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6>
2009.05.08 10:33
그렇지만 만나야 할 만한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그냥 축하한다는 전화라도 한번 걸어볼까?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드디어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옛날 친구라고 밝히고 쉽게 연락처를 알아냈다. 신문에 적혀 있던 대로 그녀는 버지니아 주에 살고 있었다.
언제 엘에이를 떠났을까? 특수 글루를 발명하여 신문에 대서특필로 기사가 나간 걸로 봐, 공장 확장을 위해 그때 바로 버지니아로 갔을까? 아니다. 그 후에도 애경이가 가끔 내 싱글 아파트에 들락거렸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아니면 애경이가 돈을 쥐고 사라진 후에? 아니면 애경이가 죽은 후에 바로?
소설에서 보면 애경이가 돈을 다 탕진하고 사 년 후에 돌아와서 목을 매고 죽은 장소는 엘에이였다. 현실과 소설을 계속 결부시키다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깐 멍한 기분이 되었다.
전화번호를 손에 쥐고 며칠을 망설였다. 소설을 두번 세번 읽고 또 읽었다. 처음 읽을 때보다 더 강렬한 의문이 스쳤다. 소설에서 모양 애경은 결혼을 했었고, 또 그 남편은 톰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남자였을까?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물론 강미경과는 인연이 끊어졌겠지.
지금 내가 이런 상상을 하면, 어떡하겠다는 거지? 이십오 년 전에 이미 한 줌의 재로 산산이 흩어져버린 애경이다. 무거운 머리를 겨우 가누고 누워 있어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음이 납덩이가 되어 온몸을 짓눌러 오고 분노가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애초에는 죽음을 캐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언니를 한번 꼭 만나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니, 이는 언니가 아닌 이민우인지도 모른다.
애경의 죽음도 언니를 만나야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꼭 만나봐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이얼을 돌렸다. 곧바로 언니의 음성이 들렸다.
세월은 흘러도 목소리는 변치 않는 것일까? 삼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그녀의 음성에 익숙해 있는 내가 이상했다. 애경이 친구 누구라고 밝히니 그녀는 침묵했다. 아니 숨을 꼴깍 멈춘 채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내 이름을 듣고 먼저 떠오른 인물은 동생보다도 자신의 남편이었을 테니까. 전화기를 쥔 손의 떨리는 전율이 내게까지 전해오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극히 담담하고 태연할 지도 모르는 언니의 심경을 난 지금 내 상상대로 그려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언니의 소설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전화를 걸었노라고, 나는 너무 반갑다는 대목에 악센트를 강하게 넣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소재가 아주 특수했고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해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언니의 글솜씨를 칭찬했다. 사실이 그랬다. 언니가 실제로 경험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같이 현실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었다. 도저히 창작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는 언니가 소설가 된 것조차 몰랐기에 더 반갑고 놀라웠다고 밝은 목소리로 톤을 높이며 말했다.
강미경의 처신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분노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말은 엉뚱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바위를 맞추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계속해서 혼자만 지껄이고 있는데 언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했었어. 그리고 또 만나고 싶었고. 소설이 신문에 발표된 후에 혹시 너한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맞아 떨어졌구나. 어쨌든 반갑다. 전화해주어 고맙구나.”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너를 만나고 싶은데 네가 여기로 올 수 있겠니?”
삼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간 듯, 그녀는 비약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본론은 생략하고 쫓기는 사람모양 결론부터 내렸다. 그냥, 한번 놀러오라는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다. 신문에 소설이 나간 후에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그 전부터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직감했다. 그렇다면, 애경의 죽음을 내게 밝히기 위함인가? 이제는 양심의 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겠다는 걸까? 내게 향한 그 양심의 소리도?
아주 오래 전, 아마 그들이 결혼한 바로 직후였던 것 같다. 언니가 나한테 너무 미안해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말을 애경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 애경은 언니를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강미경 말야.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그냥 줄줄 흘러나온다고. 그리고 속과 겉이 완전히 정반대인 위선자라고.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애초에 시작을 않았었겠지. 결혼까지 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면서 뭐, 너한테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난, 그 말이 감미경의 진심이라고 믿었다. 강미경보다는 이민우가 그녀를 향해 달음박질을 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건강이 별 시원치 않아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 그래. 네가 여기로 왔으면 좋겠는데.”
