시편이 지난날의 과격함과 무모함에서 노동현장의 생동하는 삶의 실태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변화의 층위에 대해 주목해주셨습니다. 배한봉 선생님의 지적처럼 이제는 민중시·노동시 역시 깊은 서정성과 진정성을 담보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다음으로는 지난해의 우리 시단을 세대론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지요. 지난해에도 신진들은 물론이지만 중견 및 원로 시인들 역시 활발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점은 우리 문단의 세대론적 층위를 다양하게 하면서 동시에 시적 영토를 풍요롭게 확산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 각각의 세대에 대한 시인들의 특징과 중요한 성과, 그리고 세대간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대해 진단해보면 어떨까요. 지난해에 왕성한 활동을 한 주목할 만한 시인 중에 중진 시인에 대해서는 이승하 선생님이 그리고 신진 시인들에 대해서는 배한봉, 이재복 선생님이 중점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시지요.

이승하:중진 시인의 나이나 등단연도의 상한선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50대 이상을 중진으로 할까요? 제가 지난해에 나온 모든 시집을 읽지 않았으므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진단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김춘수 시인은 [悲歌] 연작을 통해, 신경림 시인은 새 시집 {뿔}을 통해, 정진규 시인은 특유의 산문시를 통해 여전히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우리 문단의 고질적인 병폐가 조로현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세 분의 시적 치열성을 보면 그런 말을 절대로 해선 안 됩니다. 김춘수 시인의 {쉰한 편의 悲歌}를 괴테 말년의 명작 [비가 Elegie]와 비교 연구해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신경림 시인의 {뿔}은 시의 밀도나 긴장감이 예전의 시와 견주어도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무서운 시집이지요. 자기세계를 확실히 갖되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장인정신의 산물임을 느끼게 한 시집이었습니다. 작년에 회갑을 맞이하신 오세영·오탁번·이수익·이승훈 시인은 모두 시집을 내셨습니다(오세영:{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오탁번:{벙어리장갑}, 이수익:{불과 얼음의 콘스트}, 이승훈:{인생}). 이 네 분은 현대시 동인 멤버이기도 했었지만 시가 참 젊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인은 정신의 날을 벼리기를 일신, 우일신 해야 하는데  그 점에서 모범을 보인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오세영 시인의 시가 얼마나 젊은지는 꽃타령 연작시도 그렇거니와 [욕정] 같은 시가 웅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시어 선택이나 비유법 구사, 심상 전개에 있어 연세가 들수록 노련하고 날렵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오탁번 시인은 천진성과 골계미의 잘 조화시킨 시집을 내셨고, 이수익 시인은 단순함 속의 발랄함이 돋보였습니다. 이승훈 시인은 일상성이 심화되는 풍경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지요. 현대시 동인 중 박의상 시인은 작년에 두 권의 시집({문제들}, {미국, 이라는 문제})을 내셨습니다. 정치상황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과 시대에 대한 절망감이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이밖에도 중견과 원로 시인 가운데 작년에 시집을 내신 분이 많습니다. {사행시 사백수}(박희진), {두고 온 시}(고은), {破顔大笑}(범대순), {花開}(김지하), {民譚詩集}(박이도),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강은교),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낙산사 가는 길}(유경환), {적빈을 위하여}(김석규), {쉽게 詩가 쓰여진 날은 不安하다}(임강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마종기), {바람이 아직도 흔들리는 너를}(추은희),{산촌 엽서}(나태주), {그 땅에는 길이 있다}(이운룡), {영혼의 눈}(허형만), {바다의 아코디언}(김명인), {나무 나비 나라}(민용태), {아름다운 순간}(이동순), {말과 침묵 사이}(한기팔), {새벽강 저쪽}(홍금자), {왕촌일기}(이명수), {공놀이하는 달마}(최동호), {슬픔의 뿌리}(도종환), {비천한 빠름이여}(한영옥), {풀나라}(박태일), {덫}(박명숙), {시간이 지나간 시간}(이사라), {그 해 가을}(이구락), {사람의 길}(이정우), {어린 순례자}(김춘추) 등이지요. 