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킥킥 웃었었다. 부부 싸움 중인가?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있는 여자와 어깨를 숙여 힘겹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옆에서 보면 영
락없는 소문자 h다. 앙탈 부리는 아내를 억지로 붙잡아 달래느라 얼마나 힘이 들까. 70은 족히 넘
어 보이는 노년의 나이에도 남편 속을 긁느라 저러는걸 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람 사는 모양은
똑 같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Mrs. Fox의 제자들이 모여 제각기 갈고 닦은 춤
실력을 뽐내는 날. 허수아비 둘이 붙어 삐거덕거리는 것 같은 바싹 마른 부부. 이멜다 여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여자와, 코가 동그랗고 작달막한 전형적인 필리핀 남자. 수박 두 개를 매달아
놓은 듯 볼록 솟은 엉덩이로 경쾌하게 리듬을 타는 멕시칸 연인. ---- 큰 홀을 종횡으로 가로
지르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신나는 폴카 곡이 끝나고 돌아다보니 여태도
h자 부부는 어색한 모습 그대로 춤을 추고 있다. ‘아직도 맘이 안 풀렸나? 여자 고집이 참 세기도
하네.’ 곁눈으로 슬쩍 흉을 보니 표정이 싸운 사람들 같지가 않다. 남편이 손을 아래로 뻗쳐서
돌리면 허리가 굽어진 채 손가락 끝을 겨우 잡고 도는 모습이, 자세히 보니 허리가 90도로 굽은
고부랑 할머니다. 고운 화장에 울긋불긋 화려한 블라우스로 단장한 할머니. 아내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춤을 추어주고 있는(추어주고 있다는 표현이 정말 맞다.) 할아버지. 백인치고 꼬부랑
할머니는 없던데, 사고나 병으로 등이 굽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
다운 한 폭의 풍경화로 변해버린다. 멋진 춤 솜씨로 홀을 누비는 필리핀 여자보다, 금테 안경에
탄탄한 어깨로 아내를 리더하고 있는 남자보다 하얀 머리의 이 할아버지가 더 멋있어 보인다.
외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가끔씩 가슴 찡한 부부애를 볼 때가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과는 절대로 살수 없어 이혼을 해야 하는 문화를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생활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다. 아니, 정말 사랑하며 살고 있다.
몇 년 전, 남편 회사 파티에 참석했었다. 리셉션에서 칵테일을 들고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한
여자의 허연 등판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지퍼 사이로 까만 브래지어
끈이 가로로 선을 긋고 있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어 “너 등 뒤에---.” 조그맣게 말했는데
“하하하, 지퍼가 고장 났어.”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 더 호탕하게 웃었다. 섹시하지 않냐며 개구
쟁이처럼 톡톡 아내의 등을 두드려주던 남편. 창피하다며 질색할 내 남편과 비교하며 은근히 부럽
기도 하고 그들의 사랑이 예쁘기도 했다.
T.V. 드라마에서는 사랑이란 젊은 사람들만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중년을 넘기면서
노년의 부부 사랑을 생각을 해본다. 스탠포드 법대에서 동갑내기로 만나 법조인 부부로 살아온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 샌드라데이 오코너는, 칠순의 남편이 치매에 걸려 양로 병원으로
갈 때는 참으로 마음이 아팠는데, 거기에서 만난 다른 할머니와 사랑에 빠져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행복하다고 했다. ‘바람난 남편? 괜챦아!’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고 끊임 없이 희생하고 끊임없이 이해해주는. 그런
수고와 희생과 이해가 세월 속에 스민 부부의 사랑은 얼마나 무겁고 깊고 한편 향기로운 것인지.
29년 전, 결혼이 뭔지 의미도 모른 채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푸석푸석 먼지 이는 조그만
텃밭을 둘이서 함께 들여다보며 물도 자작하게 뿌리고 작은 햇살도 받아 부으며 도란도란 시작
했었는데 어느 새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커다란 과수원이 되었다. 때론 비바람에 마음 조리기도
했고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망울에 환호하기도 한 시간들. 돌아보면 한 장의 그림을 넘긴 것 같은데.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것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허리가 구부러져 일상이 불편할지라도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함께 춤을
즐기는 노부부를 바라보며 그들의 세월 속에 녹아있을 많은 추억들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부부마다 그들이 가꾼 정원이 있을진대. 삶 한가운데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서 정원을 내려다
보며, 구석구석 숨어있는 자신의 옛모습을 찾아 꺼내어보는 마음이 어떨까. 서로에게 원망이
샘솟았던 자리, 미움이 살아나왔던 자리, 기쁨이 하늘 가득 차 올랐던 자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부부라는 그림이 되어 앉아있겠지.
그들의 정원을 생각하며 나의 정원도 들여다본다. 미워했던 자리에 오면 희미해진 원망과
미움이 불쑥 살아나오고, 기뻐했던 자리에 오면 또 안개 같은 기쁨이 살아나온다. 아픈
기억들은 모두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좋은 기억만, 행복했던 순간들만 화려한 꽃들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삐죽삐죽 튀어나와 숨어있는 아픔들을 툭툭 건드리는 가지들은 모두
잘라버리고, 쳐다보면 고맙고 측은해지는 마음만이 자랄 수 있는 착한 나무들만 자라는
정원을 만들고 싶다. 가지치기가 잘 된 마음의 정원을 꾸며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끝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예쁜 춤을 추는 노년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