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여행하는 법

2012.08.11 03:11

김학천 조회 수:1

  실로 오랜만에 한국으로의 여행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행기는 내게 변하지 않는 신선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을 준다. 그날도 상기된 마음에 미리 좌석을 찾아 짐을 정리하고 앉아 이런 저런 기내 잡지를 보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얼굴에 쿡 와 닿는 느낌이 있어 얼굴을 돌리려 보니 웬 남자의 엉덩이였다. 국외선 비행기는 대개 복도를 양 옆으로 해서 좌우 창문 쪽 의자들과 가운데 의자들로 배치되어있는 구조이다.
   내가 앉은 자리는 오른 쪽 창문 쪽의 복도 측이었는데 아마도 지금 남의 얼굴에 민망한 부분을 비벼대는 실례를 하면서도 무감각한 양반은 복도건너 내 옆과 나란한 자리였는데 무얼 뒤척이는지 허리를 숙이고 의자위에 놓인 물건과 열심히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몸을 비켜 한참을 있고서야 일이 끝났는지 제 자리에 앉는데 둔한건지 무례한 건지 전혀 모르는 체다.
   남에게 실례를 범하고도 아무 사과 한마디 없이 천연덕스럽다 못해 뻔뻔하다 싶었는데 이것은 약과였다. 조금 있더니 구두를 벗고 양말까지 벗고는 앞의 벽에 발을 꼬아 올려 기대는 광경에 그저 난 말문을 잃었다. 아직 몇몇 늦은 승객들이 들어오는 중이었고 승무원들도 지나다니며 얼굴을 붉히고 불쾌해하면서도 내색을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안하무인이고 후안무치인가.
   잠시 후 여객기가 이륙을 하기 위해 승무원이 다가와 발을 내리고 벨트를 매고 좌정할 것을 요구해서 고쳐지는 듯 했다. 허나 이륙을 하고 나서 얼마 후 경보가 해제되자 그는 다시 발을 하늘 높이 올려 벽에 걸쳐놓고 의자를 뒤로 벌렁 눕히고 기대 누워서는 주위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역시 예의 없는 그답게 큰소리로 여기 저기 동료를 불러가며 떠드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외과 계열의 의사였다. 아마도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오는 길이었나 보았다.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소위 학식이 높고 사회 지도층의 인사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거늘 중간은 못할망정 저렇다니. 저런 이가 흰 가운을 입고 진료를 한다? 환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나 수술실의 분위기가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헌데 불쾌한 것은 잠시, 오히려 나를 정말로 웃기게 한 것은 우연히 눈에 띈 그가 좌석 앞 바닥에 놓은 가방에서 빠끔히 삐져나온 책 때문이었다.
‘우아하게 여행하는 법’이란 제목의 책.
  갑자기 오래 전 읽은 어느 식인종 부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선교사가 어느 밀림의 식인종 부족에 가서 붙잡혔다가 살아나 그들과 지내며 문명을 일깨워 주었다. 그 중에 식탁예법으로 맨손이 아닌 포크와 나이프 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단다.
   그 후 선교사는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가 얼마가 지난 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어 이제는 어느 정도 문명인의 흉내를 내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놀랍게도 제법 냅킨도 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다. 허나 그것은 잠시, 경악할 일이 벌어진 것은 식탁에 나온 음식은 아직도 사람고기였더란다.
   겉만 문명인 흉내를 낼 뿐 속은 아직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모습에 그 외과의가 내 머리 속에 오버랩 되었다.
어디 그 한사람뿐일까? 씁쓸한 여행의 시작이었다.(미주중앙일보 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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