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ㅡ고원교수님 영전에ㅡ                                      

   고원교수님의 추모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남들이 말하는 추모 글과 다를 것이 틀림없기에 선뜻 붓을 들지 못했다. 우선 그분의 시에 대해 써야 하겠지만 나는 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안다면 이 시는 좋다, 이 시는 그저 그렇다 할 정도의 안목밖에 없는 나다. 또 철학에 있어서도 같다. 많은 말씀 중 그분의 철학을 이렇다고 규정짓기가 곤란했다. 또 종교관은? 그것은 종교가 없는 나에게 더욱 파고들기 힘든 영역이다.
   그래서 그분의 추모 글을 어떻게 또 무엇을 써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글 한자 올리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꼭 학문만을 기준할 것이 아니다. 나를 먼저 놓고 그분의 일을 적어 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글마루에 발을 들여놓았던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을 빼곤 누구를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었겠는가. 한 달에 네 번 (후엔 두 번이 되었지만) 이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다니며 공부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집 아래에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이젠 학교에 안 가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다. 유치원 때부터 학교를 싫어했던 나는 종일이라도 엄마 옆에서 맴돌며 놀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선 중학교에 들어갈 입시공부에 시달렸고, 중학교에선 대학에 가야하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대학교도 그런 저런 수료하고 취직하고 있을 때 6.25가 터졌고 전쟁 중 시집도 갔다. 그 때까지 내가 한 공부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했다 하면 되었다.

   그런 중 자식들도 성장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글 쓰는 일이다. 글마루 교실에 적을 두게 된 동기가 거기에 있었고, 교수님을 만났다. 내 갈망에 의해 있는 교실에서 내 길로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으니 기쁨으로 열심히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처음에 쓴 글 중에 “이름을 찾은 기쁨이” 있다. 그 글은 일제강점 시대 일본이름으로 시작해서 누구의 부인,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로 변천하는 한국 여자의 운명 같은 과정의 글이었다. 미국이름을 달고 광대같이 살았던 망령을 버리고, 글마루 지원 원서에 부모가 달아준 내 이름, 배희경으로 적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반 세기 만에 찾은 이름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서 있는 나를 보았던 감격에서 내 글마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름을 찾은 기쁨이 교수님이 발간하는 "문학세계"에 추천되었을 때 나는 내가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던가를 처음으로 알았다. 교수님은 학생의 문단 입문을 학구애에 중점을 두었다. 그분은 능력보담도 글에 대한 갈망과 의욕을 더 중요시 한 분이다. 얼마나 갈고 닦아야 하는 연마의 광장에 훌렁 넘게 해 주신 것에 나는 항상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문단의 귓전이나 기웃거려 보았겠는가. 빨리 발자국을 띠어놓게 해 줌으로서 막막한 글 쓰는 이의 앞길을 터 주신 분!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는 규율을 깨셨다.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 보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무슨 경로로 등단했는가 하는 것이 문인의 긍지라면 이 분은 자기 간행물의 질의 높낮음을 생각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힘을 얹어주셨다. 이것은 그분이 제자를 양성하는 제자 포옹의 기본자세였다. 당신보다 제자를 위하는 마음, 권위주의를 허무는 혁명을 하신 분이다. 이 글을 저 세상에서 보신다면 너 무슨 소리 하는가 고 역정을 내실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참 전 일이다. 시상식이 있으니 꼭 참석하라는 교수님의 분부였다. 가서 좀 의아했다. 이름도 생소하고 상 타는 분도 잘 알지 못하는 분이었지만 축하 분의기는 어느 시상식에 못지않았다. 모두 이런저런 상을 만들어 문인들의 사기를 붓 돋아주는 그런 행사였다. 누구의 발상으로 이루어진 상인지는 모르지만, 교수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도와주셨다. 그날도 축사를 해 주셨지만, 모든 행사에 참석하시며 일일이 축사 하시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크고 작은 행사에 관여, 축사하신 것을 치면, 주에 한번, 연 54주 40년이면 (문단에 진출하신 역사는 50여 년이지만) 세상 뜨실 때 까지 2160번을 축사하신 셈이 된다.

    1998년에 교수님은 장암 수술을 받으셨다. 가르치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남달라서 이때도 회복기간 약간을 빼곤 곧 강의를 강행하셨다. 차에서 발을 내디딜 힘조차 없어 학생에게 안겨  내리셨으면서 교실 안에 들어서실 때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당당히 걸어서 들어오신 분이다. 강인한 의지와 흩으러 짐이 없는 자세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그분의 돋보임의 하나였다. 그런 때 까지도 제시간에 강의를 끝내지 않으셨던 분, 시간이 넘었다고 독촉을 해도 강의를 중도에서 접는 법이 없으셨던 그분은 진정으로 교육열에 넘쳤던 우리들의 스승이었다.
  
