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호야 코브(La Jolla Cove)
2008.09.08 20:05
<미주통신-월간 예술세계 2008년 8월호>
라호야 코브(La Jolla Cove)

샌디에이고 라호야 코브(La Jolla Cove)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다. 바닷가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암석으로 이루어져 파도에 깎여 자연스런 그 모습마저 천연예술품이다.
유시 샌디에이고 (UC San Diego)대학 캠퍼스가 있는 라호야 빌리지(La Jolla Village drive)길에서 해변으로 향하는 토이 파인(Torrey pine road)길은 골짜기를 내려가 듯 구불구불하다. 나무가 우거진 그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서가 깊어 보이는 동네가 나온다.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차창을 열면 불어오는 바람에서 갯내음이 묻어나온다. 자동차가 흐르는 차도 위로 갈매기가 날고, 엔진음 사이로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집들과 주유소를 지나 살짝 둔덕진 지점에 바닷가로 가는 프로스펙트(prospet)라는 길이 오른쪽으로만 방향이 나 있다. 핸들을 돌려 그 길로 들어서면 그때서야 아름다운 관광명소에 온 것을 실감한다. 좁은 2차선 길 양옆으론 미국의 다운타운답게 작고 아름다운 상점들이 가득하다. 카페와 식당, 갤러리와 양품점 등 업종도 다양하다. 일단 그 길로 들어서면 오른 쪽 어느 길로 내려가도 바다를 만나게 되어 있다.

처음 만나게 되는 바닷길은 콘크리트 난간을 따라 내려가는 커브길이다. 라호야 코브의 첫 부분인 셈이다. 바다에 면한 절벽 밑엔 파도가 물결치는 암석동굴이 있고, 절벽 위 소나무가 그늘진 작은 기념품점엔 동굴을 탐험하는 안내장이 붙어 있다. 겨우 대여섯 대의 자동차가 주차할 정도로 협소한 상점 주차장 맞은편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절벽 위의 소나무와 그 뒤로 펼쳐진 바다가 고스란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전경 좋은 식당, 실내는 소박하고 오밀조밀하지만 음식 값은 관광지답게 비싼 편이다. 하지만 종업원의 정중한 태도와 입에 짝 달라붙는 음식 맛을 생각하면 그리 아까울 것도 없다.
레스토랑을 지나 조금 더 바다 가까이로 가면, 값이 좀 저렴한 셀프서비스 카페가 있다. 그곳은 구내매점처럼 우중충하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여자는 친절하지 않다. 그녀는 길게 묶은 머리에 야구 모자를 쓰고 어깨와 팔이 훤히 드러나는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늘 무뚝뚝하다. 그래도 바닷가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하다.

4달러짜리 반쪽 샌드위치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사, 바다가 보이는 페리오 테이블에 앉는다. 눈부신 햇빛 아래 희뿌연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 때 어디선가 비둘기 한 마리가 나타난다. 혹 떨어진 빵조각이라도 있을까 싶어 카페바닥을 겁도 없이 휘젓고 다니는 비둘기······. 갈매기나 물새에게 함부로 음식을 주지 못하게 되어있지만 샌드위치에 곁들여 나온 과자 한 조각을 슬쩍 던져본다. 냉큼 과자를 입에 넣고 삼켜버린 비둘기는 자꾸만 내 주위를 맴돈다. 의자 밑을 서성이더니 풀썩 날아 내 팔이 걸쳐진 페리오 난간으로 튀어 오른다. 금세 샌드위치를 쪼을 태세다. 아니다 다를까. 비둘기는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까지 올라와 과자가 담긴 바구니에 부리를 댄다.

갑자기 비둘기가 성가셔져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도보에 나선다. 한창 휴가 철인만큼 바닷가는 인산인해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도로 주차장은 빈 틈 없이 메워져 있다. 암석과 암석 사이 아늑한 모래사장엔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더러는 푸른 파도 속으로 뛰어든다.

