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19 15:21

이제는 뒹구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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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일자 : 2002년01월


   내가 다니는 골목 어귀에 며칠 전부터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얼마전만 해도 누군가의 집 거실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크리스마스 트리......

그 푸른 색을 머금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땅에 뿌리를 박고 제 몸을 키웠을까? 모두가 마음 술렁이던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 비명도 없이 톱날에 허리를 잘리운 채 누구에겐가 팔려갔던 나무는 지금 길가 한 귀퉁이에 홀로 누워있다.
한 때는 제 몸을 치장하여 뭇 사람을 즐겁게 했을 전나무 한 그루.
오! 메리 크리스 마스! 오! 기쁜 성탄!

때가 지난 기쁨은 이제 길에 뒹굴 뿐이다. 마치 청춘을 잘리운 채 외딴 섬에 팔려간 가난한 처녀처럼 한 때는 화려한 치장 속에 즐거움을 주던 그는 이제 폐물이 되어 길에 나자빠져 있다. 그를 휘감았던 번쩍이는 장식은 다음 크리스마스를 위해 거두어지고 빈몸이 되어 길에 누운 크리스마스 트리, 아마도 누가 내다버린 것을 쓰레기 수거 트럭이 잊고간 모양이다.

무심히 지나던 어느날, 밑둥치에 받침대로 엇갈려 박힌 두개의 나무막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십자가! 저기에도 있었네!

동네의 서너 건물 건너마다 지붕 꼭대기에 보이는 교회 십자가, 저기 버려진 나무 밑둥에도 있을 줄이야.
동강난 나무 한 그루 어느집 성탄을 장식하기 위한 그 밑둥에 단단한 십자가 하나 아무도 모르게 버티고 있을 줄이야.

나무가 기쁨의 매개일 때는 보이지 않던 십자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야 보이다니.
교회당 높이 솟은 십자가 보다 저기 저것이 정말 십자가 아닐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었다가 몸이 쓰러져야만 보이는 저 십자가 말이다.

왜 그런지 마음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이제는 길에 뒹구는 한 때의 기쁨, 죽어 넘어진 크리스마스 트리의 처연함에 마음이 간지럽다.

섬에 팔려갔던 그 처녀도 한때는 뭇 사내들을 즐겁게 했겠지.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귀향한 여인은 화장을 지운 얼굴이 초라하기만 하다. 홀로 웅크려 누운 여자의 발 밑에 아무도 모르게 새겨진 어긋난 두 개의 나무.......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거룩해진 여인처럼 쓰러져 누운 크리스마스 트리는 골목 어귀에서 잠잠히 빛이 난다.

그대는 한 때는 기쁨이었으므로.....
그대는 그렇게 순종했음으로....
폐물이 되었어도 그대를 받쳐주었던 그 십자가 거기 있음으로....

이제는 뒹구는 기쁨, 다음엔 쓰레기 수거 트럭이 그 나무를 잊지않고 거두어 갈지라도 거기 나무가 누웠던 자리에서 나는 그 밑둥 십자가를 똑똑히 보았노라. 마음을 간지럽히던 그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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