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건축예술, 그 초극점

2008.08.26 19:13

박경숙 조회 수:62 추천:2

<미주통신-월간 예술세계 2008년 6월호>


 


                   과학과 건축예술, 그 초극점  


 


 로스안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시속 70마일 정도로 달린다 해도 족히 2시간은 걸리는 거리, 샌디에이고 카운티 라호야(La Jolla)시티에는 세계적인 생물학 연구소가 있다.


 정식 명칭은 Salk Institute,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의사 조나스 에드워드 솔크(Jonas Edward Salk)박사가 유명 건축가 루이스 이사도레 칸(Louis Isadore Kahn)에게 의뢰해 지은 연구소이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1960년대 소아마비 백신을 투여 받은 경험이 있지만, 사실 그것을 누가 개발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또래의 친구나 지인 중에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절거나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그 백신을 투여 받을 수 있었던 어릴 시절의 행운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1952년 미국에만 5만 8천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여 3천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솔크박사는 백신 개발에 매달려 먼저 가족에게 임상실험을 했다. 1954년엔 미국내 180만 취학 전 아동에게 임상실험을 하고, 1955년 4월 12일에 백신의 안정성과 효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니, 그 이후에 태어나 백신에 접할 수 있었던 우리세대는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내 또래나 나보다 젊은 나이의 지인들 중에도 소아마비를 앓고 다리를 절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당시 후진국에 불과하던 우리나라에 미국으로부터 백신이 보급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던 탓이리라.


 아무튼 그 유명한 백신을 개발한 학자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방문한다니 사실 좀 흥분이 되었다. 더구나 연구소 건물은 건축물 자체로도 유명하여 잔뜩 기대가 되었다.


                                                        


  연구소는 우리 집에서 지척이었고, 이웃의 한 사람인 젊은 생물학도 이재성 박사의 안내까지 받을 수 있어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았다. UC샌디에이고 대학 근처인 우리 집에서 겨우 10분 거리, 일주일에 두 번쯤은 아들아이를 캠퍼스에 내려주기 위해 내가 자동차를 몰고 가는 길에 연구소는 잿빛 건물로 숨어 있었다.


 미국에선 사실 반지르한 반짝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16년 전 내가 처음 엘에이에 도착하여, 오래된 아스팔트와 모양새가 세련되지 않은 건물들에 실망한 것처럼 미국은 내내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은 겉모습 속에 무한한 것을 갖추고 있는 땅이 미국이랄까.


 솔크 연구소도 그러하였다. 타일 한 장 붙어있지 않은 건물은 콘크리트 그대로였고, 층마다 줄을 선 나무 통풍창조차 전혀 칠을 한 흔적이 없었다. 빛이 바래다 못해 헐기까지 한 그 나무창들을 바라보며, 서울의 어디 건축현장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물 앞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가끔 방문하게 되는 서울은 갈 때마다 눈을 휘둥그레하게 한다. 늘 변화와 새로움이 번뜩였고 이제 국외인이 된 내겐 그 빠른 회전이 저절로 감지되었다. 어쩔 수 없이 온 감각을 고국에 열어놓고 살 수밖에 없는 코리안어메리칸)KoreanAmerican)인 나는 아마도 서울의 번쩍임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눈에 솔크연구소의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아니면 건축물을 보는 안목이 내겐 전혀 없었던지·······.


 콘크리트 더미, 그 네모난 벽마다 우중충하게 설치된 벗겨진 나무창, 다만 바다를 향해 나란히 선 두 건물 사이의 넓은 광장엔 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콘크리트 재질로 된 광장 한 가운데에 좁은 골이 나 있어, 그 한끝 분수에서 물이 솟아올라 흘렀다. 물은 바다가 보이는 광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광장 앞으론 태평양이 푸르게 펼쳐져 가슴이 탁 트여왔다.  
                                                                             


  연구소를 안내해준 이재성 박사는 이미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솔크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생물학 분야만큼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필수로 연구과정을 거쳐야한다는데, 솔크 연구소에서 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선 경쟁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박사 후 연구과정을 하는 사람들은 줄여서 ‘포스닥’이라 부른다는데 그것은 영어로 ‘포스트 닥터(post doctor)’를 줄인 말이다.