언니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만일 내가 연락을 안했더라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꼭 나를 찾았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마디마디엔 나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얼른 수다쟁이처럼 말을 이었다. ‘전화는 왜 걸었어?’ 하는 식으로 나를 서먹서먹하게 만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한 내가 무안해졌다.
“그럼요. 갈 수 있죠. 안 그래도 저도 언니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디가 편찮으세요?”
“너도 알잖아. 나 허릿병 있는 거.”
언니는 처녀 때 디스크 수술을 했었는데, 그 후로도 두어 번인가 수술을 더 했다는 소리를 애경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애경이 뭐가 그리 좋은지 해죽해죽 웃으며 나를 찾아왔었다. 언니가 디스크 수술을 또 했다는 것이었다.
“꼴까닥 죽어버리면 그건 재미가 없고, 그냥 누워서 꼼짝 못하는 병신이 됐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나는 이런 애경을 보면서 어쩜 인간이 저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하고 의문스러웠다. 가끔 그녀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듯, 자신의 치부를 송두리째 드러내어 나를 당혹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언니가 정말 나를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 했고, 나 역시 그러했기에 그 며칠 후 비행기를 탔다. 모두가 다 잊혀지고 묻혀진 일들이며 또 젊은 날의 그 껄끄러웠던 감정들도 이미 깨끗이 지워졌다. 그것을 언니한테 보여주고 화해를 하고 싶어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경의 죽음은 지워지지가 않았고, 전화를 끊을 즈음에 강미경이 비장한 목소리로 덧붙인 한마디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실은 내가 너한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또 부탁할 것도 있고.”
비행기 창밖으로 눈을 돌니니 잘 정돈된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바둑판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납작한 장난감 차들이 줄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인생살이가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해 세상사가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삶 속에 얽혀 있는 정교한 인간관계나 운명 같은 것이 한갓 종이 한 장처럼 얄팍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이민우와의 과거지사도 잠시 일었던 파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파도를 헤치고 나올 생각도 않고 점점 가라앉기만 했던 내 자신이 참으로 바보스러웠고, 왜 그리도 많이 울었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세찬 파도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잔잔해지는 법인 것을.
하늘엔 뭉게구름이 둥실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손을 뻗치면 뭉텅 바로 잡힐 듯했다. 그 구름을 타고 애경이가 울면서 어디론지 떠가고 있었다.
‘난 억울하게 죽었어. 정말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허공을 떠돌고 있단다. 내 죽음의 의문을 베껴줘. 부탁이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제발 제발, 꼬오오옥...,’ 하고 내게 간절한 눈길을 보내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애경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민우가 들른다고 해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올림픽 마켓엘 갔었다. 거기서 우연히 애경이를 만난 것이다.
누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하고 생선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진분홍 실크 블라우스에 같은 감의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하늘하늘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살도 꽤 찐 편이라 화려한 차림새가 더 눈에 띄었다. 내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나는 누군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 강애경이야. 중 2때 너랑 짝했잖아. 까닥했으면 너랑 나랑 정학당할 뻔했던 거, 기억 안나?”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키가 나랑 비슷했기에, 내가 몰라볼 만도 했다. 그리고 얼굴도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경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몰라보겠지? 나 말야. 눈 코 입, 다 뜯어 고쳤어. 그래서 옛날 사람들, 나 아무도 못 알아봐.”
나는 “키도 고쳤어?”하고 물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것이 이해가 안 돼 무심결에 뱉은 말인데, 말을 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애경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래. 그냥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막 먹어댔더니 키도 크고 살도 찌고 그러더라. 그런데 넌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배짝 말라서 그런지 더 작아진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말랐니? 어디 아픈 사람 같아. 너 옛날에 공부도 무지 잘하고 얼굴도 무지 예뻤잖아. 그런데 지금은 야, 그냥 팍 늙어버렸다야.”
애경은 상대방의 기분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듯이 하고 싶은 말들을 탁탁 뱉어냈다. 무지무지란 말을 연거푸 토해내면서 그녀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모든 것이 다 휘청거리며내 눈을 어지럽히던 때이니 내 몰골은 내가 봐도 내가 아니었다.
