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하는 것으로

2008.04.20 04:35

배희경 조회 수:0


             거부하는 것으로                                   2007년

   눈을 떴다. 눈을 떠야 된다는 자체가 버겁다. 눈을 뜨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은 벌써 윤전기 같이 돌고 있다. 깨어서 일어나자마자 신경을 쓴다는 것이 오늘은 왜 이다지도 싫을까. 여간해서는 없는 증상이다. 나 자신을 관찰한다. 이런 침체된 상태가 지속되면 어찌 될까. 또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때 생각이 나는 곳이 있었다. 바다다. 바다에 가 보자. 바닷물에 돌 같은 내 마음을 띄어보자.
   나는 바삐 옷을 주어 입고, 사과를 깎아 내 손에 쥐어주는 식구의 친절을 어설피 받으며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그녀를 바다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바다 바람을 쏘일 때쯤 된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다 틀어졌다. 나 자신부터 치유가 필요했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이주 전 만해도 서슬이 퍼랬던 바다다. 오늘은 길들인 짐승이다. 느슨한 파도에 두 써훠(surfer)가 목에 감긴다. 파도는 그들을 보듬다가 해변에 털어놓는다. 놓여난 그들은 하얀 물거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또 가서 매달린다. 놓여나고 매달리고 하며 사는 우리네 인간사와 같다. 이렇게 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되풀이 속의 삶이 여기에도 있다. 짜증스럽고 권태롭다. 이런 인간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내 마음속의 독인가.
   수평선을 보고 있다. 간밤에 본 아카데미상 시상식 광경이 떠오른다. 인간 세상의 온갖 영예와 성취를 얻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온 세계 사람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큰 흥미로 지켜보고 있다. 카메라는 장내의 한 끝에서 또한 끝까지 비쳤다. 콩나물시루 속이다. 빽빽이 앉아 있다. 가까이서 보고 듣던 멋들어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은 콩나물에 불과했다.  백년 후, 저들 중 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겠다는 것은 뼈 속까지 써늘해 지는 일이었다.

   또 하늘과 바다와 수평선을 본다. 백년도 못 사는 우리 인간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왜 이리도 많을까. 시루 속 콩나물 하나 하나가 다 나름대로의 욕망을 가졌다. 사람이니까 그렇고, 또 그렇게 되어야 되겠지. 그러나 그러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세기의 제언자 “쏠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정신적인 만족은 무엇인가 내 손에 넣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그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얻는다고. 실천이 불가능한 멋있는 말이다. 
자제가 자신에게 평화를 가져온다는, 우리에게 던지는 은유다.
   오늘 아침과 같은 권태증세는 인간사에 매인 자폐 현상일까. 자기 욕망을 자제 못한 데서 오는 세상 기피증일까. 나는 다시 옛날의 나, 땅 만 보고 살아온 나로 되돌아가고 싶다. 가장 친했던 내 친구는 공작같이 멋들어지게 살았고, 나는 베짱이 빈털터리로 살았다. 그러나 노래하며 살았다. 그녀같이 되어 보자는 욕심을 가져본 일도 꿈 꿔 본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같이 지내도 마음이 불편 해 보지 않았고, 위축이 된 적은 더 더욱 없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 졌다. 물질적인 문제를 초월했더니 이제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구나.

    시시콜콜한 바램들이 나를 괴롭힌다. 바르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말을 자식들에게서 듣고 싶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 되면 좋겠다. 궂은 일이 생겼을 때 진정한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을 아름답게 써서 생을 곱게 마감하고 싶다. 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ㅡ. 오래 앓다 죽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심장마비나 차 사고로 식구도 못 보고 죽지 않겠다. 관 뚜껑은 덮어라. 남편의 얼굴은 장의사의 화장술로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끝없이 자문자답하는 내 집착이다. 버려야지,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무엇이나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자.

   써퍼는 온데간데 없고, 파도는 여전히 바다 모래를 쓸어가고 쓸어 보내고 있다. 사람은 가고 없지만 바다는 살아서 움직이고... 그렇게 우주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돌고 있는 중이다. 그런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뭣이 중요할 것인가. 다 중요하지만 또 아니다. 아닌 것이 낫다.
  긴 날 하루를 바닷가에서 보내며 생각한다. 양심을 나로 알고 기쁘게 살아가는 길밖에 없겠다. 욕심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러면 편해지겠지 한다. 약간은 바다에서 치유 받은 자신을 감지하며 이제 다 털고 집으로 가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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