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찾아든 봄
2016.03.27 05:24
베란다에 찾아 든 봄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정정애
2월 4일이 입춘이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결은 겨울 그대로이고, 맨 몸으로 서 있는 나목들을 쳐다보아도 봄의 기척을 느낄 수 없다. 지난해 겨울 폭설로 시작한 첫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바꾸어 놓던 날, 계절의 위대한 변신에 황홀해 했었는데 우수를 지낸 요즈음엔 왠지 봄이 기다려진다.
나박김치 간할 소금을 가지러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진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어디서 나는 향기일까 찬찬히 살펴보니 그 출처는 천리향 화분이었다. 어느새 가지 끝마다 연보랏빛 꽃망울이 벙글기 시작했다.
“아, 부지런하기도 하구나. 반가워! 고마워!”
연신 찬사를 보냈다. 그 향기가 얼마나 멀리 퍼져나갔으면 천리향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랴!
오늘은 외출했다 돌아오니 베란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동양란 화분 하나가 떡하니 거실 안으로 간택되어 버티고 서있다. 솟아 오른 네 개의 꽃대엔 수줍은 듯 꽃이 피기 시작했다. 동양란의 향기는 천리향과 또 다른 품격이다. 거실 가득 난향이 퍼져 온 몸에 봄의 생기가 퍼져가는 것 같다. 창문을 꼭꼭 닫고 살다보니 봄이 오는 줄도 몰랐는데 베란다의 화초들은 겨우 내내 봄을 부르고 있었나 보다.
우리 집 베란다엔 화분이 많은 편이다. 작년 가을 해체되어 분갈이를 해 준 관음죽 만도 열 분이나 된다. 이십여 년 방치하여 화분 속을 꽉 채운 뿌리들을 정리하고 흙을 갈아 주었더니 화분 주변으로 뾰족뾰족 새끼 대공이 올라오고 있다. 팔손이 화분은 겨울도 마다하지 않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더니 이젠 가지 끝에 새 잎이 피어서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그들을 바라보면 내게도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다.
일 년이면 두세 번 피워주는 부겐베리아 꽃이 진한 분홍을 자랑하고, 햇볕 잘 드는 쪽의 제라늄도 연신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보라색 잎의 사랑초도 분홍색 꽃을 많이 피웠고, 갈랑코에 화분에도 꽃망울이 잔뜩 맺혔다. 두툼한 푸른 잎을 곧추세운 군자란 화분에도 꽃대가 세 개나 솟아올라 있다. 머지않아 주황색의 화려한 꽃을 한참동안 피워낼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으아리 꽃나무 마른 가지에서도 연녹색 푸른 새 잎이 움트기 시작했다. ‘나 아직 살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봄은 사람들의 정서를 최대한으로 풍성하게 해주는 요술쟁이 같다. 이 좁다란 베란다에서도 봄이 날라다 준 신비한 선물들로 나를 마냥 들뜨게 하니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창문 틈 사이로 새어든 봄바람이 조금씩조금씩 봄을 날라다 주고 있다.
(2016.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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