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5.07.16 13:49

아파트 빨래방의 어느 성자

조회 수 48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아파트 빨래방의 어느 성자 / NaCl


1993년 미국 테네시 낙스빌 워커스프링스 로드(Walker Springs Road)에 위치한 아파트가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였다. 세탁기를 설치 할 수 없는 대신에 단지 중앙에 동전 빨래방이 있었다. 밀린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한 시간 후에 온 다는 것이 깜박하여 시간이 좀 넘었다. 큰 바구니를 들고 갔더니 테이블 위에 우리 빨래가 잘 개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빨래를 하러 왔다가 비어 있는 건조기가 없자 다 돌아간 기계 안의 우리 빨래를 꺼내어 일일이 다 개어 놓은 것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누군지 모르지만 참 성격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입장만 생각하여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한 우리만을 탓하고 빨래를 그냥 수북이 쌓아 놓았다면 기분이 좀 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누구든 깜박할 수 있지 하고 자기의 수고를 아까워 하지 않은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은 곧 성경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그 계명은 보통 실천하기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빨래를 개어 놓은 그 사람과 같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곧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불교에는 불이(不二)라고 하여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선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는게 중요하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상대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포개는 하나됨이다. 도마복음의 메시지도 둘로 나누지 말고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를 먼저 생각한다. 내 입장이 우선이다. 모든 문제는 아마도 그런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은 옛부터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내 엄마, 내 아빠, 내 선생님이 아닌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선생님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거 좋아해." 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는 이런거 좋아해." 와 같이 나 개인의 느낌과 생각도 그 주체를 나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로 확장시켜 버린다.

나에 대한 인식을 나 개인으로 한정시키면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여기지만 나라고 하는 인식을 넓혀 우리라는 우주로 확장했을 때 죽음은 끝이 아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남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각 개체로 분할 되어 있을 때 무수한 사건과 에피소드가 생겨 나지만 처음과 끝은 결국 하나로 출발하여 하나로 끝이 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르는 궁극의 존재 또는 도를 삶 가운데 모시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 인간 세상에서는 그 하나님도 나뉘어 종교전쟁을 하는 것은 아직 우리가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빨래방에서 우리 빨래를 일일이 개어 놓은 그 이름 모를 사람은 그 작은 실천을 통해 이미 불이를 실현했고 신의 계명을 실천한 것이다.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며 그 사소한 실천이 모아지고 퍼져 나갈 때 세상은 변화되지 않을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성경의 기적 이야기도 그 바탕에는 긍휼한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가치의 이동을 만들어 낸다. 즉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과 같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 하나됨의 마음은 물과 같아서 넘쳐나는 곳에서 모자라는 곳으로 그 가치의 이동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 이동이 곧 생명이고 무궁(for good)이 아닐까.

2015. 7. 16 [17:02]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45 아침의 여운(餘韻)에 강민경 2016.03.19 204
744 아침이면 전화를 건다 김사빈 2005.04.02 324
743 아틀란타로 가자 박성춘 2007.07.21 527
» 수필 아파트 빨래방의 어느 성자 박성춘 2015.07.16 487
741 아프리카엔 흑인이 없더이다 1 file 유진왕 2022.06.05 143
740 수필 아프리카의 르완다를 다녀와서-이초혜 미주문협 2017.02.26 227
739 아픔이 올 때에 김사빈 2007.09.11 225
738 시조 안개 / 천숙녀 file 독도시인 2021.11.26 68
737 시조 안개 / 천숙녀 file 독도시인 2021.04.13 93
736 안개 속에서 윤혜석 2013.06.30 135
735 안개꽃 연정 강민경 2016.06.27 218
734 시조 안경 / 천숙녀 file 독도시인 2021.07.01 92
733 안부 김사빈 2011.12.31 185
732 수필 안부를 묻다-성영라 오연희 2016.05.01 399
731 안아 보고 싶네요! / 김원각 泌縡 2020.04.23 188
730 알러지 박성춘 2015.05.14 209
729 알로에의 보은 강민경 2017.08.11 267
728 알을 삼키다; 세상을 삼키다 박성춘 2011.11.05 367
727 암 (癌) 박성춘 2009.06.23 557
726 암벽을 타다 박성춘 2007.10.14 209
Board Pagination Prev 1 ...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 114 Next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