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소리<토요연재1>
2009.04.03 18:58
일간신문을 대충 훑으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예면에서 시선이 멈췄다. ‘비극은 끝나다’라는 단편소설이 신문 전면에 실려 있었다. 해마다 한국문단에서 실시되는 그 해의 가장 우수한 작품 하나를 선정하는 데에 뽑힌 수상작이었다. 그리고 재미작가라고 토를 단 ‘강미경’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퐁당 하고 가슴 속으로 뛰어들며 파문을 일으켰으나 물결은 곧 잔잔해졌다.
강미경, 그녀는 한때 내가 애절하게 사랑했던 남자인 이민우의 아내다.
사진은 얼굴 사진이 아닌 몸 전면 사진이었다. 제법 큰 사이즈로 두 손바닥 면적 정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백이 아닌 천연색이었다. 그녀는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나무에 기대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에선가 바람이 불어 머리결이 날리는 듯했다. 머리 위에 펼쳐진 파아란 하늘, 그리고 껍질이 유난히도 거칠어 보이는 거무스럼한 나무 기둥과 발밑에 깔려있는 갈색의 낙엽들이 가을 냄새를 물씬 풍겼다.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어도 나는 강미경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는 여전히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강미경이 소설가가 되었단 말인가?
약력을 보니 벌써 이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도 권위 있는 H문학을 통해 등단을 했고, 일간신문에서 실시하는 신춘문예에도 당선을 했었다. 그리고 문학상도 탔었다. 몰랐던 사실이다. 이곳 엘에이에 계속 살면서도 근 삼십여 년 동안을 한국사회와는 높은 담을 쌓아 놓은 나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약력 맨 끝에는 ‘버지니아 거주’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버지니아?’하고 확인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혹시 우리의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재빨리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삼각관계이긴 했으나 소설을 쓸 만한 소재는 아니다. 한 남자가 변심하여 다른 여자한테로 가버린 지극히 흔한 스토리였으니까. 그러나 소설엔 처음부터 상상조차 못했던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긴박감에 휩싸여 숨을 죽였고, 드러나는 내용에 점점 빨려 들어가면서 마치 내가 수사관이라도 된 듯 소설을 분석하고 있었다.
강미경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강애경, 그녀는 이십오 년 전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나와는 친구 사이였다.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이민우도 자연스럽게 강미경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은 바로 애경이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것이었다. 놀랍게도 소설에는 실명이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십이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한밤중,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요란하게 울렸다.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잉, 하고 유리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가 가슴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쫙 끼쳤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어요. 천정에 목을 맸다구요.”
뭔가에 쫒기는 듯 숨가쁘게 뱉어내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엉엉 우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경이 남편 톰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는데 무거운 둔기로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아찔함에 현기증이 났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나 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으나 이어지는 톰의 말은 확실한 현실이 되어 내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밤중에 웬 전화야”하고 남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톰이에요. 톰”
나는 부들부들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남편이 얼른 일어나 불을 켜고 전화기를 뺏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나는 큰 숨을 한번 내쉰 다음 냉수 한 컵을 죽 들이키고 재빨리 그 다음을 읽어내려 갔다. 소설에서 서술한 바에 의하면 애경은 센츄럴 엘에이 지역, 어느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고, 미경은 동생의 집에 가보기는커녕 그 동네에조차도 첫 발걸음이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얼음장 같은 냉정함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그렇지 이민우는 능히 그럴 위인이지.’
<<아파트엘 들어서니 천정에 목을 맸다는 애경이가 방바닥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에서부터 무릎 위까지 얇은 담요를 덮고,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린 채 두 눈은 감고 있었다. 목에는 노끈의 붉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쭉 뻗은 두 다리는 좀 퍼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약간은 얼룩덜룩해 보였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는 순간 가슴이 꽉 메어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면의 하얀 벽이 뱅뱅 돌며 눈앞이 노래졌다. 나는 애경이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애경아, 애경아”하고는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동생이 “언니”하고 부르며 벌떡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손이 가슴 한복판을 문지르고 있었다. 소설에서와 똑같이 강미경의 심정이 된 것이다.
<<“애경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언니가 너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언니를 용서해줘. 미안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바닷물 같은 눈물을 내쏟았다. 동생은 가해자이고 나는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왔던 현실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남편이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큰소리 내지 마. 소릴 죽여.”
톰은 한참을 조용히 훌쩍거리다가 고개를 젖히며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켰다.
“일 끝나고 들어오니까 저기에 저기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저기라는 곳을 쳐다보았다. 나도 고개를 들어 천장 시선을 돌렸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톰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말할 기력도 없는 사람처럼.
