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한국의 외진 읍내

2008.10.28 12:53

문만규 조회 수:63


두레박에 담아 올리는 우물 안 14년


글쓰기는

정적에 잠긴 내 안의 우물에서 하늘로 난 오직 하나의 문이었다.

그 속에서 세상과의 낯가림과 함께 놀았고, 우리는 너무 재미있었다.

눈물이 나는 날은, 어두운 우물 벽에 오래도록 기대 앉아 친구를 기다리다가

문득 올려다 보면 긴 대롱 끝에 동전 만 한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기도했다.

나는 세상 밖 사람들과 놀면서 하고싶었던 이야기들을 거기에 쌓아놓고는

때로 그걸 뒤적거리며 밤 새 웃기도, 울기도 했는데,

울었던 날은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 낯가림이 놀던자리에 쌓이곤 했다.


1995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유치한 내용이나 문체로 대상이 뚜렷하지도않은 다수를향해

나는 틈나는대로 씨부렁거려 봤지만,

실제 나의 이야기가 우물밖으로 나간적은 한번도 없다.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14년동안 제국의 변경에서 침묵하고 있었던

나의 시끌벅적한 비밀인 셈이다.

난 이렇게 멀리 살면서도 자전의 중심축이 나라는 망상에서 깨나지 못했었는데,

그건 역설적으로 내가 그 축을 너무 먼 원경으로 따라돈다는 자격지심일수도 있다는게

이야기들 곳곳에 부끄럽지만 듬뿍 묻어 날 것이다.

낯가림은 단 하나 뿐인 친구이고, 내 말문을 막아버리는 가장 미운 적이었다.

섬세한편인 나는 스스로도 하고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어떤 날은 아픈 사랑의 파편들이, 또 어떤 날은 유년에 두고온 가을 날 들이

백지의 시작화면을 펼치면 글자가되어 뚜벅뚜벅 나보다 앞서 걸어나갔다.

그런 날에는 뒤따라 가면서 웃다가 울다가 가슴이 메어,

깜박이며 재촉하는 저 ‘커서’를 붙들어두고 한참을 멀거니 있기도 했다.

한달에 몇 번씩 틈나는대로 나는 사람들과 한 두 페이지 씩 대거리를 벌이곤 했는데,

그렇게 14년동안 쌓인 울화가 제법 될것이다


입 하나라도 덜어보려고 인근마을의 좀 사는집으로 팔려온 듯 떠나온 우리는,

여기서도 변경으로 밀리고 거기서도 자꾸만 외진곳으로 밀려가면서,

한 파도에 이쪽 저쪽 고달프게 몸을 맏기며 살아 온 비운의 막내들이다.

몸만 달랑 옮겨놓고 저렇게 자취하듯 시작된 나의 이민기록은,

돈도 무엇도 아닌 어정쩡한 목표의식으로 인해 그리 치열하지도 못했고,

존재감에 대한 확신도 없이 혼자 떠들어대며 몬테크리스토처럼 14년동안 갖혀있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내 외향에 자신없어 그동안 한번도 한국에 나간 적이 없다.

그래도 좋고 또 변한건 없다.

청국장에 동태찌게와 소주를 마셨고, 조선일보를 읽으며, 밤에는 차렵이불을 덮고

한국여자와 잠을 잤으니까.

십 사년동안 나는 자폐아처럼 혼자 놀면서,

사라지는 내 흔적을 찾아 밀려나는 반대쪽으로 걸었고,

스스로 부르고 또 받아적으며 내 삶의 괘적을 따라 줄을 그었다.

누군가 그 줄을 밟으며 내게로 와 주길 바라면서.

제국의 틈새에 끼인 이민살이는

낯선 일을 한다는 정서적 부담감으로 하루하루를 남의 것으로 여겨지게도 했지만,

거기에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또 그만큼의 무엇’들이 있어서 저 세월이 반드시 아쉽지만은 않다.

한국의 빠른 변화는 우리에게 느리게 오고, 미국의 느린 변화는 우리에게 빠르게 오는데,

매끈하고 유려한 한국의 첨단 유행은 우리를 더욱 촌스럽게 하고,

이민자부터 줄여가는 미국의 복지는 우리가 최전방에서 몸으로 맞아야 했지만,

우리는 여기에도 거기에도 떼쓰거나 엄살부리지 않고 하회탈같은 웃음을 만들어왔다.

저 웃음 탈바가지 속의 내용물을 한 바가지 덜어, 가난한 이야기 보따리로 묶어가며

참여를 배려해 주신 미주 문인협회의 말석을 지켜보려 한다


Los Angeles,
한국의 외진 읍내에서 문 만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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