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하늘을 심고 /신 영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인 일일까.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故 박경리 선생(82)의 타계 소식에 어머니를 여읜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어머니일 것이다. 한 시대를 어우르던 한 소설가 이전에 아버지에 대한 깊은 상처와 슬픔을 안고 자란 외로운 한 여인의 딸이었다.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행복을 채 누리기도 전에 남편과 사별을 하고 아들을 잃고 딸 하나를 키우는 슬픔에 젖은 한 여인이었다.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번 작품은 '현대문학’ 53주년을 맞아 발표한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발표작(월간 현대문학 2008. 4)이다. "'옛날의 그 집'에서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의 시편은 80여 년의 한평생 삶을 진실하게 살았던 삶의 노래이다. 삶이 그대로 글이 되어 울림으로 남는 아름다운 삶의 여정에서 맘껏 불렀던 노래인 것이다. 어찌 순탄한 삶이었을까. 삶이 고달프고 힘겹기에 깊은 생각과 마주하고 그 생각이 또 하나의 펼쳐진 작품의 세계를 열 수 있었으리라. 이처럼 가슴의 크고 높고 넓은 하늘 같은 꿈을 마음의 텃밭에 키우며 한평생을 일구고 가꾸며 살아온 삶이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답다.
땅에 하늘을 심고
詩 신 영
황톳바람 짙은 이른 봄
겨울을 보내지 못한 시린 봄날에
구겨진 신문지에 씨앗을 싸서
꼬깃꼬깃 호주머니에 담고
봄을 기다리며 서성거렸습니다
겨우내 얼고 언 굳어진 땅
만지작거리던 호주머니의 씨앗
차마 기다리지 못한 설움에
손수 당신의 손을 쟁기 삼아
갈고 닦아 텃밭을 일궜습니다
하늘만큼 넓고 높은 푸른 꿈
가슴에 빼곡히 담아
이른 봄 텃밭 이랑과 고랑 샛길에
하늘길을 열며 꿈과 희망을
씨앗에 묻혀 땅에 심었습니다
한평생 일구던 채마밭 고랑에는
어제 뽑다 만 풀뿌리들 누워 있고
밭 이랑마다 촉촉이 젖은 땀방울
굽이마다 남은 당신의 숨결은
오늘 꽃피우고 내일 열매 맺으리.
봄비 촉촉이 내리는 날
텃밭의 이랑과 고랑 사이마다
당신은 하늘과 땅의 비가 되어
하늘에 땅을 적시고
땅에 하늘을 심어 놓았습니다
* '토지' 작가 故 박경리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이별은 언제나 슬픔을 남긴다. 또다시 만나는 기약이 있다 해도 지금의 이별이 슬픈 것은 언제나 부족한 사람의 모습일 게다.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문학의 지평을 마련했으며 터를 제대로 잡는 기둥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대하 소설 '토지'를 통하여 자화상적인 모습으로 '인생'을 묻고 또 물었으며 역사 속에 함께 걸어가는 큰 가슴을 서로 나누게 한 것이다. 작은 여자의 몸으로 큰 가슴을 키우며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슬픔'을 만난다. 너무도 외로웠을 한 여인의 삶을 엿보며 슬픔이 자국으로 남은 그리움의 글에서 자꾸 슬퍼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박경리 선생이 '현대문학' 2008년 4월호에 발표한 '옛날의 그 집'과 '어머니' 그리고 '까치집'을 살펴보면 더욱 애잔한 그리움을 만난다.
박경리 선생은 미리 운명을 예감하였을까. 선생은 어머니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발표 시에서 '어머니'의 시편은 더욱 그렇다. "고향 옛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꿈에서 깨면/아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라고 어머니 그리운 마음을 적었다. 그토록 박경리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사랑스러운 딸을 둔 한 어머니였다.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했던 성품은 생활에서 만나는 그 모습이었다. 후배 문인들이 선생을 찾아 토지문학관에 들르면 언제나 텃밭에서 당신이 손수 일구고 키운 푸성귀로 손수 밥상을 챙겨주셨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은 옛집 터에 마련된 토지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지내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향한단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 경남 통영의 '미륵산 기슭의 양지공원'에 잠들게 된단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두둥실거리고 초록 들판에 새싹들이 푸릇푸릇 오르는 오월. 하늘에서 내린 봄비로 촉촉이 젖은 땅에 한 사람으로 돌아갔다. 땅을 그토록 사랑하던 선생은 하늘처럼 높은 푸른 꿈과 하늘처럼 넓은 가슴의 희망을 안고 땅에서 살았다. 이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바람이 된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가셨지만, 그분의 뜨거운 혼불은 남아 우리의 가슴에 오래도록 타오를 것이다.
05/09/2008.......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