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내리는 비는

                                                                                                           조옥동

모래알에 부딪치며 이리저리 뛰노는 어린 햇살이 눈부시다. 멀리서 산더미로 밀려오던 파도가 모래톱에 닿자마자 기세를 잃는다. 하늘을 때리던 위용이 스르르 무너지는 해변에서 허무와 쇠락을 만나다. 세상 골목을 서성거린 무겁고 지루한 나날, 모처럼 바닷가에 서니 자신도 한 번 물보라 펼치며 하얗게 깨끗이 부서지고 싶다.

  차츰 낮아지던 서쪽 하늘, 붉게 타오르며 장엄한 행진곡이 퍼질 무렵 돌아가는 발길위에 어서 가라고 재촉하듯 눈물 같은 가랑비 뿌리는 오후가 있다. 저녁놀 사그라지는 수평선 위에서 울렁이던 핏빛 물결은 금세 검은 장막으로 변하고, 바다가 거대한 눈을 감을 무렵 저녁바람이 사분대던 빗줄기를 싸안고 육지로 향하다. 숲속 나뭇잎에 기대어 함께 울고 싶던 바람은 젖은 몸을 흔들어 숲을 흐느끼게 만드는 심술쟁이다.

눈물 서로 닦아주며 밤을 지새울 무렵, 날아 온 산새들 맑은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숲속의 젖은 눈빛들 반짝 거리고 하늘은 깨끗이 씻은 얼굴 슬며시 드밀다.


  어린 소녀 외동딸을 위해 아버지는 마당 한 편, 사랑방 대청마루 앞에 축대를 올리고 널따란 화단을 만드셨다. 꽃밭에 꽃 뿌리와 모종을 심고 가꾸는 동안 소녀도 자라고 있었다.

개나리가 맨 먼저 노랗게 앞치마를 두르고 나오면 난초와 모란 백합이 피고, 키다리 해바라기 아래 봉숭아꽃 채송화 엎드려 웃을 때 앵두와 치자 꽃 하얗게 피고 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햇빛은 화단의 화초를 시샘하며 그리 화창했던가. 코스모스 하늘거려 고추잠자리 떼 맴돌면 매미들 높이 매달려 슬피도 울던 감나무와 살구나무, 복숭아 자두, 빨간 골무를 닮은 꽃이 예쁘게 달린 석류나무 그리고 청포도를 주절주절 매달아 주던 가슴 너른 배나무 등 모두 외동딸의 친구였다. 저만치 높게 바위에 올라 탄 부엉 산은 하루에 한 번씩 그림자를 타고 내려와 나직한 울타리 따라 실과나무들 꽃피고 열매 자라는 모습을 살펴보곤 뒷짐을 쥐고 어둠속으로 슬며시 사라졌다.


 무덥고 긴긴 여름날, 솔부엉이 우는 소리 부엉 산 산허리를 감고 돌아가면 쏟아지던 소나기, 화단의 목마른 꽃부리는 처마 밑 낙수소리 맑은 리듬에 장단을 맞춰 입을 연다. 금세 한 마당 꽃밭은 귀에 귀를 맞춰 술렁거리다 소곤소곤 속삭임으로 소낙비 내리는 꽃밭은 정겹게 어우러졌다. 왠지 소낙비는 빨리 앞들을 건너 물러가고, 하늘을 씻어 낸 듯 저녁별 하나 둘 서둘러 놀러 나오는 여름밤, 어린 소녀는 어둠속에 서서 너무나 머나먼 별나라를 오래토록 올려보다 혼자서 두려웠다. 아니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 조용히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멀리서 달려오는 고적한 하품소리, 밤기차는 너만 깨어 있는 줄 아느냐며 나를 끌어 기적소리에 태우고는 이름 모를 적막한 간이 정거장에 내려놓다.

어둠의 바다위에 가로등 홀로 깨어있다. 적막을 바느질 하던 불빛조차 나른히 졸고 있는 밤, 이슬비가 내린다. 말 못하고 돌아서는 쉴 곳 없는 설음들은 어디에 머물라고 야속하게 이슬비는 내리는가. 살며시 살펴보니 흐릿한 불빛 속에 뉘의 고단한 발길을 자분자분 적시며 따라가고 있는 동행자가 보인다. 있으라고 붙잡는 가늘고 가는 손길이 있다. 바람도 잠속에 든 고요 속을 초라한 꿈을 꾸며 가는 나그네 눈썹이 젖어 눈물 흘리다.


 사막沙漠은 사막死漠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평균 기온이 가장 덥고, 해면보다 86m 낮은 데스밸리(Death Valley)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중부 모하비 사막의 북쪽에 위치한 깊은 분지로 한 때 기온이 섭씨 56.7도를 기록할 만큼 뜨겁고 건조한 사막이나 '죽음의 계곡'이 아니라 정말 가볼만한 '오묘하고 아름다운 계곡'이다. 1849년 유타 솔트레이크에서 캘리포니아로 금광을 찾아 이주하던 그룹 중 한 무리가 길을 잘 못 들어 데스밸리로 들어와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결국 이곳을 빠져 나게 되는데 그때 생존자들이 "Good bye, Death Valley"라고 말한 것이 ‘죽음의 계곡’이라 이름 붙은 사막이다. 내가 처음 가본 사막이다.

사막에도 봄은 오고, 이 사막의 모래 바람 사이로 지그재그 빗금을 치며 봄비가 차분차분 내리면 굳은 땅이 긴장을 풀고 길가와 언덕엔 사막의 풀꽃으로 카펫을 펼친다. 밤하늘 별들만 쏟아지는 호젓한 사막, 모래 구릉(丘陵)을 바쁘게 오르는 실뱀이 허물을 벗는 밤, 촉촉이 내리는 사막의 봄비는 마르고 시든 영혼의 생기를 깨우려 조용히 실핏줄 마디마디 열어주는 부드러운 입술들이다. 허나 무엇보다 사막은 모래둔덕 둥글게 호흡을 삼키며 밤마다 내려오는 별들과의 입맞춤으로 죽음의 계곡, 사막을 한층 신비롭게 만든다.


 비


한 때는 떠돌이 구름 되어 하늘아래 굽어보며

눈물의 무게 견딜 수 없을 때

기다림만 간절한 언덕 위에 거꾸로 떨어지는 날

슬프도록 찬란한 무지개 함께 들어 색색으로 펼치고

메말라 애타는 가슴들 씻어주며 토닥이고 흐느끼다

하늘자락 붙잡고 내려앉은 호수를 만나면

목욕 하고 머리 감는 빗방울

하늘고향 바라서 다시 오르다

정다운 마을에 내려 와

산들바람 함께 춤추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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