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2>

2009.04.10 15:57

김영강 조회 수:4 추천:2

   어릴 적부터 애경의 성격이 워낙 못돼 부모가 자기만 편애한 이야기를 쓴 부분에선, 강미경은 그런 동생을 둔 것이 너무 부끄러워 차라리 애경이 죽어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항상 동생을 감싸고 생각만 해도 애처로워 죽겠다는 듯이 눈물까지 글썽이던 강미경이 아니였던가?

   아! 이건 소설이잖아. 왜 나는 자꾸만 소설을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교통사고로 부모가 죽은 후, 거기에 따른 유산문제의 갈등, 결국은 애경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고 강미경은 소설에서 밝히고 있었다.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는 그들 자매의 이야기였으나, 강미경이 애경에게 유산을 분배한 사실은 몰랐다.

   자기 자신을 꽁꽁 묶어 깊숙이 간직한 채 남들에게 보여주기를 지극히 꺼려하던 강미경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그녀는 한 꺼풀씩 한 꺼풀씩 자신을 베껴내고 있었다.

  원하는 돈을 손에 쥔 애경은, 그 돈을 다 탕진한 사년 후에 언니 앞에 다시 나타났다. 살이 너무 쪄서 몰라볼 정도였다. 어렸을 적에도 마구 먹어대던 생각이 나서 미경은 진저리를 쳤다. 이제 스물아홉인데 애경은 완연한 중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혼을 했다면서 십 년이나 나이가 위인 톰이라는 남자와 함께 나타났는데 그가 더 젊어보였다. 어머니가 한국여자라고 했으나, 그는 완연한 백인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가 깎아놓은 조각 같아 미경은 친근감이라고는 조금도 가지 않았고, 서양 얼굴에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까지 이상스러워 그가 무조건 싫었다고 한다.

   처음에 나타나서 찾아왔을 때는 별 얘기 없이 그냥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만 했으나 강미경은 곧, ‘또 돈 타령을 하겠지’ 하고 애경의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두 주가 지난 후,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전화가 왔었다. 생각했던 대로 역시 돈 이야기였다. 강미경은 ‘또 시작이로구나’ 하는 후끈한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애경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계속 고민에 빠져 밤잠을 못 잤다. “언니가 안 도와주면 나 죽어버릴 거야.” 하고 전화를 탕 끊어버린 애경의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편은 죽든 말든 인연을 끊어버리라고 강력히 말했다 한다.
    
   강미경은 소설의 끝 부분을 이렇게 매듭짓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푸르스름한 가운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진회색의 제법 두꺼운 비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애경을 둘둘 말고는 노끈으로 팔 그리고 발목 부분을 단단히 묶은 후, 들것에 담고는 두 사람이 들고 방을 나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천장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사람을 발견했으면 놀라 뛰어나와 먼저 옆집 사람을 부르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제서야 번쩍 정신이 들어 나는 톰이 가리켰던 저기라는 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거기에는 손목만큼 굵은 파이프가 여러 개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곧고 매끈매끈한 보통 파이프가 아니었다. 표면이 좀 꺼칠꺼칠해 보이고 또 약간은 울퉁불퉁하기도 한 것들이 납같이 허연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 파이프가 천정에 딱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히터 시스템이라 했다.  

   길 한쪽 옆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 뒷문을 열고 들것 채로 애경의 시체를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았다. 부르릉거리는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애경의 통곡이 되어 내 고막을 쳤다. 나는  ‘애경아’ 하고 부르며 달리는 차를 향해 뛰었다. 남편이 따라와 나를 붙들었다. 어느새 좇아왔는지 톰도 내 팔을 잡았다.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톰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 속에 쌓였던 덩어리들이 통곡이 되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통곡 소리는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하늘에 땅에 마구 퍼져나갔다.

   남편이 말했다.

   “남들한텐 자살했다 그러지 말고 교통사고라고 해”

   그 다음날부터 미경은 편지함을 열 때마다 가슴이 섬뜩섬뜩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유서는 없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창작이고 허구라고 하지만,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의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진실을 밝혀도 괜찮을 것이라는 계산 아래 이 소설을 썼을까? 끝맺음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하라는 이민우의 말은 생생하게 현실감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천륜이지만 그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어 갈망하던 소망을 톰이 이루어주었기에, 그 끔찍한 사건을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영원한 어둠 속에 묻어버린 것일까? 조금만이라도 톰을 추궁했더라면 단번에 밝혀질 진실을 일부러 모른 체한 것일까?

