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어이타가

2007.10.28 04:03

성민희 조회 수:45 추천:2

드디어 남편 회사 컨퍼런스(Conference) 가는 날이다. 올해는 플로리다 반도 동쪽 잭슨빌 (Jacksonville)에서 약 40분간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조그만 섬, 아멜리아 아일랜드 (Amelia Island)라고 했다. 해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지리에는 별 흥미가 없었는데, 올해는 지구본 어디에 붙어있는지 한번 살펴보고 가리라 하고 플로리다를 쭉 훓어보았다. 폴트 마이어스(Fort Myers), 탬파(Tampa), 폴트라우더데일(Fort Lauderdale). 눈에 익은 지명이라 생각해보니 푸에토리코(Puerto Rico), 바하마 섬( Bahamas Island), 낫소(Nassau), 등을 갈 때 거쳤던 비행장인 것 같다. 헌데 얼마나 무심한 여행을 했었던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이 정도 증상이라면 누가 여행지를 그곳으로 정해도 호기심을 풀풀 날리며 따라 나설 것 같으니, 나이가 더 들어 기억이 가물거리기 전에 옛날 사진과 팜플렛들을 정리해봐야겠다. 그렇쟎아도 며칠 전, 음악을 들으려고 CD를 고르다가 제각각 이름을 달고 줄지어 서있는 생일잔치, 졸업식, 크리스마스 파티, 그리고 여행 비디오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이들이 모두 결혼과 함께 떠나가 버린 즈음이면, 가끔 외로움이란 말이 내 안 깊은 곳에 묵직이 고여 있다가 부피를 견디지 못해 꾸역꾸역 치받고 올라올 때가 있겠지. 그 적막한 시간에 방 안 가득 옛날들을 펼쳐두고 추억할 거리들을 미리 손질해두어야겠다고. 졸음을 커피 한 잔으로 쫒고 있는데, 밤 12시 40분에 탄다던 어메리칸 에어(American Air)가 연착이란다. 한 밤중인데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사람들은 들고 있던 가방과 함께 긴장도 내려놓는다. 대합실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바닥으로 길게 다리를 뻗대고 누워 있는 사람, 팔걸이에 얼굴을 옆으로 묻고 엎드린 사람,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사람 등, 기다림에 지친 칙칙한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번쩍 우리의 졸음을 깨웠다. 돌아보니 세 명의 한국 남녀 대학생들이 바닥에 퍼질고 앉아 고스톱을 치고 있는데, 얼마나 신이 났는지 웃통도 다 벗어던지고 얼굴들도 벌鍛? 한국 사람이箚煮? 그들 일행과 우리 부부 뿐인데, 대합실이 다 울리도록 왁왁 대고 웃으며 점수를, 그것도 한국말로 따지고 있는 그 즐거움이 부끄럽다. 유학생들인 듯한데. 미국의 사려 깊은 공중 도덕심도 함께 배워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다. 늦게 출발한 비행기 덕에 달라스(Dallas) 공항은 갈아탈 비행기 시간을 겨우 30분 남겨놓고 도착 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조금 쉬었다가도 잭슨빌(Jacksonville) 행을 충분히 탈수 있는데, 이렇게 늦었으니 터미널을 잘못 헤매다간 큰일이다 싶다. 기내 방송에서 다음 행선지로 갈 수 있는 터미널 번호를 불러주는데 한 두 곳이 아니다. 이곳이 그렇게 많은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경유지인지 놀라왔다. 한참 만에 불려진 우리의 목적지는 C35. 내리자마자 안내 팻말을 따라 C1을 거쳐서 C2, 3 한참을 뛰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 언제 35가 나올지 한심해졌다. 앞 뒤 볼 것 없이 마구 뛴다 해도 다음 비행기를 맞춰서 탈 자신이 없다. 적막한 새벽의 공항 복도를 두 아시안 중년 부부 가 눈치도 체면도 없이 육중한 몸무게를 쿵쿵거리며 뛴다. 밤새 시달린 꾀죄죄한 남편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휘날리는 나를 재촉한다. 길 찾으랴 마누라 놓칠까 불러대랴 가방은 또 얼마나 무거울까. -정말 남자들은 불쌍해. 부지런히 뛰어 가다보니 12-27까지, 28-32까지 그룹별로 가는 방향이 전혀 틀려진다. 