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3>
2009.04.17 13:52
애경이가 언니에게 악을 쓰며 난장판을 벌이는 한 장면을 옮겨본다.
<<“언니야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없는 거 없이 다 있지만 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나 하나 죽으면 간단해. 울어줄 사람도 없어. 근데 나 혼자는 절대로 안 죽어. 왜 혼자 죽어 억울하게. 권총으로 다 쏴 죽이고 죽을 거야. 벌써 총도 사놓고 총알도 사놨어. 겁나지?”
동생은 완전히 미친 사람모양 악을 쓰고 울부짖으면서 엄지와 검지를 쫙 펴고 미경을 겨누며 총 쏘는 시늉을 했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섬뜩해 마주볼 수가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시야가 노오래지고 속이 메슥거렸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앞에 앉은 동생의 무서운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뭐 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오라 그래도 더러워서 안 와. 어디 보자. 얼마나 잘먹고 잘사나. 부모 유산 가로챈 거 얼마나 가나 두고볼 거야. 유산뿐만이 아냐. 언니는 내 모든 것을 뺏어갔다구. 난 언니 그늘에 가려서 빛도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 언니 그거 알아? 모르지? 언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엉 어어엉”
악을 쓰며 통곡을 하더니 동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의 집기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도자기와 조각품들을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니 쩽그렁 쩽그렁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미경을 향해 사기의 뾰족한 조각들이 튀고 있었다. 금세라도 뭐든지 집어들고 미경의 정수리를 내리칠 기세였다. 미경은 무섭고 떨려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을 도저히 말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데 소파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말이 그렇지 설마 네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니?
응접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다음, 동생은 식탁의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유리창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애경의 난동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응접실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두껍기 그지없는 유리문이 단번에 우장창 우장창하고 깨졌다. 순식간에 유리의 파편들이 이리 저리 튀기고 나르며 집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갑자기 딩동댕동하고 벨이 여러 번 요란스럽게 울렸다. 언젠가 한번 경찰을 부른 적이 있는 옆집 사람이 또 경찰을 부른 것이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들었는지 애경은 행동을 멈추고 그 능란한 화술로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연극배우 모양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경찰의 동정을 사기에 급급했다. 미경은 차마 동생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가 없었다.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애경을 위해서라도 경찰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남편이 누누이 말했지만 미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정 문제이니 경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목격한 경찰이 애경에게 수갑을 채울까봐 미경은 오히려 동생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동생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혈연 때문에 위선의 탈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은 알았다며 금세 돌아갔다.
미경은 한바탕 악몽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 동안 돈 관계로 인해 동생한테 시달려온 그녀는 부모의 유언장에 쓰인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었다. 항상 작은딸 때문에 속을 썩이던 부모는 애경이한테 큰돈을 물려주면 금세 다 탕진할 것 같아서였는지 큰딸인 미경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었다. 그들에겐 큰딸이 동생을 철저하게 잘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미경 역시 동생은 죽을 때까지 자기 책임이니 잘 돌봐야한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철없었던 한 때는 못난 동생이 그저 밉기만 하고 거추장스러웠으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이제 애경은 언니인 미경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이제 미경이가 평생을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미경은 계속 돈을 대주면서도 이렇게 시달려야 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애경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동생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니와 싸움을 하고 난 후에 애경은 늘 나를 찾아왔었다. 가슴 한쪽 구석엔 애경이도 이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잠재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나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녀를 내치지 못했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내가 없음 어쩌려고?”
“없으면 그냥 가면 되지.”
그녀의 대답은 항상 단순하고 간단했다.
애경은 자신의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색감과 혼란한 무늬들이 눈을 어지럽히는 차림새를 하고 와서 하소연을 했다. 내면의 상태와 외면의 상태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모양 난동을 부린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왜 언니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니? 어릴 때도 그랬어. 착하고 공부 잘하고 이쁘고, 어딜 가도 언니만 인기였어. 난 말야 언니가 내 눈앞에서 망해서 꼬꾸라지는 꼴을 보고 싶어. 부모 유산 몽땅 가로채 잘 사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친자매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애경은 언니에 대해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처음에는 깜짝깜짝 놀랐으나 차츰차츰 만성이 되어 나는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바른 말을 해주기도 했다.