   또 한 가지 의문은, 소설 어디에도 의사가 다녀갔다는 얘기는 없었다. 사망진단 없이 현장에서 시체를 치울 수가 있는 걸까? 소설도 현실의 법규에 맞아야 한다. 만일 의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창작임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강미경이 미처 생각을 못해 리서치를 철저하게 안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 의사 없이 시체는 치워질 수 있고, 또 의사가 다녀갔으나 소설에 서술이 안 됐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갈수록 의혹은 짙어졌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강미경이 동생 때문에 얼마나 지쳐 있었는가는 보지 않고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낼 수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나는 애경을 잘 안다. 언니인 강미경보다도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언니는 애경이와 인연이 끊어진 사년 동안을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았고, 걱정이 되기는커녕 어디서 죽었다 해도 눈하나 깜짝 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이런 언니의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갑자기 쓴 웃음이 인다. 언니라는 호칭이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정겹기까지 해서다. 그렇지. ‘언니언니’ 하고 부르면서 우린 친자매처럼 친했던 한때가 있었으니까. 그 당시, 나는 애경이한테 어쩜 이런 언니가 있을 수 있을까?하고 놀라워했다. 도무지 애경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미경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내 마음에 애경이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하루는 애경이가 이렇게 말했다.    

   “야, 니가 꼭 강미경 친동생 같다야. 너 가져. 니 언니 하라구. 하지만 강미경을 너무 좋아하지 마. 끝에 가선 너를 꺼꾸러뜨릴지도 모르니까.”

   일침을 가한 애경이의 말이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이민우가 변심을 하기 전까지는 정말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언니가 소설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때는 나 역시 애경이와는 별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소식이 없는 것이 차라리 더 좋았다. 애경의 단 하나뿐인 친구인 내가 사오 년 동안이나 소식 없는 그녀를 잊고 살다가, 결국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애경의 무덤에라도 한번 찾아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녀를 지겨워하던 감정의 찌꺼기가 그제서야 청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경은 화장으로 처리되어 한줌의 재로 산산이 흩어져버린 후였다. 찾아가서 용서를 구할 무덤도 그녀에겐 없었다.

   그때까지도 내겐,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다. 이민우. 네가 나를 버리고 강미경한테로 갔지만, 두고 볼 것이다. 언제까지 얼마나 잘 사나. 그러나 이제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민우를 마음에서 놓아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소설의 여러 대목에서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이민우를 묘사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냥 담담한 기분으로 ‘이건 그가 아닌데, 어마 이건 바로 잘 그렸네’ 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스무고개를 넘듯 재미있어 했다. 그래서 이민우는 다 스쳐갔으나 애경의 죽음은 스쳐갈 수가 없었다. 그 죽음엔 분명 어떤 흑막이 가려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애경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쪽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애경의 남자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처음엔 그녀의 능란한 화술에 휘말려들지만 서너 달도 못돼 다 도망을 친다. 그러면 애경은 배반을 당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여자처럼 끈질기게 남자를 추적하곤 했다.

    살인은 나지 않았으나 칼을 휘둘러 피를 본 적도 있었다. 한 유부남은 애경을 만나 적당히 놀고 치워버리려고 하다가 가정과 사업이 완전히 절단 나고 감옥신세를 지고 한국으로 추방되기까지 했다. 애경은 입에 거품을 품고 그 유부남을 짓이겼다.

   “그 개새끼 말야. 내가 그냥 안 둘 거야. 꼭 이혼한다고 철석같이 맹세를 했기에 몸도 마음도 다 주고 돈까지 갔다 바쳤는데, 이제 와서 나를 버려. 며칠 전에 와이프한테 장장의 편지와 함께 반나체 사진까지 우송했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거야. 그뿐인 줄 아니? 좀 있음 그 회사 문 닫아. 그리고 그 새끼는 감옥으로 갈 거고. 두고 봐 내 말이 거짓말인가.”
    
   그때 애경은 분명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미친 사람이라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꼭 미친 짓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 묘사된 애경이의 폭력이 그것을 더 입증해주었다. 언니는 몰랐을까? 그런 경우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또한 언니는 애경의 남자 편력도 통 몰랐을까?

   소설의 어느 한구석에도 애경이 밖에서 저지르고 다니는 짓거리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애경이 돈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배경은 항상 언니 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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