이럴 때는 머리가 빨리 돌아 눈으로 보는 동시에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함께 그려져야 한다. 우리 번호를 찾아 달려가니 화살표가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바깥 땅으로 나가서 트랩을 올라가서 타는 줄은 아는데, 이층으로 가면 어떻게 되나? 우리가 지금 Guest lounge로 잘못 가고 있나? 그러나 달리 어찌해 볼 재간이 없다. 가라는 대로 갈 수 밖에는. 부지런히 올라가 보니 Skylink Train이라는 실내 기차가 다니고 있다. 비행기는 고사하고 난데없이 공항 청사 2층에 웬 기차? 갈수록 태산이다. 가슴조차도 두근거리는데 행선지 별로 기차 타는 역도 몇 군데나 되니 숨까지 꽉꽉 막힌다. 겨우 우리 역을 찾아 타보니, 공중에서 돌며 전체를 보여주기도 하고 테마별 장소 이동도 쉽게 하게 해주던 디즈니랜드 열차가 생각난다. 2분쯤 갔을까? 내려서 화살표를 따라 가니 도로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란다. 미로 찾기인가? 인제는 아찔아찔 스릴마저 느껴진다. 헐떡대며 따라 가보니 너무나 멀리 있을 걸로 생각한 C35가 바로 나타났다. 성공! 성공!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우리를 여자 승무원 둘이서 화들짝 눈을 뜨며 손뼉을 치며 반가워한다. 문이 닫히기 바쁘게 이륙을 하고 우리는 머리까지 올라온 심장을 갈아 앉히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공항이 얼마나 크기에 실내 기차로 이동을 시킬까 싶어 창 밖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구름다리 같은 것이 2층 건물 터미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있고, 그 다리 위로 기차가 다니고 있다. 공설 운동장 같은 2개의 지붕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기차를 타지 않고는 터미널 간 도보 이동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세계로 날리는 국제공항다웠다.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곳은 처음이었다. "리조트로 가는 비행기라 수준이 확실히 틀리네." 남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사람들이 깨끗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비행기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3시간을 달려 플로리다로 가는데, 미시시피 강을 따라 간다고 했다. 졸리는 눈을 비비며 내다보니 뿌옇게 밝아지는 하늘 아래 희미하게 강줄기가 보인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강이라고 하지, 아마 땅에서 바라보면 바다라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통 강 주위로는 나무나 풀이 자라서 초록이 아름다운데 그렇지가 않다. (강 주위가 그렇게 삭막할 수가 있는지, 어두워서 잘못 본 것인지 지금도 의심이 되는 부분이다.) 주위가 누런 색깔뿐 사막의 메마름이 조금도 적셔지지 않았다. 저렇게 풍성히 가졌으면 주위에 나누어줄 수도 있으련만. 암만 사막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강은 강다워야지. 얼마나 바쁘기에 곁눈 한 번 주지 않고 저리도 흐르는가. 꽁꽁 끌어안았지만 바다에 닿으면 산산이 흩어져버릴걸. 줄 수 있을 때 나누어 주어 풀도 살리고 꽃도 살리고 개미도 살리고 풍뎅이도 살리고 하지. 말라가는 주위 덕에 자신조차도 푸르름으로 치장하지 못하는 딱한 강을 내려다보며 내 속에 있는 욕심과 무관심도 함께 들여다본다. 도착하니 본사 직원이 팻말을 들고 서있다. 많이 기다렸나본데 우리 외에도 서너 쌍의 부부가 있어서 부담이 조금 덜하다. 머리에 멋지게 웨이브를 준 금발 미녀 직원이 40분만 달리면 된다며 상냥하게 웃으며 리무진 문을 닫아준다. 이름이 죠(Joe)라는 마음 좋게 생긴 기사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휘파람을 휙휙 날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차 창 밖으로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이 빽빽하게 뻗어있는 나무들이 하얀 구름을 이고 앉?