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는 축복
2007.12.13 10:36
늦은 밤, 창가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좋은 친구와 마주앉아 따끈한 차 한 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얼굴이 한사람씩 떠올랐다.
느지막이 목사가 된 Y가 생각났다. 서울 산동네에서 자그마한 개척 교회를 일구고 있는 친구. 발그레한 그의 얼굴과 함께 내 풋풋했던 시절이 함께 스쳐지나갔다.
대학에 합격하여 짐을 싸들고 서울에 올라가던 날. 날씨는 또 왜 그리 추웠던지.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는 당시 대학에 다니던 그 친구의 자취방에서 며칠만 머물기로 했다. 막상 가보니 둘이서 돌아눕기도 힘든 작은 방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겨우 일거리는 구했지만 먹고 자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훌쩍 두 달이 지났다. 친구는 걱정 말고 함께 지내자고 하지만 그의 어려운 사정을 빤히 아는 내가 그럴 수는 없었다. 해가 뉘엿하면 이 넓은 서울에 작은 몸 하나 편히 누일 수 있는 방 한 칸이 없다는 생각에 쓸쓸함이 몰려오곤 했다. 저녁 늦게 터벅터벅 산꼭대기 자취집에 도착하면 친구는 아랫목에 묻어 두었던 밥을 차려 내왔다. 어느 날 마침 버스표가 떨어져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온 일이 있었는데, 그 후 본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에 버스표나 용돈을 나 몰래 주머니에 넣어두곤 했다.
친구도 나도 학교를 졸업했다. 작년에 한국에 나간 김에 친구를 찾아갔다. 막 시작하는 교회라 신자가 많지 않았다. 밤새도록 정담을 나누고 떠나오면서, 옛날 용돈을 넣어주었던 얘기를 하며 작은 돈이나마 전해주었다. 나도 친구도 환하게 웃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전신줄을 스치는 바람이 쇠 소리를 낸다. 낙엽이 지면 추워질 것이다. 춥고 바람 부는 날, 따뜻한 손을 내밀어 눈보라치는 세상을 함께 헤쳐가자 할 친구가 누구일까.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라는 글을 보았다. “당신은 곤경에 처했을 때 부르면 당장 올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언제라도 불쑥 찾을 수 있는 친구, 함께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친구, 당신이 어려울 때 선뜻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이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관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내 삶의 고비고비에서 도와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20년 넘게 한국학교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들,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 곁에 있어주었던 얼굴들. 그들이 있어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고 푸른 하늘을 함께 나는 사람이다. 좋은 친구사이에는 늘 상승효과가 있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받은 것은 많은데 준 것이 너무 적다. 외로운 친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건넨 적은 있는가. 배고픈 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적이 있는가.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고 살아오진 않았는가. 지난날을 반성해본다.
밤이 깊어지자 빗줄기도 굵어진다. 늦은 밤이지만, 전화 한 통화면 틀림없이 달려와 줄 친구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한 없이 포근하고 행복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거칠게 뒤 흔들고 있다. <11/14/07년 중앙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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