“애경아. 언니가 유산 가로챈 거 아니잖아. 유언장에 쓰인 대로 했다며? 네가 지금 유산 반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려 그 돈을 받으면 뭐 할 건데? 언니가 매달 생활비는 꼬박꼬박 주고 있잖아. 너, 일도 안 하고 그 돈으로 여행 다니며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래?”
애경은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행은 생각조차 못 하는 내 앞에서 그녀는 어디어디를 다녀왔다면서 그곳의 풍경들을 늘어놓곤 했다. 한참동안 소식이 없을 때, 그녀는 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잘 사는 게 꼭 유산 때문만은 아니잖아.”
이민우는 운이 따랐다. 장인의 유산을 바탕으로 시작한 사업이 불을 붙듯 번창했다. 머리 좋은 그는 특수 글루를 발명하여 정부로부터 특허를 따, 세계 각국에까지 수출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신문에서도 대서특필을 했었다. 그때, 대문짝만 이민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듯이 눈앞이 캄캄했고, 심장이 덜컥거리며 비안개가 지면을 덮어버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이 그리 무사태평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얼굴은 항상 태평성대를 누리는 사람 같았다. 사진으로 보니 더 그랬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데도 그의 표정은 아주 온화했다. 사업가보다는 외국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
나는 머리를 몇 번 세차게 도리질을 하고 눈을 찔끈 감았다가 힘주어 뜨고는 ‘외형경쟁서 이기는 것보다 새로운 시장이 얻는 게 많아’라는 제목하에 그가 기자들과 인터뷰한 기사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었다. 경영면에 있어서도 그의 뛰어난 재능을 공포하는 글이라 생각됨과 동시에 인생의 경영철학도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나를 버리고 강미경을 택한.
그들이 결혼을 한 바로 직후였다.
“도대체 너는 뭐니? 천사야? 어떻게 너는 네 친구인 내 편을 안 들고 너의 원수인 언니 편을 드니?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뺏어갔는데도 아무치도 않아? 둘이서 지금 얼마나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살고 있는지 알아?”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산다는 말에는 갑자기 가슴이 싸아-- 했다. 가끔 애경은 언니를 향한 질투의 감정을 끓이다가 그 끝머리에 나를 갖다 붙였지만 내 문제에 개입하여 이민우나 강미경을 욕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배신을 당한 친구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에서건 나는 애경에게 내 맘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민우와 어찌 알게 되었냐고 그녀가 꼬치꼬치 캐물었을 때도 나는 자세한 얘기를 하기가 싫었다.
이민우, 그는 나의 아버지 회사에서 트럭 운전을 하는 기사의 아들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대전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 때문에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어느 날, 누가 요란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계속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엔 다분히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랑 일하는 아줌마가 마침 시장에 간 다음이라 나는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갔다. 아주 큰 키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는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A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사모님, 계셔?”
어머니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그는 땟뜸 반말을 했다. 그리고 턱을 쳐들고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뭔가 기분이 몹시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공손히 그를 대했다.
“지금 안 계신데요. 어디서 오셨어요?”
“나, 이강재 씨 아들이야. 사모님이 아침에 들르라고 해서 왔는데.”
나의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그 말투가 약간은 누그러진 것 같았으나 뻣뻣하긴 여전했다. 이강재 씨가 누굴 가리키는지를 몰라 주춤하는데 그는 내 맘을 읽은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니네 아버지 회사에 다니는 이강재 씨라고...”
그가 무슨 말인가를 더 계속하려 하는데 그때 마침 어머니가 아줌마와 같이 집엘 도착했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반가워했다.
“아이구 내가 한발 늦었네. 미안해요. 일단 들어가요.”
