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지나가는 병

2007.11.01 11:10

성민희 조회 수:54 추천:1

-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는 간병인의 자세를 - 멸치를 푹푹 삶은 담백한 국물에 김치 송송 썰어 얹은 잔치 국수만 보면 너무나 신나하는 남편. 이 번 주말에도 한 남자의 행복(?)을 위해 어김 없이 잔치 국수를 만들었다. 근데 오늘은 영 맛이 나지 않는다. "국물 맛이 왜 이렇지?" 맥 빠져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깔깔 웃었다. "들켰구나. 다시 멸치가 없어서 볶음 멸치로 국물을 내었거던." "에이 참, 볶음 멸치더러 국물 맛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해?" 정말 그랬다. 국물을 낼 수 없는 멸치인줄 뻔히 알면서 물에 집어놓고 훌렁훌렁 저었으니 멸치가 나를 보고 얼마나 한심해 했을까. "아줌마, 나는 볶음 멸치라오. 아무리 애써도 국물이 안나요." 능력이 없는 멸치를 보고 억지를 부리는 지금이나, 한창 사춘기를 앓고 있는 아들에게 모범생이 되 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닥달하던 내 모습이 너무나 똑 같아 나는 혼자 픽 웃었다. 그때는 정말 세월이 느리고 칙칙 했었다. (사근사근 재미있던 아들이 왜 벙어리가 되었을까. 깨끗 하던 아들의 방이 어쩌다 발 디딜 틈 없는 고물상이 되어버렸을까. 엄마가 최고라며 안겨 오던 아들 이 왜 나를 벌레 보듯 피할까. 내 말은 절대로, 절대로 안듣는걸까. 저 애가 이렇게 나를 괴럽힐 줄 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배신감과 미움으로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답답해 엄마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한숨을 섞 기도 했고 교육 전문가를 모시고 세미나도 많이 열었었다. 이리저리 돌며 얻은 깨달음은 '저 애는 환자다. 사춘기라는, 사람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가 다 앓고 지나가야하는 병을 앓 고 있는 환자.' 환자는 얼마나 불쌍한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거고, 열이 펄 펄 나고 관절이 쑤셔오는 사람보고 일어나서 청소하고 밥 하라고 하면? 당연히 할 수 없을터. 그래. 열심히 투병하고 있는 아들보고 정상 때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내가 잘못이다. 인제부터 간 병인의 자세로 아들의 투병을 도우자. 참자. 참자. 꾹 참자. 이 후로 남편과 나는 화가 날 때 마다 서로 눈을 깜빡이며 "환자인데 잘 모시자."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잘 했던 것 같다. 서로 부딪히다가 부러지고 상처 받다 아주 나쁜 길로 가 버린 아이들도 있고, 아직도 부모들과 화해를 못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요새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시간은 반드시 흘러가고 거기에 실려서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도 끝이 난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가슴 을 앓고 있을 엄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사춘기는 절대 못 고치는 불치의 병도 아니고 영원 히 계속되는 지병도 아니다. 시간과 사랑이 완치 시켜주는 아주아주 순진하고 착한 병이니 기다리 라는 말도 하고 싶고, 같은 수준이 되어 싸워서 아이들에게 상처로 남을 일 만들지 말라는 말도 하 고 싶다. 아이들이 듣든 말든 좋은 말을 자꾸만 해주다보면, 콩나물 사이로 물이 다 빠져나가 버렸 는데도 어느 날 콩나물이 자라있듯, 아이들의 마음 밭에 뿌려진 엄마의 가르침이 싹을 틔우고 있는 걸 보게 될거라는 희망도 주고 싶다.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 끈끈한 사랑을 쌓을 소중한 시기를 다 놓쳐버리고, 대학 보내놓고 시시때때 뒤돌아 보며 후회하는 엄마는 결코 되지 말라는 말도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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