 전체 850명의 연구원이 근무하는 연구소엔 한국인 포스닥이 현재 12명, 이들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재원들이 아닐 수 없다. 때론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인적 손실을 보기도 하는 현실에서, 포스닥과정을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가 연구에 헌신하고 싶다는 이재성 박사의 말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는 국가에서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에 재정지원을 하긴 했지만, 아직 우리나라엔 전문적인 생명공학 연구소가 없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참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국내에서도 생명공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기타 과학 분야, 스포츠 등 가시적인 분야에는 돈을 많이 쓰면서 생명공학 분야를 국력으로 키우지 않는 것을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솔크연구소와 같은 연구소가 우리나라에도 하나쯤 세워지길 바라는 건 모든 생물학도들의 꿈이라고 했다. 하긴 무병장수를 외치는 웰빙 시대에 인류의 질병타파, 생명연장만큼 중요한 일도 없으리라.
                                                        
 


광장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블랙비치(Balck Beach)란 바다는 사람들이 벌거벗고 다니는 누드비치라 했다. 연구소에서 바다까지 실지로 걷는다면 한 시간쯤이 걸린다는데도, 광장 뒤쪽으로 물러나 보면 바다와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사실 광장에서 바라보는 푸르름은 경계가 없어보였다. 하늘과 바다가 합해져 온통 푸르기만 한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두 건물 사이의 광장에 서 있으려니 멀리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은은한 잿빛의 건물은 왜 그런지 나를 자꾸 잡아당기고 있는 듯 했다. 결이 고와보이는 특수콘크리트 재질의 벽엔 철심이 일정 간격으로 박힌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상식적으론 철심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타일을 붙인다거나 페인트 칠을 해야할 것이나 건물은 마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속살 그대로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멀리 보이는 바다가 누드비치라는 것과 맨몸의 건물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도 같았다. 샌디에이고 인근에 누드비치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얼마 전 바닷가를 홀로 거닐고 있을 때 낯선 청년이 블랙비치가 어디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누드비치를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샌디에이고 관광을 왔다하더니 누드비치를 관광 삼으려 했던가.


                                                        


이재성 박사가 돌아가고 나서 광장 뒤쪽 화단가에 잠시 걸터앉았다. 바다 쪽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연구소를 견학 온 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연구소 건물은 바라볼수록 친근해지고, 나는 왜 그런지 루이스 칸이라는 한 독특한 건축가를 만나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솔크박사와 함께 샌디에이고를 찾아와, 연구소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62년이었단다. 인근에 있는 UC샌디에이고 대학 캠퍼스도 그쯤 생겨났다니 연구소가 지어질 당시엔 미개발지의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땅을 샌디에이고 시에서 기증받아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잿빛 콘크리트 건물을 남겨놓고 이제는 고인이 된 두 사람, 솔크박사와 루이스 칸이 그 곳에 생생히 살아 있는 듯 했다. 솔크박사는 만년에 에이즈 연구를 하다 1996년 83세의 나이로 떠났고, 루이스 칸은 73세였던 1974년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파산한 뒤였고, 무슨 이유에선지 여권의 이름까지 지워버려 연고를 찾을 수 없던 시신이 며칠 동안 방치되었다고 했다.


 나는 한 건축예술가의 고난의 생애를 더듬으며, 결코 쉽게 살지 못했던 한 예술혼을 연구소 건물에서 만나고 있었다.


