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2008.05.13 14:05

신영철 조회 수:57

                               참당암 동백      

왜 동백꽃을 생각하면 진홍빛 선혈을 연상하게 될까.

오래전 고창 선운사 참당암 정갈한 뜰에 뚝뚝 떨어진 동백 꽃봉오리를 바라보다가, 차마 하산을 하지 못하고 마냥 퍼질러 앉았던 그때도 그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내 왼손의 동맥 언저리에 있는 상흔을 보며, 다시 동백꽃의 전생은 선홍빛 피였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히말라야 등반 중 눈사태에 휩쓸려 추락하다 손에 들었던 픽켈에 찢긴 상처가, 보기 싫은 흉터로 아문 자리를 새삼 본다. 그때 손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하얀 만년설에 방울방울 떨어져 스미는 것을 보며, 퍽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절박한 상황이었음에도 느긋한 마음이었다. 하얀 눈 속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동백꽃 닮은 핏방울을 보고 있었던 한심함이라니.
그 때도 선운사 참당암 동백꽃을 생각했었다.  

유홍준 책을 읽고 고창 선운사를 일부러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추사(秋思) 김정희(金正喜)가 쓴 백파선사부도(白波禪士浮屠)를 돌면 유형문화재인 동백 상림 숲이 있다. 숲의 나이가 무려 오백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일찍부터 이 동백 숲이 유명해서인지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노래했다. 들머리 시비로 서 있는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골째기에 동백꽃은 상기 일러 아니피고'도 그렇거니와 추사와 백파의 눈 속에 핀 동백꽃 같은 인연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리지어 핀 동백 숲의 꽃 잔치보다, 그날 하루 바쁜 산행을 마치며 하산 길에 들렸던 참당암에서 본 동백꽃은 파격이었다. 방금 쓸어낸 것 같이 빗자국이 선명했던 암자의 정갈한 마당 한 쪽에, 꽃 대궁이 싹둑 잘린 듯 떨어져 있던 동백꽃.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동백꽃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말이예요'라는 노랫 가사가 오버랩되어 해거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었던 동백과의 살 떨리던 만남.

                                   미국 동백
  
그러다 이곳 로스엔젤리스 데스칸소 가든에서 동백꽃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무조건 그리로 차를 몰았다. 매주 가는 산행 들머리에 있는 그 데스칸소 공원은 한인타운에서 불과 20여 킬로도 되지 않는 곳에 위치 해 있다.
공원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눈이 부셨다. 동백꽃들이 무수히 등불 밝혀 어서 오라는 듯 나그네를 맞이했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800여종의 동백들이, 더러는 지고 더러는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노랑 하양 분홍등 여러 빛깔의 동백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과연 데스칸소 공원은 동백꽃 나라였다. 이곳이 세계 카멜리아 소사이어티가 뽑은 '세계 최고의 동백꽃 가든'이라고 했다. 눈에 익은 동백꽃 숲에 들어 가슴이 저리면서도.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다.
그 협회의 심사위원들은 한국 고창 선운사를, 울산의 춘도(椿島)를 가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심미안이 동양의 것과 다른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이 공원의 조성 연대가 5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세계 최고'가 되기엔 짧다. 그 날은 이벤트 좋아하는 나라답게, 그 동백나무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골라 진.선.미의 호칭을 붙여 주는 행사도 마련되어 있었다. 동백은 선홍빛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다투어 유혹하는 다른 빛깔의 꽃들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동백을 붉어야 한다.

미국에 와서 처음 대면하지만 낮 익은 동백꽃 그늘에서 가만히 꽃을 들여다본다.
가끔 대궁 채 떨어지는 것이 분명한, 꽃비 소리가 정적을 깨트린다. 어느 동백꽃 잎은 붉은 눈(雪)도 되는지, 난분분 내려 동백나무 아래는 이미 꽃다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후두둑 본체 이탈을 거듭하고 있는, 동백 꽃 대궁의 아픈 단절의 사연만 꽃가지는 담고 있지 않았다. 앞서 핀 꽃이 지는 것에 무심한 듯, 맺히어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본다.
꽃눈 살며시 떠 진홍빛 꽃잎을 펼칠 세상을 엿보는 무수한 아기 봉오리들.  

내 삶의 흔적이 주름처럼 접힌, 울산광역시 온산면 방도리에 있는 작은 섬 춘도(椿島) 생각을 했다. 동백의 다른 이름이 춘椿이라서 이름마저 춘도라던가. 지금 춘도에도 이곳처럼 동백이 제철일 것이다. 동백 때문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된, 걸어도 몇 분 걸리지 않을 손바닥만한 작은 섬 춘도.
지금, 상수리나무와 어울려 늘 푸른 춘도에는 각혈 같은 선홍 빛깔의 동백 꽃 쌈 잔치가 한창이겠다. 선운사와 참당암과 춘도가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그러므로 동백은 붉다는 등식은 히말라야 눈사태 속 절박한 상황에서도 선 듯 떠오른 이미지였었다.