라호야 해변의 하이라이트는 바다표범들이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선 사이 바다표범을 위한 망루가 있다. 그 옆 모래사장이 그들의 휴식처인 셈이다. 대부분은 무리지어 낮잠을 즐기거나 모래 위를 뒹굴며 앞발로 배를 긁적이곤 하던 그들이 웬일인지 간 곳이 없다. 모두 먹이를 구하려고 물속으로 잠수를 했는지········. 관광객들은 망루근처에서 그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기다린다. 망루건물을 끼고 내려서면 바다표범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바다 가운데로 뻗어난 교각이 있다. 바다표범들을 잘 바라볼 수 있도록 교각은 모래사장을 따라 원형경기장의 일부처럼 둥글게 휘어 있다. 그곳에 서 있으면 바다 위로 솟아오른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지척에서 볼 수 있고, 갯내음 가득한 해풍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동료들은 모두 바닷물 속에 잠겼는지, 햇빛이 쨍한 텅 빈 모래사장에 홀로 떨어진 바다표범 한 마리가 물기로 번들거리는 검은 몸을 턴다. 오직 무리지어 움직이는 그들의 생리에서 가끔 이탈하는 말썽꾸러기가 있긴 하다. 언젠가도 아기 바다표범 한 마리가 혼자 물속에서 나와 자꾸만 망루근처 암벽을 기어올랐다. 어미로 보이는 바다표범이 근처 물속에서 몸을 내밀고 어린 것을 따라다니던 모습이 생각난다. 혹시 그때의 말썽꾸러기가 몇 달 사이 어른이 되어서도 홀로 모래사장에 있는 것을 아닐까. 애타게 바다표범의 출현을 기다리는 관광객들에겐 그래도 외톨이 한 마리가 있어 볼거리가 되었다.

조금 더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끝까지 걸어갔다 길을 거슬러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그들 무리가 모래사장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다표범의 망루를 지나 남쪽으로 향한 해안선 옆으론 2층 규모의 아파트 건물들이 서 있다. 누군가 늘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별장처럼 빌려서 사용하기도 한다. 바다로 향한 아담한 테라스엔 야외용 의자와 테이블이 놓였어도 그곳에 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드물다. 혹 집주인들은 모두가 바다를 떠난 시간에야 거기 앉아 파도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어둠이 깃들고 주변이 조용해져야 파도는 더 깊은 소리를 낼 것이니······.
오른쪽으론 바다를 끼고, 왼쪽으로 나지막한 주거건물을 지나 좀 둔덕진 길을 걸으면 바닷길 앞에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다. 바다와 잔디밭, 그리고 바로 길 옆에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편안함에 내가 가장 자주 찾는 지점이다. 가끔은 목이 긴 종이컵에 커피를 가득 사들고 와 근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파도를 바라보기도 한다. 또 노트북을 들고 오면 근처 주거시설에서 사용하는 무선 인터넷이 잡혀 바닷가에 앉아 웹서핑을 즐길 수도 있다.
해가질 무렵이면 일몰을 보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도 그 지점이다. 은퇴연령의 실버그룹이 모래사장용 이동의자를 죽 펼쳐놓고 석양을 바라보던 모습은 좀 이색적이었다. 인생의 석양에 바다에 잠기는 하루의 석양을 바라보던 그들·······. 나도 여러 번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앉아있기도 했다. 때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광경도 없이 순식간에 수평선 아래로 잠겨드는 일몰은 허무했고, 그렇게 침침해진 바다를 떠나는 시각이면 늘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더 붉게 물들었어야했는데 싶어서이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명이 지기 전에 뭔가 가장 강렬한 것을 세상에 쏟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안선 끝이 주택단지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되돌아섰다. 혹 지금쯤엔 바다표범들이 모래사장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떻게든 그들을 촬영하겠다는 생각에 땀에 젖은 손에 카메라를 꼭 쥐고 땡볕 아래를 걷는다. 다시 찾아간 바다표범 망루, 바다로 뻗은 교각 위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었지만 그나마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던 한 마리조차 간 곳이 없다. 좀 허무한 생각에 망연히 빈 모래사장을 바라보고 선 내 등 뒤에서, 미국중년 여인이 앞선 일행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Are they waiting for us?"
내 앞에 섰던 여인의 일행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내젓는다. 나는 여인의 말이 남달라 혼자 그 말을 뇌까려본다.
바다표범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느냐고?
하지만 기다리는 건 사람들이다. 수많은 관광객을 땡볕아래 기다리게 해놓고도 바다표범들은 좀 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손에 쥐었던 카메라를 핸드백에 넣으며 그만 사진 찍기를 포기한다. 기대하지 않을 때는 떼 지어 있던 그들이 오늘따라 간 곳이 없음이 야속하다.