그때 애경은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앞에 나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쓰러졌었다. 자기는 미국 가기 싫은데 부모한테 끌려간다면서 막 울다가 쓰러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목청을 한껏 돋우고 말을 하다가 기절을 한 것이었다. 몇 가닥 앞으로 내린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이마에 풀처럼 붙어 있던 생각도 났다.
그리고 시험 때 답을 못 쓰고 우두커니 앉아 초조하게 나를 자꾸 쳐다볼 적엔 선생님 눈치봐가면서 살짝살짝 가르쳐주기도 했고, 애경이 말대로 정학을 당할 뻔한 그 일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언제 어떻게 마련을 했는지 애경이가 손바닥 반만한 쪽지 한 장을 내 시험지 밑으로 밀어넣었다.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애경의 간절한 눈초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얼른 살피니 선생님이 교실 앞쪽 옆 유리창에 딱 붙어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2,3 분도 되기 전에 어찌 우리 자리에 와 나와 애경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재빨리 답을 써 애경이한테 건네주다가 선생님한테 딱 들켜버린 것이다. 문제를 삼으면 정학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학을 당한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는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학생이 관련된 탓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쪽지를 회수하고,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한 후에 돌아섰다. 그 다음 날, 둘은 선생님께 불려가서 단단히 훈계를 들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계속>
언제 엘에이를 떠났을까? 특수 글루를 발명하여 신문에 대서특필로 기사가 나간 걸로 봐, 공장 확장을 위해 그때 바로 버지니아로 갔을까? 아니다. 그 후에도 애경이가 가끔 내 싱글 아파트에 들락거렸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아니면 애경이가 돈을 쥐고 사라진 후에? 아니면 애경이가 죽은 후에 바로?
소설에서 보면 애경이가 돈을 다 탕진하고 사 년 후에 돌아와서 목을 매고 죽은 장소는 엘에이였다. 현실과 소설을 계속 결부시키다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깐 멍한 기분이 되었다.
전화번호를 손에 쥐고 며칠을 망설였다. 소설을 두번 세번 읽고 또 읽었다. 처음 읽을 때보다 더 강렬한 의문이 스쳤다. 소설에서 모양 애경은 결혼을 했었고, 또 그 남편은 톰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남자였을까?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물론 강미경과는 인연이 끊어졌겠지.
지금 내가 이런 상상을 하면, 어떡하겠다는 거지? 이십오 년 전에 이미 한 줌의 재로 산산이 흩어져버린 애경이다. 무거운 머리를 겨우 가누고 누워 있어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음이 납덩이가 되어 온몸을 짓눌러 오고 분노가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애초에는 죽음을 캐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언니를 한번 꼭 만나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니, 이는 언니가 아닌 이민우인지도 모른다.
애경의 죽음도 언니를 만나야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꼭 만나봐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이얼을 돌렸다. 곧바로 언니의 음성이 들렸다.
세월은 흘러도 목소리는 변치 않는 것일까? 삼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그녀의 음성에 익숙해 있는 내가 이상했다. 애경이 친구 누구라고 밝히니 그녀는 침묵했다. 아니 숨을 꼴깍 멈춘 채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내 이름을 듣고 먼저 떠오른 인물은 동생보다도 자신의 남편이었을 테니까. 전화기를 쥔 손의 떨리는 전율이 내게까지 전해오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극히 담담하고 태연할 지도 모르는 언니의 심경을 난 지금 내 상상대로 그려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언니의 소설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전화를 걸었노라고, 나는 너무 반갑다는 대목에 악센트를 강하게 넣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소재가 아주 특수했고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해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언니의 글솜씨를 칭찬했다. 사실이 그랬다. 언니가 실제로 경험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같이 현실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었다. 도저히 창작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는 언니가 소설가 된 것조차 몰랐기에 더 반갑고 놀라웠다고 밝은 목소리로 톤을 높이며 말했다.
