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이가 왔어요
2016.01.12 08:26
심쿵이가 왔어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석철
내 고향 앞산은 상당히 골이 깊고 가파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이 산 전체가 화전민들의 터전인 생명의 젖줄이었다. 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사이판 밀림지대보다 더 으스스하여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는 산으로 변했다. 그런 산을 내가 올라가 약초를 찾으려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앞을 보니 큰 멧돼지가 달려드는 게 아닌가? 엄청나게 놀라 나는 정신없이 데굴데굴 뒹굴며 도망쳐 우리 집으로 왔다. 대문을 열고 마루로 올라가는 순간, 아~ 그 멧돼지가 따라와 나의 바지 끝자락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눈을 뜨니 꿈이었다. 돼지꿈을 꾸면 재물을 얻는다는데, 복권이나 살까? 한참 뒤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개꿈이란다. 그래도 돼지꿈을 꾸었는데….
작은 며느리가 시집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버지 생일상을 주말에 차려 준다고 천안으로 오라고 했다.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부부와 큰아들 가족 그리고 작은아들 가족이 모두 모이니 여덟 명이었다. 나 혼자 시작된 가족이 40여 년 만에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혼자서 온종일 정성을 다하여 차린 저녁이 진수성찬이었다.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고 두 아들 내외의 선물과 함께 손자 손녀는 편지를 써서 읽어 주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난 우리 부모님께 이런 자리를 만들어 드리기는 했지만,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노래방에 갔는데, 두 며느리와 손자 손녀와 함께하기는 처음이었다. 어찌나 잘 노는지, 옆방에서 구경할 정도였다. 두 아들은 원래 노래 실력이 뛰어나지만, 특히 우리 손자 상민이가 타고난 실력으로 동요는 물론이고 요즘 유행하는 신곡까지 너무나 잘 불러 우리 가족 모두 감탄했다. 두 며느리도 아내와 함께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두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가 참 좋았다. 앞으로 가족 모임에는 노래방이 필수 코스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작은아들 내외가 작년 봄에 이사했지만 내가 허리 수술을 하여 가 보지 못했다. 방 두 개와 거실은 깔끔하게 정돈 된 모습이 신혼집으로 썩 잘 어울렸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두 아들 부부는 각각 방으로 보내고 우리 부부는 거실에서 손자 손녀와 함께 자기로 했다. 거실에 누워 손자 손녀와 “끝말잇기”를 하다 보니 한참을 깔깔대며 웃다가 어느덧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과 6남매가 함께 누워 뒹굴며 살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가 정말 그리웠다.
두 며느리가 일찍 일어나 아침에 미역국을 끓인다고 분주했다. 작은 며느리를 보니 얼굴이 좀 창백했다. 아마도 시부모님과 손위 동서 가족이 다 온다고 하니 음식 준비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천안 주변이라도 구경하고 점심까지 대접하려는 걸 뿌리치고 내려왔다. 우리 부부가 내려와야 좀 쉬었다가 내일 각자 출근할 게 아닌가?
며칠이 지나 작은 며느리한테서 사진 한 장이 왔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이 쿵꽝쿵꽝! 태아 사진이었다. 반가움에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늘 병원에 갔는데 임신 7주째라네요. 아버님.”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임신인가? 아들이 벌써 서른여섯인데, 더 없이 감사한 일이다. 내 생일 최고의 선물이었다.
내가 멧돼지 꿈을 꾼 지가 한 달 보름 전인데, 설마 태몽을 꾸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향의 앞산은 옛 화전민의 생명줄이었는데, 여기에서 새 생명을 얻다니. 돼지꿈을 꾸면 재물이 들어온다는데,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꿈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큰 재물과 높은 벼슬을 동시에 타고났다고 하지 않은가?
몇 시간이 지난 뒤 작은 며느리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님, 아까 임신 소식을 듣고 심장이 쿵꽝쿵꽝 뛴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태명을 ‘심쿵’이라고 하려고 해요.” 심쿵이란 이름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꿈에 그렇게 큰 멧돼지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더니 그게 바로 우리 심쿵이었구나!’ 인연이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 집에 “심쿵이가 왔어요!”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무탈하게 잘 자라서 내 품에 안길 날을 기다려 본다. (20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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