아랫사람에게 항상 친절하며 예의를 지키는 성품을 가진 어머니를 나는 존경하지만 아들 같은 사람한테 너무 쩔쩔매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A법대의 배지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다행하게도 어머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예의가 발랐다.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언뜻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A대에 입학을 하고부터는 학교에서 혹시라도 그와 우연히 마주칠 것 같아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법대 건물 앞에서 일부러 서성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를 만났다. <계속>
<<“언니야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없는 거 없이 다 있지만 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나 하나 죽으면 간단해. 울어줄 사람도 없어. 근데 나 혼자는 절대로 안 죽어. 왜 혼자 죽어 억울하게. 권총으로 다 쏴 죽이고 죽을 거야. 벌써 총도 사놓고 총알도 사놨어. 겁나지?”
동생은 완전히 미친 사람모양 악을 쓰고 울부짖으면서 엄지와 검지를 쫙 펴고 미경을 겨누며 총 쏘는 시늉을 했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섬뜩해 마주볼 수가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시야가 노오래지고 속이 메슥거렸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앞에 앉은 동생의 무서운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뭐 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오라 그래도 더러워서 안 와. 어디 보자. 얼마나 잘먹고 잘사나. 부모 유산 가로챈 거 얼마나 가나 두고볼 거야. 유산뿐만이 아냐. 언니는 내 모든 것을 뺏어갔다구. 난 언니 그늘에 가려서 빛도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 언니 그거 알아? 모르지? 언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엉 어어엉”
악을 쓰며 통곡을 하더니 동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의 집기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도자기와 조각품들을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니 쩽그렁 쩽그렁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미경을 향해 사기의 뾰족한 조각들이 튀고 있었다. 금세라도 뭐든지 집어들고 미경의 정수리를 내리칠 기세였다. 미경은 무섭고 떨려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을 도저히 말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데 소파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말이 그렇지 설마 네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니?
응접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다음, 동생은 식탁의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유리창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애경의 난동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응접실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두껍기 그지없는 유리문이 단번에 우장창 우장창하고 깨졌다. 순식간에 유리의 파편들이 이리 저리 튀기고 나르며 집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갑자기 딩동댕동하고 벨이 여러 번 요란스럽게 울렸다. 언젠가 한번 경찰을 부른 적이 있는 옆집 사람이 또 경찰을 부른 것이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들었는지 애경은 행동을 멈추고 그 능란한 화술로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연극배우 모양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경찰의 동정을 사기에 급급했다. 미경은 차마 동생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가 없었다.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애경을 위해서라도 경찰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남편이 누누이 말했지만 미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정 문제이니 경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목격한 경찰이 애경에게 수갑을 채울까봐 미경은 오히려 동생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동생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혈연 때문에 위선의 탈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은 알았다며 금세 돌아갔다.
미경은 한바탕 악몽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 동안 돈 관계로 인해 동생한테 시달려온 그녀는 부모의 유언장에 쓰인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었다. 항상 작은딸 때문에 속을 썩이던 부모는 애경이한테 큰돈을 물려주면 금세 다 탕진할 것 같아서였는지 큰딸인 미경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었다. 그들에겐 큰딸이 동생을 철저하게 잘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미경 역시 동생은 죽을 때까지 자기 책임이니 잘 돌봐야한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철없었던 한 때는 못난 동생이 그저 밉기만 하고 거추장스러웠으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이제 애경은 언니인 미경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이제 미경이가 평생을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미경은 계속 돈을 대주면서도 이렇게 시달려야 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애경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동생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니와 싸움을 하고 난 후에 애경은 늘 나를 찾아왔었다. 가슴 한쪽 구석엔 애경이도 이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잠재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나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녀를 내치지 못했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내가 없음 어쩌려고?”
“없으면 그냥 가면 되지.”
그녀의 대답은 항상 단순하고 간단했다.
애경은 자신의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색감과 혼란한 무늬들이 눈을 어지럽히는 차림새를 하고 와서 하소연을 했다. 내면의 상태와 외면의 상태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모양 난동을 부린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왜 언니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니? 어릴 때도 그랬어. 착하고 공부 잘하고 이쁘고, 어딜 가도 언니만 인기였어. 난 말야 언니가 내 눈앞에서 망해서 꼬꾸라지는 꼴을 보고 싶어. 부모 유산 몽땅 가로채 잘 사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친자매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애경은 언니에 대해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처음에는 깜짝깜짝 놀랐으나 차츰차츰 만성이 되어 나는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바른 말을 해주기도 했다.
