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세신

2016.03.14 18:49

변명옥 조회 수:103

관수세신(觀水洗身)

신아문예대학 수필 금요반 변명옥

새벽에 목이 타는 것 같은 갈증으로 머리맡에 있는 자리끼를 벌떡벌떡 마셨다. 어렸을 때 손님이 오시면 밤에 드시라고 물을 떠다드렸는데 ‘자다가 왜 물을 드실까?’ 궁금했었다. 그 때는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그 집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에 대한 주인의 배려였다.

새벽부터 잠 들기 전까지 물을 떠나서 잠시도 살 수 없다. 먹는 일부터 씻는 일, 빨래, 청소 등 항상 물을 사용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물의 고마움을 이야기하고 물을 아껴 쓰라고 교육했었다. 하지만 물의 고마움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 들면서이다. 이제 철이 든 것일까?

집은 크고 멋진 집이 아니라도 돌담 옆으로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마당에 옹달샘이 있어 바가지로 물을 떠서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집을 지었으면 하는 게 어릴 적 내 소망이었다. 물만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사월 초파일 오색찬란한 꽃 속 아기부처의 어깨위로 물이 흘러내린다. 부처를 씻긴 물을 따라 거짓되고 못된 마음도 함께 사라진다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물로 세례를 받는다.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성전 앞에 흐르는 물에 손과 발, 얼굴을 씻고 성전에 들어간다. 인간이 물로 몸을 씻는 것은 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행해지는 의식이다. 우리 조상들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아기도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있다가 나와 울면 정성스레 씻기고 옷을 입힌다. 금방 태어난 아기를 물속에 넣으면 양수속의 기억으로 헤엄을 친다고 한다. 자라면서 헤엄치는 것을 잊고 다시 배워야 물에 뜰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4명이 ‘여름 냇가’를 교장실 마이크 앞에서 불러서 교장선생님이 주신 과자가 황송해서 바로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시냇물은 졸졸졸’ 하는 가사가 좋았고, 냇가의 버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해서인지 곡도 경쾌했다. 처음으로 전교생이 들을 수 있는 마이크 앞에 서서 어찌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더러워서 못 보아 줄 거다. 동물들은 안 씻어도 깨끗한데 사람은 하루만 안 씻어도 더러우니 물처럼 고마운 것은 없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그 할머니가 나이가 많아지고 눈이 어두워 집에서만 씻으셨다. 겨울 방학 때였다. 오랜만에 친정에 간 내가 목욕탕에 모시고 간다니까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말렸다. 목욕이 뭐가 위험할까 의했다. 할머니가 정말 가시고 싶어 하는 눈치라 모시고 갔다. 목욕탕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뿌연 김이 서리고 더웠다. 할머니를 다 씻겨드리고 마무리로 할머니의 머리에 물을 부어 헹구어드리는데 할머니의 기색이 이상했다. 눈을 감고 아무 기척이 없었다. 순간 가시면 안 된다고 말리던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도와주세요!”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 할머니를 안고 옷 입는 곳으로 나왔는지 모른다. “할머니, 할머니!” 하고 애타게 부르자 잠시 뒤에 눈을 뜨셨다.

“깨끗이 씻고 그만 가 벼렸으면 좋았을 것을….”

잠깐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간 손녀의 마음을 모르시는지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지막을 깨끗이 씻고 가고 싶은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알 것 같다. 얼마나 개운하셨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할머니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큰살림을 맡아하시다가 병이 나서 두 달 넘게 앓으셨다. 어느 날 자손들이 다 모이자

“오늘 내가 미시에 떠날 것이니 모든 준비를 하라.”

고 하셨다. 머슴들에게 밭에 있는 수박과 참외도 따다 창고에 넣어 놓으라고 하며 집안일을 챙기셨다. 물을 데워 큰 함지박에 붓고 들어가 깨끗이 씻으시고 주머니 5개를 지으라고 해서 양 손 발톱을 깎아 담고 빠진 머리카락을 담으라고 하셨다. 서방님을 불러 유언하시고 자손들에게 내가 떠나도 절대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눈을 감으셨다. 가족들이 우니까 다시 눈을 뜨시고 울지 말라고 하시고 영원히 떠나셨다. 평범한 분이 아니셨으니 당신의 마지막을 알고 떠나실 준비를 마치고 가셨다. 정말 옛 이야기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마지막 가는 순간에도 물로 씻는다.

물은 해 맑은 이슬로, 시원한 장대비로, 함박눈으로, 우리 곁에 온다. 하늘의 구름, 안개, 아지랑이도 모두 물이다.

자공이 물을 바라보고 있는 공자에게 물었다. 물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가요? 첫째 물은 여러 생물에 두루 도움을 주나 억지로 하지 않으니 덕(德)이 있다. 둘째 낮은 곳으로 구불구불하더라도 반드시 지리를 따르니 의(義)와 닮았다. 셋째 꽐꽐 솟아나며 끝이 없으니 도(道)와 닮았다. 넷째 물길을 터주면 메아리 소리처럼 재빨리 흘러가고 백 길의 골짜기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떨어지니 용(勇)과 닮았고, 다섯째 반드시 평평해지니 법(法)이 있고, 여섯째 한 곳을 채우더라도 고르게 할 일이 없으니 정(正)과 닮았다. 일곱째 눈에 뜨지 않을 정도로 작고 미미한 곳까지 두루 미치니 찰(察), 여덟째 같은 곳을 들고 나며 스스로 깨끗해지니 선화(善化), 아홉째 강이 구불구불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나아가니 지(志)와 닮았다. 그래서 군자는 큰 강을 바라보며 그 특성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온천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더 없이 평안해 보인다. 고민이 있지만 따듯하게 흘러내리는 물에 나를 맡긴다. 인간세상에서 물이 이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터키의 온천을 찾았을 때 파란물이 넘실대는 하얀 대리석 수영장에 흰 테이블과 빨간 천으로 장식된 멋진 장소에서 밤에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 그 자체였다.

물은 한 없이 너그럽고 따듯하게 사람을 품어준다. 물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사람의 인생살이나 지나가버린 시간과 같다.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물이 떨어지는 물시계 같다. 바닷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수십억 개의 반짝이는 비늘처럼 살아 꿈틀거려서 10여분 동안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물의 9가지 덕에서 한 가지라도 실천하여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자기 손으로 깨끗이 씻고 마지막 길을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부터 열심히 기도하면 나도 그런 소원이 이루어지려나 모르겠다. 한 방울의 물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깨끗이 닦아주는 지혜를 배워야겠다.

(2016. 3. 14.)

❈미시(미시):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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