 세인들은 그를 ‘빛과 침묵의 건축가’라고도 하고, 하늘과 대지 사이의 수직성을 초월하여 빛과 음영의 시학을 보여주었다고도 말한다. 전문적인 건축학적 느낌은 내가 모르는 분야이나 연구소 건물은 바라볼수록 그윽한 느낌을 자아냈다. 전체가 네모의 도형으로 이어진 것이 건물의 주제였다. 콘크리트의 재질은 단단함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굳은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박혀 저절로 사방무늬를 이룬 철심의 흔적은 그 점점한 모습이 단절이 아니라 무한한 연장을 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건물의 군데군데엔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들이 있었다. 실용성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활용해야할 공간이었지만, 그냥 남겨둠은 경쟁사회에서 잔뜩 조여든 우리들의 척박한 마음을 느슨히 풀 수 있는 여백으로도 보였다.


 마치 세계의 거장, 솔크박사와 루이스 칸이 나란히 선 듯한 두 채의 건물 사이 네모난 광장 시작의 중심부분에서 물을 흘려내는 분수는 인간의 심장을 상징하는 것도 같았다. 광장 중심을 가로지르는 좁은 골로 흘러나가는 물은 멀리 바다를 향했다.


 심장에서 펌프질하여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우리의 피돌기도 그렇게 바다처럼 넓은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일까. 어쩌면 무한해야할 인간의 이상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온갖 사회적 장치 속에 가두고, 조이며 살고 있지 않은가. 본모습을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덧칠하면서·······. 그래서 정복할 수 없는 질병이 자꾸만 생겨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연구소는 우리에게 오직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겉모습의 자연귀화가 아니라, 인간내면의 회심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오래전 ‘철학과 신’이라는 얇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에티엔느 질송이 쓴 그 책은 ‘지성의 끝엔 신이 있다’는 결론은 남겼는데, 나는 솔크박사와 루이스 칸이 자신들의 학문적 업적을 통해 신에 닿은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힘든 연구 끝에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을 특허신청을 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무료 개방한 솔크박사나, 자연적인 건축예술을 추구한 루이스 칸은 다 신에 접속한 사람들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단지 생물학과 건축에 관에서만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 사는 일 모든 것이 그렇게 치열하고 열려 있어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통해 인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과학계는 단기적인 결과에만 몰두해 있고, 인맥에 의한 채용방식으로 인해 발전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참다운 과학발전을 위해선 장기적 관점의 연구 자세와 투명한 채용방식을 도입해야만 한다던 한 과학자의 말을 떠올리며, 과연 학문도 ‘도(道)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값진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솔크 연구소 안에서도 솔크박사와 루이스 칸의 치열했던 영혼처럼 그 후학들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에이즈, 당뇨병, 비만, 암, 줄기세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이루고 지고 있다고 했다.    
                                                                                                                                                                            


 연구소를 나올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흐른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아래쪽 분수 근처 야외테이블에선 직원들과 방문자들의 점심이 한창이었다.


 그들을 지나쳐나오려는데 후미진 곳에 혼자앉아 햄버거를 베어 무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길게 기른 머리를 하나로 묶고 하얀 연구실 가운을 입은 미국인이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선 곳에서, 마치 고개를 처박은 듯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은 뭔가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골똘한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생명의 과학적인 연구에도 먼저 필요한 것은 사색일까. 이 연구소를 내가 너무 사색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 혼자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 세상의 절대 개념은 오직 하나로 통한다는 걸 생각했다. 과학, 신앙, 사랑 모든 것이 초극점에선 오직 하나의 말이란 걸······.


 연구소를 나오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꾸밈없는 잿빛 건물이 우리에게 던지던 메시지는 바로 그 ‘사색’이었다는 걸. 이 감각의 시대에 인류가 먼저 해야 할 것은 잃어버린 사색을 찾는 일이라고······.


 다녀오고 나서도 은은한 여운이 자꾸 생각나는 솔크 연구소를 나는 또 찾아가게 될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선 두 건물에서 솔크박사와 루이스 칸의 위대한 영혼을 만나려는 것처럼. 한 시대를 살고 간 의학자와 건축가에게서 나는 무한한 문학적 영감을 얻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