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기 인생

2016.02.20 09:22

김현준 조회 수:34

맛보기 인생

전주안골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며칠 전 대전 코스트코 대형매장에 갔었다. 꼭 무엇을 사겠다는 것보다 매장을 둘러보는 눈요기를 겸한 나들이였다.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아내와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식품판매장에서 아내는 부지런히 맛보기 음식물을 가져왔다. 점심 무렵 시장하던 참이라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이쑤시개에 찍어주기도 하고, 작은 종이컵에 담아주기도 했다. 등심구이와 연어회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다. 안주를 먹었으니 주류코너에서 와인 한 잔을 맛보고 닭튀김으로 입맛을 다셨다. 햄 한쪽을 먹고서는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고 맛본 뒤 그냥 돌아서기가 미안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러는 걸 어찌하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나의 생애는 이것저것 조금씩 맛보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건성건성 맛만 보고 지나쳐버린 것은 아닌지…….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농구를 좋아했으나 그때뿐이었다. 축구와 배구도 해보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탁구와 배드민턴을 쳐보다 골프에 입문했다. 요즘 골프채 가방은 거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수영을 배우고 스케이트도 타보았지만, 맛보기 정도였다. 여가에 장기, 바둑을 즐겼던 젊은 날도 있었고, 고스톱을 치며 날밤도 새웠다. 등산에 흠뻑 빠진 때가 있었고, 낚시에 미친 시절이 아스라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다방 레지가 건네는 모닝커피를 마셔보았고 비싸다는 루왁 커피 맛을 본 적도 있다. 요즘은 아메리카노 커피도 잘 마시며 봉지 커피도 즐긴다.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고 소주, 맥주, 양주를 맛보았다. 마오타이주도 마셨고 보드카와 럼주도 마셨다. 곶감을 즐기며 바나나도 먹고, 망고와 멜론도 먹어보았다. 물고기도 잡고 토끼사냥도 해보았다. 죽을 고비도 넘겨보았고 교통사고도 당했다. 이런 병도 앓아보았고 저런 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외국어로 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배워보았지만, 지금은 도로아미타불이다. 독서를 유일한 취미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의 독서생활은 보잘 것이 없다. 한때 시를 쓴다고 끙끙댔지만, 이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배워보았건만,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을 뿐이다. 많은 곳에 여행을 다니며 명승고적을 답사했다. 자전거와 마차도 타보았고 전차, 기차, 자동차를 탔으며, 배와 비행기도 타보았다. 이 학교에 다니고 저 학교도 다녔으며, 이런저런 학교에 근무도 해보았다.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하고 데모 현장에도 가보았다. 야당에게 투표해보았고, 여당을 믿어보기도 했다. 후진국에서 살았고 개발도상국에서도 살았으며, 선진국 문턱에서도 살고 있다.

개근상과 우등상도 받았고 훈장도 받았다. 좋은 사람도 만났고 나쁜 사람도 보았다. 세월의 풍상 속에 많은 친구가 내 곁을 스쳐 갔고, 나도 친구들 곁을 떠나왔다. 군대에 가보았고 예비군 훈련도 지겹게 받았다. 여자를 사랑해 보았으며,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그들을 키워 혼인시켰다. 손자 손녀에 대한 사랑도 알았지만, 부모, 형제와의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다음 세상을 그리며 성당에도 가보았고 교회에도 나간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보았고, 신흥종교 교단에도 나가보았다.

10대의 풋풋한 삶도 맛보았고, 청년, 중년, 장년의 삶을 살아왔다. 농촌 초가집에서 대가족으로 살았고, 도시의 아파트에서 부부만 살기도 했다. 지금은 조용히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중 몇 가지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무엇이든지 진득하게 몰두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살아온 것 같다. 관광지에서 한 가지라도 놓칠까 봐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무엇이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쫓기는 것도 아닌데, 남은 생애 동안 깊이 파고들 것을 찾고 싶다. 수필에 입문한 지 5년이 지났다. 슬그머니 꾀가 나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그렇다고 달리 몰두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필의 맛보기는 끝났다. 더 깊이 몰두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나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냇가 자갈밭에서 조약돌을 던지며, 시골길을 걷고 맹꽁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싶고, 삼베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걷고 싶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을 노래한 천상병 시인은 세상 눈요기를 맘껏 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도 못 다한 삶을 맛보기 위해 분주하게 나들이를 해야 할 것 같다.

(2016. 2. 20.)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47
어제:
674
전체:
228,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