자기 세계를 심화하신 분도 있고 확대하신 분도 있고 큰 진전을 못 보이신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많은 시집이 독자들의, 특히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류시화·이정하·원태연·용혜원·이해인의 시집을 사보지요. 원로와 중견 시인들께서 5년 이상은 고심을 한 끝에 작년에 시집을 내셨겠지만 이들 시집은 거의 대부분 2∼3년만 지나면 묻혀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국내에 문예지들이 정말 많은데, 20∼40대를 향해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의 일부분을 이분들에게도 비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엄정한 평가와 비판을 전제로 한 조명입니다. 이분들의 시가 동어반복이 되지 않게끔 말입니다. 속된 말로 '정신 차리시오', '나이 값을 좀 하시오', '지난번 시집이랑 달라진 게 뭐요' 하는 식의 비판적인 평가작업이라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많은 시집을 다 언급하기란 그렇고, 제가 서평을 쓰기 위해 정독했던 시집 다섯 권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지하의 {花開}를 보면 시인이 자주 울적해하고 눈물까지 수시로 흘립니다. 몸도 이제는 늙고 마음이 약해진 탓이겠지요. 하지만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김지하의 시가 갖고 있는 특유의 비장미가 감상벽 아래로 무너지려는 것을 막아줍니다. [지옥에]에서 시인은 우리가 부대끼며 살고 있는 이 지상이 지옥일지라도 생명을 지닌 것들이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는 희망을 이 지옥에서도 품을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지요.
  박이도의 {民譚詩集}은 제목 그대로 한 권 시집에 실린 시 거의 전부가 민담을 활용하여 쓴 것들입니다. 민담 속에는 현실비판정신과 아울러 현실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려는 지혜가 담겨 있었지요. 민담은 양반이 풍자의 대상이었지만 박이도의 민담시에서는 주로 위정자가 풍자의 대상이 됩니다. 구수한 사투리 구사는 이 시집의 또 하나의 매력입니다.
  마종기의 시집에는 36년이나 고국을 떠나 산 이의 애환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의 서글픔, 늙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이 이전 시집에서보다 더욱 짙게, 쓸쓸히 배어 있습니다. 단독 시집으로는 여덟 권째 내는 시집에서 시인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심각하고도 심오하게 하고 있습니다.
  허형만의 {영혼의 눈}에는 여행의 산물로 이뤄진 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가를 들려주고 있어 중후함과 치열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시가 자꾸만 산문화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허형만 시인의 짧은 시들은 시의 압축미나 정제미를 보여주고 있어 또 다른 귀감이 됩니다. 저도 시를 짧게 쓰고는 싶은데 참 잘 안 되요.
  박태일의 {풀나라}에는 엄청나게 많은 토속어가 나옵니다. 큰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토속어는 타지방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말 보존을 위한 시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경남 일대의 지역명이 많이 나오고 사람 이름들도 자주 나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쓴 시들임을 알 수 있는데, 경남 지역 농민과 어민들의 체온과 체취가 느껴지게 했다는 점에서 구체성의 영역을 이번 시집에서 확보했습니다.

