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그 베일을 벗는다

2016.01.12 17:35

이종희 조회 수:116

36년, 그 베일을 벗는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수필창작반 이 종 희



설렘이었을까?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남부터미널에 내렸다. 교대역에서 지하철을 환승해서 선릉역까지 간다고 해도 1시간 이상이 남는다. 양주에 사는 ㅇ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집에서 출발하려고 한단다. 다시 ㄹ에게 연락했다. 역시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괜스레 짜증이 났지만 조급하게 서둔 내 탓이 아닌가.

1.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을 탔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사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눈을 감은사람, 하나같이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선릉역에 도착했다. ㅇ이 알려준 대로 3번 출구로 나왔다.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내가 바로 들어갈 곳은 없었다. 아직도 1시간여가 남았으니, 주책없는 선생이라 비웃으리라 생각했지만 마땅히 기다릴 곳이 없어 ㅈ에게 전화를 했다. 반가운 목소리로 출구 옆 골목에 보이는 음식점에 가 있으란다. 넓은 홀에 깔끔하게 단장한 음식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메뉴판을 보니 저렴해서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전화 연락을 받았는지 종업원이 친절하게 자판기 커피까지 뽑아주며 쉬고 있으란다.

20여 분이나 지났을까 중년부인이 된 ㅈ이 나타났다. 36년 전의 앳된 얼굴을 더듬고 있었는데. 유난히 눈이 또랑또랑했던 익은 얼굴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의 살아온 인생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나를 놀라게 한 첫 번째 이야기는 6학년 늦가을에 서울로 전학했다고 한다. 까마득히 잊었던 사실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사실도 이날 알았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할머니와 함께 두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전학하게 되었단다.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으니 아버지의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부동산에 관심을 두고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지금은 전전세업이라는 신종사업을 개척하여 일하고 있었다. 건물주에게 건물을 임대해서 입주자에게 다시 전세를 주는 사업이다. 강남에서 자기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니 여장부임에 틀림없다. 대학원에 나가 아직도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하고.

ㅈ이 ㅇ과 통화를 하더니 곧 도착한다며 식사하러 가자고 했다. 이 자리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100여m쯤 걸어가니 고급음식점이었다. 예약을 한 듯 바로 안내되었다. 잠시 뒤에 ㅇ이 도착했다. 언제나 예의를 챙기는 사람이 이날도 절을 해야 한다며 자리에 앉으란다. 자리가 마땅찮기도 하거니와 절 받는 내 자신이 쑥스러워 손사래를 쳤다. 한정식 음식이 한 가지씩 나왔다. ㅇ와 소주잔을 나눠가며 36년 전의 에피소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농악을 배우던 이야기를 하다가 ㅇ이 눈시울을 붉히는 게 아닌가. 상쇠 뒤에서 꽹과리를 치며 껑충거렸던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중도에 하차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어머니가 하얀 상의를 준비해주지 않아서 속이 상해 빠졌다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알았다면 어떻게든지 해결했을 텐데…. 가난의 아픔에 눈시울을 적시는 ㅇ이 안쓰러웠다.

또 하나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소풍 때 김밥을 싸온 ㅇ의 이야기다. 기억이 떠올랐다. ㅇ은 자신이 김밥을 싸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내게 감사하고 있었다. 가난했기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선생님 도시락을 싸올 수 있었단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가난해서 쌀 수 없다고 거절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기회를 주어 고마웠다니 반장으로서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 반면, 김을 사고 찬거리를 장만해서 도시락을 준비했던 가난한 그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니 죄송스러웠다.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깍듯이 대해준 부모였다. 나는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는 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ㅇ은 소풍을 마치고 돌아갈 때 보물찾기를 하고 남은 연필을 주었는데 그렇게 고마웠다니 얼마나 순진한 아이였던가.

2.

어제 나오지 못한 제자들이 고속버스터미널 부근 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해서 나갔다. 서울 날씨는 전주와 확연히 달랐다. 추위가 매서웠다. 반포역 출구로 마중 나온 ㄹ을 따라 음식점으로 갔다. ㅊ과 ㅅ, 그리고 낯모르는 남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ㅊ은 오동통, ㅅ은 날씬, 남자는 10여 년 혼자 살던 ㅊ과 6개월 전에 재혼한 사람이었다. 이날도 36년 전의 에피소드는 쏟아졌다. ㅅ은 앉자마자 나를 짝사랑했단다. 그러면서 선생님들 중에서 인기 짱이었단다. 그래서 그랬을까? 유난히 내 눈과 자주 마주친 것 같다. ㅊ은 엉뚱한 추억을 꺼내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한 친구가 지우개를 잃어버렸는데, 자기 지우개를 훔친 것이라고 했단다. 아침에 새로 산 지우개였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지우개가 때가 묻을 리 없었는데, 본래 자기 손이 까매서 그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자기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셈이다. ㅊ의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

이날도 농악을 배우면서 가려졌던 이야기들이 하나 둘 들춰졌다. 농악복장을 갖추느라 어깨와 허리에 두르는 띠를 준비하면서 생긴 일. 띠 하나조차 준비하기에도 힘들었다고 하니 그때도 살기가 팍팍했던 나라였다. 출근 전 한 시간, 배정된 시간 한 시간, 퇴근 후 한 시간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은 파김치가 되었다. 윗도리가 등에 찰싹 들러붙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아이들로부터 힘들어 못하겠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은 배우려는 의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배우기 싫었다면 불평불만으로 확산되었을 텐 데 말이다. 대견스러웠고 고마웠다. 하기야, 나도 호루라기를 불어대니까 입술이 성할 날이 없지 않았던가. 30여 분간을 쉬지 않고 뛰어야 했으니까. 어찌됐거나 농악이 인연이 되어 내 반이 아닌 아이들에게까지 추억이 되어 찾아주니 고마웠다.

교직 7년 차에 만났던 제자들과 추억을 더듬었던 12월은 너무 행복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심하게 다그쳤던 일을 늘 후회하고 있는데, 내게서는 꾸지람을 받은 기억이 없다니. 오히려 내 귀에 듣기 좋은 추억만 벗겨내는 그들이 고마웠다. 그들도 이제 반백이다. 나와 스스럼없이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어리광을 부리는 ㄹ은 고속도로공사로부터 톨게이트를 하나 인수받아 운영한단다. 이제는 자기들도 살만큼 산다며 모직 목도리를 둘러주며 봉투까지 건네 열어보란다.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뽀뽀세례까지 덤으로. 액수가 대수겠는가. 어제는 건강을 챙기라며 종합비타민과 꽃 화분을 받았는데….

36년 만에 벗겨지는 이들의 베일 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들과 세 차례의 만남은 얼어붙는 세밑, 내 가슴을 훈훈하게 녹인 시간이었다. 내 두 번째 수필집이 가교가 되었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2016.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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