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불어라
2008.10.04 13:11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득한 옛날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오던 일이 생각난다.
중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의 일이니 40년 전쯤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일곱 남매의 장남인 나는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했다.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고 호롱불을 켜던 깡촌. 날마다 지게를 지고 들판에 나가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짐은 무겁고, 앞은 보이지 않았다. 짐이 무거운 것이야 참을 수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은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바람이 살을 에는 어느 깜깜한 겨울 저녁. 혼자서 뒷산에 올라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길은 어디에 있느냐고 우뚝우뚝한 나무들에게 묻고 물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이파리를 엎었다 뒤집었다 하면서 ‘살아보라’‘살아보라’ 온몸으로 나에게 말해주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날, 월출산으로 산 나무를 하러갔었다. 바위에 지게발통이 부딪히지 않도록 발이 짧은 산 나무용 지게를 지고 험한 산을 올랐다.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고 나니 배가 살살 아파왔다. 허리띠를 풀고 볼일을 보는데 어디서 왔는지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세상에, 이 서늘하고 깊은 산중에 파리가 살고 있다니!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면서도 내내 파리 생각을 했다.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사는 길도 죽는 길도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살아봐야 겠다고, 내 길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책 속에 길이 있을 성 싶었다. 마을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시골 동네에 책이 많을 리 없었다. 이웃마을은 물론 읍내까지 다니며 책을 빌려다 읽었다.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자격 검정시험을 준비하기위해 통신강의록을 주문했다. 당시 나로서는 꽤 큰돈을 지불했다. 책 표지가 갈색으로 되어있는 열 두 권짜리 한 질이 우송되어왔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다. 책을 잡으면 잠이 쏟아지곤 했다. 친구들을 피해 고구마 굴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겨울철 고구마를 저장해 두었던 굴은 여름철엔 비어있기 마련이라 책을 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굴은 시원했고, 입구를 막으면 모기란 놈도 얼씬 할 수가 없었다.
다음 해 검정시험을 보았다.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력은 적게 하고 많은 것을 얻으려 했던, 내가 참 도둑놈 심보를 지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빨랐다. 어느 날 읍내 장터에서 대학을 입학한 중학친구를 만났다. 어느새 4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충격이 컸다.
다행이 아버지의 건강이 나아졌고 집안 형편도 조금씩 좋아졌다. 늦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야간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내 나이 스물 한 살 된 봄이었다.
되돌아보면, 역경이란 극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견디어내는 것이었다. 어려움과 싸워 잘 견디어 내는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게임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어려움이 피부로 느껴오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의 유명 탈렌트가 또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들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길을 찾고, 어떤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폴 발레리의 한 구절이 다시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08년10월4일 미주한국일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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