이재복:저는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세대론적인 차원에성 우리 시단의 새로운 신진 그룹으로 떠오르고 있는 70년대 생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들의 연배가 30을 전후한 세대들이니까 우리 시단의 젊은 수혈자들이지요. 이들이 대부분 200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나왔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지요. 이들은 50년대나 60년대 생들과는 또 다르지요. 이들에게는 앞 세대보다 역사나 민족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습니다. 60년대 생만 하더라도 유신독재 체제하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을 받은 세대이고 광주항쟁과 6월항쟁을 눈으로 혹은 몸으로 체험한 세대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86세대가 바로 이들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들은 역사나 민족 이데올로기 속에서 시적 상상력과 표현력을 키워온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생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디지털 문명 및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앞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이들 언어의 전체적인 특성은 시적 언어가 주는 압박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앞 세대들은 알게 모르게 언어의 압축과 절제 그리고 재현의 측면에 민감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세대들의 언어는 이런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즐김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시에 대한 지나친 경건함 내지 신성함보다는 그 자체를 스스로 즐기는 세대라는 거지요. 어쩌면 이들의 시가 가볍고 감각적이고 산문투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런 경향은 우리 환경이 점점 인공화 되고 디지털화 되어 가는 한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제가 파악한 70년대 생으로는 강정·서정학·김언·김참·김행숙·여정·김태형·이응준·박성우·정재학·손택수·문태준·김선우·김중·김종태·안현미·최갑수·최진희·이은림·신혜정·김경후·박은희·윤예영·신해옥·박한나·진은영·류외향·진수미·박진성·길상호·윤이나·이재훈·조동범·김중일·안주철·신해욱·윤성택·이영주·이수정·신용목·장이지·신형목·류형창·이철성·노미영·최금진·최승철·장승진·하재연·장영인·김경인·조선기·문혜진·심은희·여태천·김새나리·신동옥 같은 시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많은 좋은 70년대 생 시인이 있을 겁니다. 제가 워낙 게을러서 미처 그 시인들의 시를 챙겨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범위 내에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아직 시집을 상재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집을 낸 시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우선 강정이 보여주는 어둠과 불안의식은 상당히 매력적인 데가 있더군요. 검은 나르시시즘 내지 니힐리즘적인 흐름이 그의 시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김참의 현실의 시간이 끊긴 데에서 비롯되는 환상도 리얼리즘이나 전통 서정시가 득세해온 우리 시단의 맥락에서 볼 때 낯선 것이지요. 재현보다는 굴절에 가까운 모더니즘 시의 경우 이런 환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처럼 시작과 끝이 모호한 환상은 아니었지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적인 환상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환상다운 환상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박성우는 삶의 아픔을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주 섬세하고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섬세하게 서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 우리는 삶의 비극성을 생생하게 환기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건 이 시인이 가진 큰 재주지요. 서정학의 시에는 대중문화적인 감각이 많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대중문화가 시에 수용되면서 가벼운 유희가 시작되고 이것은 언어의 혼란으로 이어지지요. 언어는 유쾌하게 미끄러져 내리면서 이 시대의 욕망을 만들어내겠지요. 김중의 시는 그로테스크합니다. 그로테스크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의 그로테스크는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된 세계의 산물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의 언어는 토하고 싶을 만큼 더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무차별적인 가치들의 향연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향연이 조작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연스러운 뒤범벅이 되어야하겠지요. 김언의 시는 사물을 통해 나의 내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것은 그 내면이 숨은 쉬지만 텅 비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그의 말하기가 독백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없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고 희미하고 애매한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이 애매함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봅니다. 점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손택수의 시에는 사물과 삶을 연결시키는 섬세한 감성이 묻어납니다. 그것이 어두운 것이든 아니면 밝은 것이든 그의 이 섬세함은 적지 않은 추체험의 감동을 줍니다. 문태준은 서정시인입니다. 그 서정이 앞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시인에게 그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그의 시는 장석남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새로운 낡음'입니다. 이 말이 가능한 건 그의 시의 표현의 영역이 새로운 시적인 차원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김선우의 경우는 자연의 체험을 통한 문명에 대한 비판이 좋았습니다. 특히 모성의 이미지가 가지는 포용력과 화해의 속성을 시를 통해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모성을 내세우다보면 남성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들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시인들의 모성성을 내세우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거든요. 하지만 김선우는 달라요. 그걸 과감하게 내세우고 있거든요. 그런 자연과 더불어 산 어머니와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어떤 생태적인 진정성의 영역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은 70년대 생 시인들이 가지는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이들이 모두 한두 권의 시집을 가지게 될 때 우리 詩의 향연은 계속되리라고 봅니다.