강미경의 처신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분노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말은 엉뚱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바위를 맞추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계속해서 혼자만 지껄이고 있는데 언니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했었어. 그리고 또 만나고 싶었고. 소설이 신문에 발표된 후에 혹시 너한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맞아 떨어졌구나. 어쨌든 반갑다. 전화해주어 고맙구나.”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너를 만나고 싶은데 네가 여기로 올 수 있겠니?”
삼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간 듯, 그녀는 비약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본론은 생략하고 쫓기는 사람모양 결론부터 내렸다. 그냥, 한번 놀러오라는 지나치는 말이 아니었다. 신문에 소설이 나간 후에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그 전부터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직감했다. 그렇다면, 애경의 죽음을 내게 밝히기 위함인가? 이제는 양심의 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겠다는 걸까? 내게 향한 그 양심의 소리도?
아주 오래 전, 아마 그들이 결혼한 바로 직후였던 것 같다. 언니가 나한테 너무 미안해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말을 애경에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 애경은 언니를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강미경 말야.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그냥 줄줄 흘러나온다고. 그리고 속과 겉이 완전히 정반대인 위선자라고.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애초에 시작을 않았었겠지. 결혼까지 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면서 뭐, 너한테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난, 그 말이 감미경의 진심이라고 믿었다. 강미경보다는 이민우가 그녀를 향해 달음박질을 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건강이 별 시원치 않아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 그래. 네가 여기로 왔으면 좋겠는데.”
언니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만일 내가 연락을 안했더라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꼭 나를 찾았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마디마디엔 나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얼른 수다쟁이처럼 말을 이었다. ‘전화는 왜 걸었어?’ 하는 식으로 나를 서먹서먹하게 만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한 내가 무안해졌다.
“그럼요. 갈 수 있죠. 안 그래도 저도 언니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디가 편찮으세요?”
“너도 알잖아. 나 허릿병 있는 거.”
언니는 처녀 때 디스크 수술을 했었는데, 그 후로도 두어 번인가 수술을 더 했다는 소리를 애경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애경이 뭐가 그리 좋은지 해죽해죽 웃으며 나를 찾아왔었다. 언니가 디스크 수술을 또 했다는 것이었다.
“꼴까닥 죽어버리면 그건 재미가 없고, 그냥 누워서 꼼짝 못하는 병신이 됐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나는 이런 애경을 보면서 어쩜 인간이 저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하고 의문스러웠다. 가끔 그녀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듯, 자신의 치부를 송두리째 드러내어 나를 당혹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언니가 정말 나를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 했고, 나 역시 그러했기에 그 며칠 후 비행기를 탔다. 모두가 다 잊혀지고 묻혀진 일들이며 또 젊은 날의 그 껄끄러웠던 감정들도 이미 깨끗이 지워졌다. 그것을 언니한테 보여주고 화해를 하고 싶어 나는 이렇게 먼 길을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경의 죽음은 지워지지가 않았고, 전화를 끊을 즈음에 강미경이 비장한 목소리로 덧붙인 한마디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실은 내가 너한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또 부탁할 것도 있고.”
비행기 창밖으로 눈을 돌니니 잘 정돈된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바둑판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납작한 장난감 차들이 줄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인생살이가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해 세상사가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삶 속에 얽혀 있는 정교한 인간관계나 운명 같은 것이 한갓 종이 한 장처럼 얄팍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이민우와의 과거지사도 잠시 일었던 파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파도를 헤치고 나올 생각도 않고 점점 가라앉기만 했던 내 자신이 참으로 바보스러웠고, 왜 그리도 많이 울었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세찬 파도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잔잔해지는 법인 것을.
하늘엔 뭉게구름이 둥실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손을 뻗치면 뭉텅 바로 잡힐 듯했다. 그 구름을 타고 애경이가 울면서 어디론지 떠가고 있었다.
‘난 억울하게 죽었어. 정말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허공을 떠돌고 있단다. 내 죽음의 의문을 베껴줘. 부탁이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제발 제발, 꼬오오옥...,’ 하고 내게 간절한 눈길을 보내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애경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민우가 들른다고 해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올림픽 마켓엘 갔었다. 거기서 우연히 애경이를 만난 것이다.