“애경아. 언니가 유산 가로챈 거 아니잖아. 유언장에 쓰인 대로 했다며? 네가 지금 유산 반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려 그 돈을 받으면 뭐 할 건데? 언니가 매달 생활비는 꼬박꼬박 주고 있잖아. 너, 일도 안 하고 그 돈으로 여행 다니며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래?”
애경은 여행을 자주 다녔다. 여행은 생각조차 못 하는 내 앞에서 그녀는 어디어디를 다녀왔다면서 그곳의 풍경들을 늘어놓곤 했다. 한참동안 소식이 없을 때, 그녀는 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잘 사는 게 꼭 유산 때문만은 아니잖아.”
이민우는 운이 따랐다. 장인의 유산을 바탕으로 시작한 사업이 불을 붙듯 번창했다. 머리 좋은 그는 특수 글루를 발명하여 정부로부터 특허를 따, 세계 각국에까지 수출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신문에서도 대서특필을 했었다. 그때, 대문짝만 이민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듯이 눈앞이 캄캄했고, 심장이 덜컥거리며 비안개가 지면을 덮어버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이 그리 무사태평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얼굴은 항상 태평성대를 누리는 사람 같았다. 사진으로 보니 더 그랬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데도 그의 표정은 아주 온화했다. 사업가보다는 외국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
나는 머리를 몇 번 세차게 도리질을 하고 눈을 찔끈 감았다가 힘주어 뜨고는 ‘외형경쟁서 이기는 것보다 새로운 시장이 얻는 게 많아’라는 제목하에 그가 기자들과 인터뷰한 기사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었다. 경영면에 있어서도 그의 뛰어난 재능을 공포하는 글이라 생각됨과 동시에 인생의 경영철학도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나를 버리고 강미경을 택한.
그들이 결혼을 한 바로 직후였다.
“도대체 너는 뭐니? 천사야? 어떻게 너는 네 친구인 내 편을 안 들고 너의 원수인 언니 편을 드니?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뺏어갔는데도 아무치도 않아? 둘이서 지금 얼마나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살고 있는지 알아?”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산다는 말에는 갑자기 가슴이 싸아-- 했다. 가끔 애경은 언니를 향한 질투의 감정을 끓이다가 그 끝머리에 나를 갖다 붙였지만 내 문제에 개입하여 이민우나 강미경을 욕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배신을 당한 친구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에서건 나는 애경에게 내 맘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민우와 어찌 알게 되었냐고 그녀가 꼬치꼬치 캐물었을 때도 나는 자세한 얘기를 하기가 싫었다.
이민우, 그는 나의 아버지 회사에서 트럭 운전을 하는 기사의 아들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대전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 때문에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어느 날, 누가 요란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계속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엔 다분히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랑 일하는 아줌마가 마침 시장에 간 다음이라 나는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갔다. 아주 큰 키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는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A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사모님, 계셔?”
어머니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그는 땟뜸 반말을 했다. 그리고 턱을 쳐들고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뭔가 기분이 몹시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공손히 그를 대했다.
“지금 안 계신데요. 어디서 오셨어요?”
“나, 이강재 씨 아들이야. 사모님이 아침에 들르라고 해서 왔는데.”
나의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그 말투가 약간은 누그러진 것 같았으나 뻣뻣하긴 여전했다. 이강재 씨가 누굴 가리키는지를 몰라 주춤하는데 그는 내 맘을 읽은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니네 아버지 회사에 다니는 이강재 씨라고...”
그가 무슨 말인가를 더 계속하려 하는데 그때 마침 어머니가 아줌마와 같이 집엘 도착했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반가워했다.
“아이구 내가 한발 늦었네. 미안해요. 일단 들어가요.”
아랫사람에게 항상 친절하며 예의를 지키는 성품을 가진 어머니를 나는 존경하지만 아들 같은 사람한테 너무 쩔쩔매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A법대의 배지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다행하게도 어머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예의가 발랐다.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언뜻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A대에 입학을 하고부터는 학교에서 혹시라도 그와 우연히 마주칠 것 같아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법대 건물 앞에서 일부러 서성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를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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