자동차를 몰고 해변을 빠져나오는 길엔 그리스 레스토랑과 추상화가 전시된 갤러리 사이에 한국음식점이 있다. 한인 타운처럼 규모가 크진 않지만 ‘Little Korea'란 붉은 간판이 유리공예 상점과 양품점 위층에 버젓이 걸렸다. 한국사람 보다는 주로 미국인을 겨냥한 메뉴지만 된장찌개와 순두부도 있다. 미국의 관광명소에 자리한 한국식당은 간판만 보아도 괜히 어깨가 으슥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들어서 본다. 해변에서 나온 길을 직진하여 자이랄드(Girard)길로 들어선다. 그 길에도 해변의 다운타운이 이어지고 오밀조밀한 상가들이 화려하다. 여느 동네처럼 은행이 있고 양화점과 보석가게, 식당이 있지만 그 사이로 그림이 걸린 갤러리가 많이 눈에 띈다. 또 디자인 회사와 건축설계 회사, 실내장식 전문점이 많다. 그 건물들은 고풍스럽고 이색적이다.

자이랄드 길 다운타운이 끝나는 지점엔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서 있다. ‘바다의 별(Mary star of the sea)’이라는 미국 가톨릭교회다. 낮이면 텅 비어 있는 그곳에서 나는 가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건물전면의 모자이크는 아름답고, 소박해 보이는 실내는 오히려 그 속에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것도 같다. 목재를 가로지른 높은 천정과 내부의 건축양식은 스페인 풍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내가 과연 이국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 실감하게 된다.
성당에 들어서려면 이따금 그 입구에 앉은 거지를 보게 된다. 멀쩡한 체격에 갈빛 머리를 늘어뜨린 채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칼 하다. 캘리포니아의 부촌이라는 이곳에서 거지를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조금 전 바닷가에서 빵부스러기를 찾아 카페 안까지 찾아들었던 비둘기처럼, 풍요로운 곳에 걸인이 더 많다는 걸 인식한다. 때로는 지갑을 뒤져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기도 하지만, 모른 척 지나갈 때도 있다. 성당입구는 동정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장소라는 걸 걸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성당에 들어가 명상에 빠지다가 자칫 시간을 잘못 재면 주차티켓을 떼게 된다. 한 시간 주차만 허용되는 거리엔 수시로 주차요원이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주차시간을 초과한 차량 와이퍼에 벌금티켓을 끼워놓는다. 아름답고 깨끗한 만큼 단속도 심한 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키 큰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의 곳곳엔 가로등 기둥에 꽃이 한창인 화분이 걸려 있다. 엄밀히 말하면 화분이 아니라 꽃이 뿌리 채 흙무더기에 싸인 채 걸렸다. 대중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라 대부분 자기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만, 시간에 맞춰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은 동양인 남녀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정거장 벤치에 앉는 것을 보며 길을 건너니 맞은편엔 또 걸인이 앉아 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빨간 신호등에 서게 되는 교차로에 베트남 혹은 이라크 전쟁의 희생자라고 쓴 골판지를 들고 백인거지들이 서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선 사라져버린 거지들을 선진국 부촌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풍요의 뒷면은 빈곤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풍경이다.