   그 중에 그분에겐 혼자만이 아파야 했던 참회가 따랐다. 가끔 참회록을 쓰고 싶다는 말을 하셨을 때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참회 할 일이 한 둘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뒤에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분은 항상 그 참회를 지고 사셨다. 아버지날은 “뒷마당 나무 뒤에 숨어 하늘 구멍을 뚫고 우는 날이다” 고 한 시는 언제까지고 묻어버리지 못하고 사신 아픔이 보여 가슴이 메었다.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사모님께 올린 글이 있다.  
<..........비와 추위를 마다하고 참석하셨던 많은 조객과, 마지막 하관식에 비가 멈춰 준 것으로도 다 교수님의 후덕으로 알고 기뻤습니다.
   이제 혼자 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이 많이 힘드시겠지만 굳건히 살아가시는 것으로, 그분이 온 전력으로 가족을 아끼셨던 보답을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의 끝날 까지 몸이 분쇄되는 줄도 모르고 가족을 위해 당신을 불 사르셨던 사랑이 가상합니다. 모든 글, 시와 수상도 다 당신 가족을 위해 쓰신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사랑과 그리움과 회개에서 오는 깊은 사색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분을 가까이서 십년 남아 모셨던 사람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그분의 사상도 신에 대한 성찰도 아닙니다. 의분에 넘치는 정렬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과거 현재 사회상을 의분으로 토하며 정의에 불타 있었고, 하나님을 확실히 바라볼수록 그것을 믿는 분들의 편협함을 비판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당신의 정판대로 정의롭게 사시려 한 분이셨습니다.
   한국 문학 발전을 위한 정열은 또 어떠했습니까. 교수님의 업적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이제 사모님이 그분을 위해 하실 일이 있다면 기쁘게 사시는 일입니다.........>

   나는 교수님이 가르치신 중, 딱 하나 싫어한 과목이 있었다. 신화에 대한 강의였다. 너무 허무맹낭한 이야기들이어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글인데 그 분은 아주 신이 났었다. 어렵게 발음되는 이름은 진지하게 수정해 가며 다음 읽기를 독촉하셨다. 그래서 생각했다. 신화 같은 상상력을 가지셨으니 그것이 저렇게도 재미있고, 시를 쓰실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나는 내 무딤을 다락에 얹어놓고 교수님을 웃기도 했다.
    그런 그분은 시인으로서의 긍지가 하늘을 찔렀다. 시인은 “詩” 글자 그대로 왼쪽에 말씀 ‘言’자와 오른쪽에 절 ‘寺’자가 있다. 즉 절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다. 수필가 화가 사업가 정치가는 ‘家’가 붙지만 詩人만은 사람 ‘人’인자가 붙어 존중을 받아 왔다. 그것이 시인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눈은 광채로 빛나있었고 평생 시인임을 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미국문단에 시인이 많은 것도 그분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 그분은 상상을 넘는 기억력을 가지셨다. 그 긴 세월 동안의 많은 사람들의 이름부터, 같이 했던 일들, 그리고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시는지 입을 딱 벌리고 듣곤 했다.
   박식함은 어떠했는가. 대단한 노력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식은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 현재에 이르는 문학 이론과 사조, 역사와 사상의 변천, 그 비교 등 다양한 강의를 펼치셨다. 나 같은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긴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분이 베푼 지식을 얼마라도 터득했다면 아마 강의 한 귀퉁이 쯤 맡을 지식은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분이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남의 작품을 본인보다 더 한 해석을 하시는 일이다. 꿈 보담 해명으로 그 해석이 작품보다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절을 하고 받고 싶도록 고맙기만 했다.

   이런 분을 어찌 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째서 예고도 없이 떠나셨단 말인가. 내가 낼 수필집에 글 한자 올려주지 않고 가셨다. 발버둥 치고 싶다. 얼마나 잘 써 주셨을까 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긴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 글이라도 그분에게 머리 덜 아프게 해 드렸다. 좋게 써 주시려고 고심 하셨을 것을 하시지 않고 보내드렸다. 되지 않았는가. 그러면 된 것이다. 눈물이 자꾸 흐른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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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1 UFO(견공시리즈 50) 이월란 2009.12.09 0
10500 토비의 창(견공시리즈 51) 이월란 2009.12.0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