“내려놓으면 금세 도로 살아날 것만 같아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애경을 톰은 방바닥에 내려놓고 인공호흡을 시켰다는 것이다. 살려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숨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고 한다.
톰은 병원 랩에서 태그니션으로 일을 하는데 그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다. 정식직원이 아니고 병원에서 불러줘야만 하는 파트타임 직원이라 뜨내기 신세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로 밤에 일을 하며 요즘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 간 직원들이 많아 거의 매일 일을 했다고 한다. 밤 열두 시에 일을 끝내고 행여 아내가 깰까봐 살며시 들어왔는데, 애경이가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이 노끈을 풀고 처제를 내려놓았단 말이지?”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남편은 애경이가 목을 맸다는 샛노란 끈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는 나일론 줄을 여러 겹으로 꼬아서 만든 매끈매끈 윤기가 나는 아주 튼튼해 보이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끈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 말릴 때 쓰는 줄이라고 했다. 빨랫줄치고는 짧았다.>>
애경의 친구인 내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줄거리였다. 허구로 꾸민 소설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소설이 아닌 신문기사를 읽는 기분이었다.
아, 이럴 수가... 그렇다면 애경의 죽음이 교통사고가 아니였단 말인가?
갑자기 활자가 뒤엉켜 나는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니, 뛰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미경과 애경은 실명 그대로 표기가 되었으나 어느 한곳에도 이민우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계속 남편이라고만 호칭을 했다. 그런데 톰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이민우를 그대로 그려놨었다. 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 등, 정말 그는 영화배우를 뺨치게 잘생긴 남자였다.
이민우를 안 다음부터는 햇빛에 반짝이는 잎새 하나도 다 아름다웠고, 모든 사물이 그를 통해 보였었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인해 세상이 더 환하게 눈앞에 펼쳐졌고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태양, 밤하늘에 총총 박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바람 소리조차도 내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가느다란 별빛 하나, 소소한 빗방울 하나에서도 감동을 느끼며 내 영혼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축복으로 다가왔다. 촛불 한 자루가 방안에 밝음을 채우듯, 내 가슴의 사랑 한줌이 온 세상에 밝음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로 인해 내 맘속에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토록 짙게 드리워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다음은 주인공 미경이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줄거리를 끌어가고 있었다. 네 살 터울인 미경과 애경, 이들 두 자매는 전생에서 무슨 철천지원수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비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태어났다. 물론 소설 밖의 강미경과 애경이도 네 살 차이다. <계속>
강미경, 그녀는 한때 내가 애절하게 사랑했던 남자인 이민우의 아내다.
사진은 얼굴 사진이 아닌 몸 전면 사진이었다. 제법 큰 사이즈로 두 손바닥 면적 정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백이 아닌 천연색이었다. 그녀는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나무에 기대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에선가 바람이 불어 머리결이 날리는 듯했다. 머리 위에 펼쳐진 파아란 하늘, 그리고 껍질이 유난히도 거칠어 보이는 거무스럼한 나무 기둥과 발밑에 깔려있는 갈색의 낙엽들이 가을 냄새를 물씬 풍겼다.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어도 나는 강미경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는 여전히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강미경이 소설가가 되었단 말인가?
약력을 보니 벌써 이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도 권위 있는 H문학을 통해 등단을 했고, 일간신문에서 실시하는 신춘문예에도 당선을 했었다. 그리고 문학상도 탔었다. 몰랐던 사실이다. 이곳 엘에이에 계속 살면서도 근 삼십여 년 동안을 한국사회와는 높은 담을 쌓아 놓은 나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약력 맨 끝에는 ‘버지니아 거주’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버지니아?’하고 확인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혹시 우리의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재빨리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삼각관계이긴 했으나 소설을 쓸 만한 소재는 아니다. 한 남자가 변심하여 다른 여자한테로 가버린 지극히 흔한 스토리였으니까. 그러나 소설엔 처음부터 상상조차 못했던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긴박감에 휩싸여 숨을 죽였고, 드러나는 내용에 점점 빨려 들어가면서 마치 내가 수사관이라도 된 듯 소설을 분석하고 있었다.
강미경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강애경, 그녀는 이십오 년 전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나와는 친구 사이였다.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이민우도 자연스럽게 강미경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은 바로 애경이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것이었다. 놀랍게도 소설에는 실명이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십이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한밤중,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요란하게 울렸다.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잉, 하고 유리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가 가슴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쫙 끼쳤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어요. 천정에 목을 맸다구요.”