누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하고 생선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진분홍 실크 블라우스에 같은 감의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하늘하늘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살도 꽤 찐 편이라 화려한 차림새가 더 눈에 띄었다. 내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나는 누군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 강애경이야. 중 2때 너랑 짝했잖아. 까닥했으면 너랑 나랑 정학당할 뻔했던 거, 기억 안나?”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키가 나랑 비슷했기에, 내가 몰라볼 만도 했다. 그리고 얼굴도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경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몰라보겠지? 나 말야. 눈 코 입, 다 뜯어 고쳤어. 그래서 옛날 사람들, 나 아무도 못 알아봐.”
나는 “키도 고쳤어?”하고 물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것이 이해가 안 돼 무심결에 뱉은 말인데, 말을 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애경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래. 그냥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막 먹어댔더니 키도 크고 살도 찌고 그러더라. 그런데 넌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배짝 말라서 그런지 더 작아진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말랐니? 어디 아픈 사람 같아. 너 옛날에 공부도 무지 잘하고 얼굴도 무지 예뻤잖아. 그런데 지금은 야, 그냥 팍 늙어버렸다야.”
애경은 상대방의 기분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듯이 하고 싶은 말들을 탁탁 뱉어냈다. 무지무지란 말을 연거푸 토해내면서 그녀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모든 것이 다 휘청거리며내 눈을 어지럽히던 때이니 내 몰골은 내가 봐도 내가 아니었다.
그때 애경은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앞에 나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쓰러졌었다. 자기는 미국 가기 싫은데 부모한테 끌려간다면서 막 울다가 쓰러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목청을 한껏 돋우고 말을 하다가 기절을 한 것이었다. 몇 가닥 앞으로 내린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이마에 풀처럼 붙어 있던 생각도 났다.
그리고 시험 때 답을 못 쓰고 우두커니 앉아 초조하게 나를 자꾸 쳐다볼 적엔 선생님 눈치봐가면서 살짝살짝 가르쳐주기도 했고, 애경이 말대로 정학을 당할 뻔한 그 일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언제 어떻게 마련을 했는지 애경이가 손바닥 반만한 쪽지 한 장을 내 시험지 밑으로 밀어넣었다.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애경의 간절한 눈초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얼른 살피니 선생님이 교실 앞쪽 옆 유리창에 딱 붙어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2,3 분도 되기 전에 어찌 우리 자리에 와 나와 애경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재빨리 답을 써 애경이한테 건네주다가 선생님한테 딱 들켜버린 것이다. 문제를 삼으면 정학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학을 당한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는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학생이 관련된 탓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쪽지를 회수하고,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한 후에 돌아섰다. 그 다음 날, 둘은 선생님께 불려가서 단단히 훈계를 들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있으면 절대 용서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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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36 | 새벽기도 | 이월란 | 2008.07.06 | 57 |
| 5735 | 추월--------------------------시집2 | 이월란 | 2008.07.05 | 54 |
| 5734 | 정겨운 아침 | 백선영 | 2008.07.06 | 56 |
| 5733 | 붉은 남자 ----------------신문,시집2 | 이월란 | 2008.07.04 | 65 |
| 5732 | 올 독립 기념일에는 | 최향미 | 2008.07.03 | 62 |
| 5731 | 미치게 하는 일 | 노기제 | 2010.06.11 | 49 |
| 5730 | 아내 생일날 | 강성재 | 2010.06.14 | 61 |
| 5729 | 그리고 또 여름 | 이월란 | 2008.07.02 | 67 |
| 5728 | 흔들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 황숙진 | 2008.07.02 | 53 |
| 5727 | 흔들림 II | 백선영 | 2008.07.02 | 57 |
| 5726 | 아름다운 용서 | 신영 | 2008.07.02 | 46 |
| 5725 |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 신영 | 2008.07.02 | 34 |
| 5724 | 유월의 하늘 | 신영 | 2008.07.02 | 52 |
| 5723 | 판문점을 만나다/한국일보6/30/08 | 김영교 | 2008.07.01 | 75 |
| 5722 | 우리, 언제부터 | 이월란 | 2008.07.01 | 63 |
| 5721 | 근황 | 박정순 | 2008.07.01 | 41 |
| » | 신의 숨소리<토요연재6> | 김영강 | 2009.05.08 | 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