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와 친정아버지

2016.03.24 08:18

오창록 조회 수:71

약사와 친정아버지

안골 은빛수필문학회 수필창작반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오창록

우리 집에서 가까운 동네약국이 있다. 약국 안에 들어서면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약사가 있고, 그의 옆에는 언제나 노인이 앉아있다. 백발이 듬성듬성하고 연세가 들어서인지 허리가 구부정하다. 언뜻 보기에 연세가 80세도 넘어 보이는 남자노인이 항상 같이 근무하고 있다. 때로는 보조하는 여자 약사가 있을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여자약사와 노인이 손님을 맞이할 때가 많다.

내가 이 동네에 살게 된지 어느새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단골 약국이 따로 있어 가까워도 이웃 약국을 찾아갈 일이 별로 없다. 내가 그동안 다닌 약국은 30년 단골이다. 나의 학교 후배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며 나와는 사돈지간이다. 그 약사가 나를 부를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를 사돈이라고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젊어서는 몸이 아플 일이 별로 없으니 약을 사러 가는 것보다는 놀러 가는 일이 많았다. 바람도 쏘이고 때로는 술도 마셔가면서 한때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건강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병원에 다니는 일과 약국에 가야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내외가 혈압약은 기본이요, 여기저기 아픈 곳이 하나둘 생겨나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들러 약국에 가면 약을 한 뭉치씩 사가지고 온다. 또 그동안에 약을 사야 할 일이 있으면 미리 메모를 해 두었다가 가는 길에 한 번에 사가지고 오기도 한다. 이러한 사정이니 비록 이웃에 가까운 약국이 있어도 잘 찾아가지 않는다. 가끔 운동을 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파스를 사러 간다.

그날도 오랜만에 동네약국에 들러서 소화제와 피로회복제를 사면서 보니 약사와 노인은 오늘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앉아 있다. 약사는 병원의 처방전을 받아 약을 조제하고, 노인은 손님이 오면 간단한 소화제나 파스정도는 노인이 판매를 한다. 오늘은 어느 손님이 돈 대신 카드를 내밀었는지 약사가 “아버지, 여기 카드 결제해주세요!"한다. 몇 년 전부터 항상 두 사람이 같이 근무하는 것을 보았지만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나쳤다. 그런데 오늘 유심히 살펴보니 두 분의 얼굴이 꼭 닮았다. 이러한 모습을 ‘붕어빵’ 같다고 하는 것 같다. 물어볼 것도 없이 부녀지간이 틀림없다.

80세도 지난 아버지를 옆에 모신 채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가 참으로 존경스럽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늙어가기 마련이다. 젊어서는 누구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일터에서 물러나게 되면 기력도 없고 소일거리가 없다. 할 일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으면 점차 고독과 소외감에 빠지게 된다. 나중에는 우울증이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해 노년을 힘들게 지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 나이가 많은 부모를 위해 자식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지,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 중 18만 명은 자녀와 함께 지내고 있으며, 74만 명은 실제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 전체의 16%는 가족과 만나지 않거나 연간 1~2회 정도만 만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우리는 이토록 일부 독거노인들과 가족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산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도의가 땅에 떨어졌으면 지난해 국회에서 ‘불효자 방지법’을 만들어 상정했겠는가?

요즘 나는 그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사랑과 행복이 가슴속으로부터 솟아나와 마음으로 번진다. 내 이웃의 작은 약국에서 비롯된, 사랑이 넘치는 곳에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한다.

수필반 강의 시간에 이 말을 듣고 문우들께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남겨야 한다기에 조그만 약을 사면서 가족관계를 물어 보았다. 노인 어른은 올해 82세고 ‘푸른약국’ 을 운영하는 약사는 3남2녀 중 넷째 딸이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박선영 약사에게 감사를 드린다.

깊은 산 작은 돌 틈에서 솟아난 샘물이 냇물을 거처 큰 강을 이룬다. 우리 동네 작은 약국에서 시작된 효성이 우리 이웃들에게 강물처럼 번져나가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2016.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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