배한봉:원로나 중견, 신진시인 구분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해야 정확한 것인지 상당히 애매합니다만, 일단 범주 설정이 필요하니, 저는 90년 이후 등단한 시인 중 몇 분을 간략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올해 초반을 포함해 지난해에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젊은 시인들은 시집을 발간한 박형준({물 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작과비평사), 노미영({일년 만에 쓴 시}, 한국문연), 정철훈({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민음사), 차창룡({나무 물고기}, 문학과지성사), 최종천({눈물은 푸르다}, 시와시학사), 이영수({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천년의 시작)를 들 수 있을 것인데요, 교도관 시인 이윤주({비상벨}, 한국문연), 맹문재({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사) 등도 독특한 개성으로 우리 우리의 삶과 세계를 성찰했습니다. 또 장철문·염창권·김영남·김선태·이정록·이재훈·이동백·조말선·길상호·유홍준·김참·임현정 등을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지난해 시집을 발간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이들은 세대적으로도 시적 경향으로도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정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신진들은 전통과 진취성이라는 모순을 끌어안고 있어서 자기 시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정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손택수나 길상호·이재훈·노미영·김참·김언·임현정 등 세대적으로 좀더 젊은 층인 이들의 활동 영역을 넓힌 것도 일종의 모색기라 일컬은 지난해의 성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6. 문예지의 확산과 지방 문예지의 활성화에 따른 문제점

사회자:우리 시단의 풍경을 세대론에 입각하여 살펴보면서, 중진 그룹의 기성세대와 신인급의 새로운 세대간의 차이성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산업화 시대의 세대와 디지털문명 시대의 세대간의 격절(隔絶)함에 대한 확인보다 생산적인 세대 통합의 논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대간의 단절이 아니라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변화와 지속성의 영역을 포괄해낸다면 우리 시의 토양은 더욱 풍요로워지겠지요.
  다시 화제를 돌려보지요. 지난해에 많은 시가 발표되었던 것은 시 전문지의 기하급수적인 확대와 직접 연관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대담을 하고 있는 지면인 {시선}도 21세기에 대응하는 깨어 있는 시정신과 시적 절조를 지키면서 대중적 삶 속으로 확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롭게 창간되었습니다만, 지방의 경우에도 새로운 문예지들이 선을 보였지요. 이러한 문예지의 확산은 분명 시인들에게는 행복한 일입니다. 특히 지방 문예지의 활성화는 우리 시단의 서울 중심의 집중화를 지방분권화로 전이시키는 순기능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예지의 지나친 범람이 시적 수준을 평균 하향으로 몰고 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을 이재복 선생님부터 말씀해주시지요.

이재복:시 전문지의 창간이 문제라면 또 문제겠지만 많아서 나쁠 것은 없지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식으로는 아니라고 봐요. 가장 큰 문제는 창간되는 잡지가 색깔이 없다는 겁니다. 서울 중심의 문화에 대한 비판과 지방 문화의 활성화라는 모토를 내걸고 창간한 지방 문예지들의 현주소가 어떻습니까? 기성의 권위를 빌린다거나 기성 문예지의 답습 등 중심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몇 해 전에 어느 지방 문예지 청탁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자신들의 문예지를 진단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여기에 응했죠. 그래서 그 문예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썼어요. 심기가 불편했든지 그 다음부터는 청탁이 안 오더군요. (웃음) 지방 문예지는 그 지방의 색깔을 내야지요. 그런 점에서 {시와 생명}이라는 잡지는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해요. 잡지의 색깔을 생태 쪽으로 가져가면서 우포늪이라는 천혜의 생태 공간과 경남 인근의 반 생태적인 공간 사이에서 어떤 긴장 역할을 했다고 봐요. 저는 그 잡지를 주변적인 잡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서울에서 나오는 어떤 시 전문지보다도 좋은 잡지라고 생각해요. 아, 또 {시평}이라는 잡지도 있군요. 저는 이 잡지가 나왔을 때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어요. 시인들이 시나 열심히 쓰면 되지 시도 쓰고 평도 하고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꾸 보니까 우리 시에 대한 자의식이 투영되어 있더라구요. 시인들 스스로 우리 시단에 대해 민감한 자의식을 갖는다는 건 바람직한 거지요. 그런 점에서 이 잡지도 나름의 색깔을 낸다고 보았어요. 이제 우리 잡지 이야기를 해 볼까요. 시 잡지를 낸다고 하니까 모두들 어이없어 하더라구요. 편집위원 입장에서 말하기 민망하지만 {시선}은 필요한 잡지라고 봐요. 저는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는 시 전문지를 보면서 그것을 평가하고 의미 매김해줄 제대로 된 메타 잡지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 기능을 잡지의 월평과 계간편이 해야 하는데, 잘 아시다시피 그것이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아닙니까? 지금 우리 시단도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누군가 나서서 지도 그리기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역할을 우리 잡지가 해야 한다고 봅니다. 뭐,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시가 있으면 쓴소리를 하고, 좋은 시 있으면 칭찬해 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아주 단순한 것마저 망각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이제 그 일을 새롭게 시작해보아야지요.