있는 모습이 맛灌? 키우는 나무들인지 자연스레 형성된 숲인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차가운 얼음물에 담궜 다 꺼내 놓은 듯 푸들푸들 살아서 하늘로 올라갈 것 같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러간 남편이 돌아왔다. 2시간 뒤에 다시 하기로 했단다. 눈이 둥그레진 내게 묻는다. "더블베드 ?개로 하면 지금 들어갈 수 있는데, 킹사이즈 베드 방은 두 시간 후에 준비 된단다. 우짜꼬?" 옛날에는 싱글 침대두 개든, 벽이 앞을 꽉 막은 구석방이든 운명인줄 알고 묵었는데, 인제는 우리도 약을 대로 약아졌다. "당연히 킹사이즈 방이지. 그리고 바다 경치로 앞이 확 트인 곳으로 달라고 해요오~" Hospitality 홀에는 접수 받는 한 켠에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뷔페로 준비되어 있다. 샌드위치를 들고 정원으로 나가니 탁 트인 하늘이 바다를 가득 안고 출렁이며 잠도 못 자고 달려온 우리들의 고생을 흔적 없이 날려 보내준다. 잘 손질된 흙더미 위로 키 작은 향나무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앙징맞게 서 있고, 빨강 노랑 손바닥만한 꽃들이 땅 가까이 몽글몽글 뭉쳐서 파란 잔디를 더욱 파랗게 꾸며주고 있으니 내 마음에도 이쁜 꽃들이 막 피어난다. 인제부터 며칠간 마음과 몸을 모두 펼쳐 놓고 포실포실 말려야지? 방은 823호. 원하는대로 180도로 펼쳐진 바다 경치에,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우리들의 천국이다. 발코니에 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아까 버스를 타고 오며 만났던 숲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또 다른 초록의 바다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Ballroom으로 내려가니 가슴에 명찰을 단 사람들이 한 둘씩 모여드는데 낯선 사람들이 많다. 올해는 두 회사가 합병되는 바람에 간부들의 얼굴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사진사도 우리들이 별명을 불러주던 Mr. Flash가 아니고 깍쟁이처럼 생긴 백인이니.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고 서있기가 몹시 쑥스럽고 거북하다. 실내 장식 주제는 무엇인지 테이블마다 Center Piece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투명한 큰 화병에 당근이나 오이, 양배추들이 물속에 잠겨 말간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고, 그 위로 갖가지 꽃과 야채들이 특유의 모양으로 조화를 이뤄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디자이너가 보통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꽃병 사이사이에 피워둔 촛불들도 특이한게 구경만 해도 배가 부르다. 여러 곳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냄새가 맛있는데, 와서 먹으라는 손짓이 없으니 배고픈 남자들이 고깃간(?) 앞에 접시를 들고 서서 껄떡거린다. 한 젓가락 먹을 수 없냐고 애교를 떠니 순하디 순한 멕시칸 요리사가 큰 손으로 한웅큼 덜어서 접시에 담아준다. 멀쩡한 신사들이 고깃덩이 하나를 받고는 머리를 굽실대며 입이 함지박만해져서 돌아 나오는데 영락없는 개구장이들이다. 그렇게 얻어온 고기를 낄낄대며 먹는 맛이 더 좋으니 나이만 먹었지 마음은 20살인 것 같아. 섬이라서 그런지 차려진 음식들이 거의 다 해물들인데 부산이 고향인 나도 여태껏 몰랐던 놀라운 발견을 했다. 바비큐 굴을 접시에 담아오는데 뒤집어서 얹어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아래위로 뚜껑이 있어서 조개 열듯 중간에 나이프를 끼워서 벌려야한다. 여태껏 굴은 두껍고 탁한 껍질에 알맹이가 앉아 있어서 전복처럼 바위에 붙어사는 줄 알았었는데---. 