뭔가에 쫒기는 듯 숨가쁘게 뱉어내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엉엉 우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경이 남편 톰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는데 무거운 둔기로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아찔함에 현기증이 났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나 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으나 이어지는 톰의 말은 확실한 현실이 되어 내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밤중에 웬 전화야”하고 남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톰이에요. 톰”
나는 부들부들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남편이 얼른 일어나 불을 켜고 전화기를 뺏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나는 큰 숨을 한번 내쉰 다음 냉수 한 컵을 죽 들이키고 재빨리 그 다음을 읽어내려 갔다. 소설에서 서술한 바에 의하면 애경은 센츄럴 엘에이 지역, 어느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고, 미경은 동생의 집에 가보기는커녕 그 동네에조차도 첫 발걸음이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얼음장 같은 냉정함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그렇지 이민우는 능히 그럴 위인이지.’
<<아파트엘 들어서니 천정에 목을 맸다는 애경이가 방바닥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에서부터 무릎 위까지 얇은 담요를 덮고,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린 채 두 눈은 감고 있었다. 목에는 노끈의 붉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쭉 뻗은 두 다리는 좀 퍼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약간은 얼룩덜룩해 보였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는 순간 가슴이 꽉 메어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면의 하얀 벽이 뱅뱅 돌며 눈앞이 노래졌다. 나는 애경이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애경아, 애경아”하고는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동생이 “언니”하고 부르며 벌떡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손이 가슴 한복판을 문지르고 있었다. 소설에서와 똑같이 강미경의 심정이 된 것이다.
<<“애경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언니가 너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언니를 용서해줘. 미안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바닷물 같은 눈물을 내쏟았다. 동생은 가해자이고 나는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왔던 현실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남편이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큰소리 내지 마. 소릴 죽여.”
톰은 한참을 조용히 훌쩍거리다가 고개를 젖히며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켰다.
“일 끝나고 들어오니까 저기에 저기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저기라는 곳을 쳐다보았다. 나도 고개를 들어 천장 시선을 돌렸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톰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말할 기력도 없는 사람처럼.
“내려놓으면 금세 도로 살아날 것만 같아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애경을 톰은 방바닥에 내려놓고 인공호흡을 시켰다는 것이다. 살려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숨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고 한다.
톰은 병원 랩에서 태그니션으로 일을 하는데 그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다. 정식직원이 아니고 병원에서 불러줘야만 하는 파트타임 직원이라 뜨내기 신세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로 밤에 일을 하며 요즘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 간 직원들이 많아 거의 매일 일을 했다고 한다. 밤 열두 시에 일을 끝내고 행여 아내가 깰까봐 살며시 들어왔는데, 애경이가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이 노끈을 풀고 처제를 내려놓았단 말이지?”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남편은 애경이가 목을 맸다는 샛노란 끈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는 나일론 줄을 여러 겹으로 꼬아서 만든 매끈매끈 윤기가 나는 아주 튼튼해 보이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끈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 말릴 때 쓰는 줄이라고 했다. 빨랫줄치고는 짧았다.>>
애경의 친구인 내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줄거리였다. 허구로 꾸민 소설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소설이 아닌 신문기사를 읽는 기분이었다.
아, 이럴 수가... 그렇다면 애경의 죽음이 교통사고가 아니였단 말인가?
갑자기 활자가 뒤엉켜 나는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니, 뛰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미경과 애경은 실명 그대로 표기가 되었으나 어느 한곳에도 이민우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계속 남편이라고만 호칭을 했다. 그런데 톰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이민우를 그대로 그려놨었다. 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 등, 정말 그는 영화배우를 뺨치게 잘생긴 남자였다.
이민우를 안 다음부터는 햇빛에 반짝이는 잎새 하나도 다 아름다웠고, 모든 사물이 그를 통해 보였었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인해 세상이 더 환하게 눈앞에 펼쳐졌고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태양, 밤하늘에 총총 박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바람 소리조차도 내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가느다란 별빛 하나, 소소한 빗방울 하나에서도 감동을 느끼며 내 영혼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축복으로 다가왔다. 촛불 한 자루가 방안에 밝음을 채우듯, 내 가슴의 사랑 한줌이 온 세상에 밝음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로 인해 내 맘속에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토록 짙게 드리워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다음은 주인공 미경이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줄거리를 끌어가고 있었다. 네 살 터울인 미경과 애경, 이들 두 자매는 전생에서 무슨 철천지원수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비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태어났다. 물론 소설 밖의 강미경과 애경이도 네 살 차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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