배한봉:우선 저는 지방이라는 말보다 지역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군요. 지방이란 말에는 서울이 중앙이라는 이분법적이고 권위적인 냄새가 나는데 반해 지역은 변방의 개념이 아니라 서울지역, 경남지역, 광주지역이라 할 때처럼 동일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경남의 {시와 생명}, 부산의 {시와 사상}, {신생}, {게릴라}, 대구의 {시와 반시}, 광주의 {시와 사람}, 제주의 {다층}, 대전의 {애지}, {문학마당}, {시와 정신}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강원권을 제외한 각 지역마다 문예지 또는 시 전문지가 잇달아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창간 붐은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무적인 현상이었고 또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의 위기' 운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위에 열거한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문학인} {시로 여는 세상} {문학과 경계} {시작}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경} 등이 창간된 것은 여전히 시의 수용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시인들의 다양한 시를 접할 수 있고, 시인 입장에서는 발표지면의 확보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뚜렷한 편집 방향과 자본력을 가지지 않고 출발할 경우는 현실적 이해에 얽혀 처음 한두 호를 빼고는 볼 것이 없는 잡지로 전락하거나 몇 번 나오다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맙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존 시 전문지와의 변별성 확보인데, 창간 잡지의 권위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주요 필자들에게 청탁을 하다 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갑작스레 시 전문지가 증가됨으로써 주요 필자의 원고를 받는 일이 어려워진 지역의 몇몇 시 전문지는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짜맞추기식 편집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묻혀 있는 좋은 시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수준 미달 시인을 추켜세우는 폐단을 만들기도 하죠. 거기다 문예지를 통해 문단권력을 가지려는 얄팍한 편집자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독자에게도 시인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단에 대한 기여도를 찾자면 신진시인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예전보다 훨씬 넓혔다는 점입니다. 새로 선보인 문예지 또는 시 전문지들이 창간 때의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가기를, 이 노력이 우리 시단에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고 소외된 좋은 시인들을 발굴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하며, 믿고 또 격려를 우리는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하:{문예연감}에 따르면 2001년에 창간된 문예지가 20종인데 작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문예지가 창간된 듯합니다. 아무튼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문예지가 200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엄청난 수의 문예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통을 자랑하는 몇 개 월간지와 영향력을 내세운 몇 개 계간지가 문단의 권력을 분할하고 있던 70∼80년대에는 지면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지금은 시골에 가서 하늘의 별 보는 일이 됐습니다. {현대문학}이라는 조연현의 아성에 김동리가 {한국문학}을 냄으로써 도전했던 것처럼 문예지들이 90년대에 {창비}와 {문지}가 갖고 있는 권력을 나눠 갖자고 다수 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온갖 정성을 들여 문예지를 내본들 독자도 문인도 언론매체도 그 문예지에 무관심하니까 아성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문예지가 동호인들의 작은 잔치마당이 돼버린 것이지요. 그래도 개성이 강하고 물주가 튼튼한 문예지는 생명력을 가질 테고, 그렇지 않은 문예지는 쉽게 도태될 것입니다. 이제는 시전문 계간지를 내지 않는 대도시가 없어요. 부산의 {시와 사상}과 {신생}, 대구의 {시와 반시}와 {생각과 느낌}, 광주의 {시와 사람}, 대전의 {시와 정신}과 {문학마당},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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