                                  동백아가씨

이곳 오페라하우스에서 몇 주 전에 보았던 '라트라비아타' 역시 동백은 핏빛이라는 것의 재  확인이었다. 춘희(椿姬)로 더 많이 알려진,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가 그것이다. 1848년 이 작품을 발표 할 때 원래 제목은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동백꽃 여자 '춘희'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별명이었고.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빨간 동백꽃을 들고 극장이나 사교계에서 귀부인처럼 행동한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좀 하야 할 것 같다. 동백꽃처럼 후드득 져 버렸으므로.
귀부인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경제적 바탕은 그녀가 몸을 판 대가다. 미모의 고급 창녀인 그녀 앞에 순진한 청년 '아르망 뒤발'이 나타난다. 그는 그녀에게 동백꽃처럼 정열적인 사랑을 바쳤고, 그녀도 그로부터 처음으로 참된 사랑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파리 교외의 아담한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몸을 팔 수 없어 수입원이 막히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춘희에게, 때마침 아르망의 아버지가 찾아와 아들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한다. 순진한 아들과 창녀와의 사랑을 인정할 수없는 아버지의 당연한 요구였다. 춘희는 번민한다. 그리고 결론을 얻는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시켜 아르망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그것만이 진실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를 살리는 길이라 믿고 아르망과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한다.

그녀가 다시 파리 사교계에서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본 아르망은 절망한다. 마음이 변한 그녀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고 먼 여행길에 나선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실의와 체념 속에서 폐병이 악화된 춘희는 사경에 이른다. 그 모든 저간의 사실을 알게 된 아르망의 아버지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신의 잘못을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진상을 안 아르망은 그녀에게 급히 달려가나 춘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게 뒤마가 소설 춘희의 요약인데 소설은 대 호평을 받았다. 거기에 힘입어 뒤마는 이것을 5막의 희곡으로 각색, 52년 연극으로 상연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뒤마는 소설가로서보다도 오히려 극작가로서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다. 이 작품을 피아베라는 시인이, 남자 주연을 알프레드 제르몽으로 춘희 역은 비올레타로 개명하여 작시(作詩)를 했다. 베르디의 작곡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서양판 이수일과 심순애인 '라 트라비아타'였다.

                                  오페라 동백아가씨

‘길을 잃은 여인’이라는 이태리 말 ‘라 트라비아타’ 역시 춘희의 삶에 대한 은유지만 아버지 역이 부른 바리톤 ‘프로반자 나의 고향으로(Di Provanza Il Mar Il Sol)도 아들을 향한 일상적 아버지들의 바램이겠다. 어느 아비 있어 그 사랑을 격려 할까. 사랑과 헤어진 후 시름에 잠겨있는 아들 앞에서 프로반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며 부르는 노래가 그것이다.  
나는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 아리아 ‘축배의 노래’ 보다 이 곡이 더 좋았다.

Di Provanza il mar il Sol

Di Provenza il mar, il suol,
Chi dal cor ti cancellò?
Al natio fulgente sol,
Qual destino ti furò?
Oh, rammenta pur nel duol,
Ch'ivi gioia a te brillo,
E che pace colà sol,
Su te splendere ancor può.
Dio mi guidò!

Ah, il tuo vecchio genitor,
Tu non'sai quanto soffrì!
Te lontano, di squallor
Il suo tetto si coprì ...
Ma se alfin ti trovo ancor,
Se in me sperne non falli,
Se la voce dell'onor
In te appien non ammutì,
Dio m'esaudì!

프로반자의 하늘과 육지를
누가 네 마음에서 지워 버렸느냐
프로반자의 하늘과 땅을
태어난 고향의 눈부신 태양을
어떤 운명이 빼앗아 갔느냐
태어난 고향의 눈부신 태양을
오, 생각해내 다오
거기서 너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음을.

거기라면 네게 평화가 다시 한 번 빛나리라는 것을
하느님이 어김없이 인도해 주시리라.
아, 나이든 이 아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알리가 없겠지.
네가 없어진 뒤 그 집은 쓸쓸한 모습이 되었다만
다시 너를 만났으니 아직 희망이 있구나.
명예의 목소리가 네 속에서
아주 완전히 입을 다물지는 않은 셈이니
하느님이 틀림없이 들어 주시리라.

폐병으로 각혈을 하다 사라져 간 춘희의 이미지도 선홍빛이었고 절규하듯 '비올레타'를 부르던 테너의 아리아도 소쩍새 울음 같은 핏빛이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울었'다는, 가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도 곰곰 생각하면 붉은 색깔이다. 동백꽃처럼 선홍빛 각혈 끝에 죽어 가는 심순애를 그리며 부른 이수일의 노래에 눈과 귀가 즐거웠던 감동이었다면 데스칸소 동백 구경은, 눈에 밟혀 사무치는 핏빛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동백기름 바르며 머리 빗던 누님에 대한 기억이었고, 지금 한창 낙화를 시작 할 참당암 올 동백꽃이 있는 풍경 속으로의 침잠이었다.  

그런데... 동백꽃 꽃말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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