이곳의 하늘엔 늘 뭉게구름이 떠 있다. 바다의 습기가 더운 기운에 상승하는 때문인지 파란 하늘에 무늬 진 하얀 구름은 환상적이기도 하다. 또 가끔은 바다안개가 허리케인처럼 몰려오기도 한다. 바닷가에 앉았다가 어디선가 몰려온 하얀 안개가 순식간에 바다를 덮고 주변 거리까지 감싸던 광경에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바로 지척도 보이지 않던 그 순간, 바닷가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떠나는 걸 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그러나 엷은 베일을 쓴 듯 안개에 잠긴 도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되면 다른 도시에 비해 어둡게 느껴지는 이곳의 하늘도 아마 바닷가의 잦은 안개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인공불빛이 적고 공해가 없는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 이 도시로 옮겨왔을 땐 밤이면 유독 어두운 하늘 때문에 운전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1년도 채 안되어 거의 익숙해진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도시환경에도 나는 이제 좀 무덤덤해졌다. 늘 옆에 있으면 귀함을 잊는 얄팍한 사람의 마음 탓일까.
그래도 바다를 찾아갈 때면 마음이 설렌다. 서울에 살았더라면 쉽게 바라볼 수 없는 바다를 단 15분 운전 거리에서 늘 만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때로는 잔잔히, 때로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 돌아올 때면 마음은 파도와는 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일상 안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늘 흔들리는 마음의 파도를 바다에 다 맡기고 돌아온 듯이······. 그래서 우리는 가끔 바다를 찾아가야 하는 걸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시달리는 바다의 생애를 생각하면, 우리 일상의 파도쯤은 아무 것도 아님을 배우기 위해서.(*)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5999 |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 박정순 | 2008.09.09 | 57 |
| 5998 | 영혼의 입맞춤 | 박영숙 | 2008.09.09 | 46 |
| 5997 | 아~ 세월이여! | 박영숙 | 2008.09.09 | 64 |
| 5996 | 세월과 고독을 꿰매고 | 박영숙 | 2008.09.09 | 65 |
| 5995 | ‘아니’라는 말 | 이영숙 | 2008.09.09 | 41 |
| 5994 | 시조가 있는 수필 (2) -<시조 짓기>와 겨울 시조 두 편 | 지희선 | 2008.10.30 | 63 |
| 5993 | 정이 들고 나는집 | 장정자 | 2008.12.04 | 52 |
| 5992 | 이인(二人) | 이월란 | 2008.09.07 | 46 |
| » | 라호야 코브(La Jolla Cove) | 박경숙 | 2008.09.08 | 47 |
| 5990 | 1시간 50분 | 이월란 | 2008.09.08 | 59 |
| 5989 | 디아스포라의 바다 | 이월란 | 2008.09.06 | 56 |
| 5988 | 아빠가 된 '펠러' 서방/'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 | 조만연.조옥동 | 2010.06.10 | 59 |
| 5987 | 새벽 | 이상태 | 2010.11.09 | 96 |
| 5986 | 그린리버 | 오연희 | 2010.06.08 | 42 |
| 5985 | 추천 | 오연희 | 2010.06.08 | 51 |
| 5984 | * 멜랑콜리아 패러디 | 구자애 | 2010.06.08 | 54 |
| 5983 | 헌혈카페 | 이월란 | 2010.06.07 | 46 |
| 5982 | 강촌행 우등열차 | 이월란 | 2010.06.07 | 49 |
| 5981 | 동거의 법칙(견공시리즈 69) | 이월란 | 2010.06.07 | 46 |
| 5980 | 눈빛 환자(견공시리즈 68) | 이월란 | 2010.06.07 | 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