내가 신기해하니까 모두들 그것도 몰랐냐며 무식한 사람 취급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걸 이제 알았으니 무식하긴 하다. 오늘도 역시 뷔페 한 곁 제일 좋은 장소에 스시가 버티고 있다. 무늬만 스시지 미국 주방장이 만든 것이라 밥도 냉장고에서 나온 것처럼 딱딱하고 작은 생선 조각이 덮어져(발라져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있는데, 그나마도 싱싱하지도 않다. 그래도 격식은 갖춘다고 겨자에 간장과 젓가락은 꼭 곁에 둔다. 사람들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뒤틀리는 젓가락 따라 입까지 씰룩대면서도 얼굴이 환하다. 맛으로 먹는지 멋으로 먹는지 하여튼 많이들도 갖다 먹는다. 스시는 김밥에 비하면 훨씬 맛이 못한데도 이렇게 대접을 받고, 김밥을 설명할 때도 '코리언 스시' 하며 들먹여야 이해를 하니 어떨 땐 질투가 난다. 좋은 물건을 암만 만들어도 홍보 능력이 없으면 빛을 못 보듯, 나라 고유 음식도 상품 못지않게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계속적인 홍보가 필요하지 싶다. 돌아보면 뭐든 일본에 뒤지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할 때가 많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의 건강 전문지 '헬스'가 스페인의 올리브유, 일본의 낫토, 인도의 렌틸 콩, 그리스의 요구르트와 함께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김치를 뽑아 주었다는거다. 거기다 요즘은 또 순두부가 건강뿐 아니라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꼽혀 순두부 전문 식당 손님의 20% 정도는 외국 사람들이라니, 영화나 드라마, 노래로 일으켜진 한류 열풍에 음식까지 가세해줄까 기대가 된다. 그때에는 이런 뷔페에 갈비 뿐 아니라 김밥과 만두?잡채가 그득히 담겨져 나와 음식 이름 가르쳐주느라고 으시댈 수 있겠? 생각만 巒?신난다. 미? 사람들한테 우리가 발음 교정을 해줄 수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네 입맛이겠지만, 피곤한 나는 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해도 먹고 싶은 게 없어, 올리브유에 소금과 컬蔘?넣어 볶은 가지나물(?)과 해물 수프, 껍질 채 구운 굴로 배를 채웠다. 痼括繭?마가리타?이 사람 저 사람이 반갑다며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더니 얼큰하니 취한다. 파도 소리도 좋고, 음악 소리도 좋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조차 좋아지는 취기다. 와인 한잔을 들고 모래사장을 걸으니 해운대의 부서지는 파도 아래 보드라운 줄무늬를 그리던 모래톱이 생각난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난데없이 흥얼거려지는 노래. 마산 앞바다 합포만(合浦灣)을 그리워하며 쓴 시(詩)를 75년이 지난 지금 대서양을 바라보며 부르고 있다. 그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저토록 고향이 멀고 그리웠을까. 사람들은 쟌 덴버의 'Take Me Home'을 어깨동무하며 불러대는데 우리는 같이 부를 노래도 없고 손잡고 흥겨울 친구도 없다. 반갑다며 볼을 맞대고 정다워해도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우리.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를 부르던 우리가 'Itsy bitsy spider climbing up the spout'를 부르며 자란 사람들이랑 취흥을 나누려는 욕심이 무리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가고파’를 부르니 술주정 치고는 좀 고상하지 않나 싶다. 정신도 엔간히 맑아지고 밤은 깊었고. 방에 들어와 늘어져서 자고 있는데 누가 똑똑 두드린다. 벌떡 놀라 나가 보니 메이드 아줌마가 빨간 장미 한 송이와 금박으로 장식된 쵸콜렛 상자를 디밀며 인사를 한다. "침대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정리해줄까?" 곤히 자는 사람 깨워서 잘 자라 인사하는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