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시고기

2016.04.06 10:53

김학 조회 수:102

아빠 가시고기

김 학

나는 어떤 아빠일까? 어느덧 10대 지학(志學)의 단계를 지나 약관(弱冠), 이립(而立)을 거쳐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든 나의 2남 1녀는 나를 어떤 아빠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세 아이들은 모두 전주의 상징인 기린봉 기슭 조그만 한옥에서 태어났다. 아들 둘은 연년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큰아들은 동생에게 밀려 외가에서 자랐다. 그때 나는 매주 주말이면 부자유친을 위하여 처가로 달려가 큰아들과 더불어 놀았다.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의 부자유친행각은 계속되었다.

큰아들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직장 때문에 춘향골 남원에서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말 아빠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아들과 딸아이가 중․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내가 다시 전주로 돌아왔고, 그 아이들을 승용차로 등교를 시켜주기도 했다. 둘째아들은 가까운 중학교에 배정되어 걸어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너무 멀어서 스쿨버스로 통학을 했다. 대학 4년 동안 둘째가 나의 승용차 기사를 맡아 편안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세 아이 모두 승용차 속에서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부모자식 간에 얼굴 보기도 어렵다는 세상에 그런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세 아이들이 서울에서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할 때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고 가끔 편지도 썼다. 최근에는 e-mail을 주로 활용했다. 여유가 없을 때는 일반 메일을 보내고, 시간이 나면 카드 메일을 보냈다.

메일은 참 편리한 도구다. 전화로 통화를 할 때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깜빡 잊고 끊는 일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이 집에 올 때를 대비하여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아두었으나 막상 마주 앉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러나 메일을 이용한 뒤부터는 그런 불편이 없었다.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 싶으면 바로 메일로 보내주었다. 메일을 이용한 자녀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달 미국으로 유학을 간 둘째와는 날마다 메일을 주고받는다. 몸은 만리타국에 떨어져 있지만 메일 때문에 바로 이웃에 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아빠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부자유친 방식이다.

요즘엔 더 편리해졌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주고받으니 더 편리해졌다. 메일보다 손쉽다. 나는 요즘엔 메일보다 카톡을 더 자주 활용한다. 이러한 나의 노력을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텔레비전에서 자연 다큐멘터리 「가시고기」를 보았다. 첨단 방송장비를 동원하여 가시고기 생태의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 낸 걸작이었다. 가시고기는 세계적으로 10여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3종밖에 없단다. 가시고기는 큰 가시고기 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서 등지느러미 앞쪽에 여러 개의 가시와 배지느러미가 퇴화하여 생긴 1개의 가시가 있기 때문에 가시고기란 이름을 갖게 되었단다. 등은 어두운 회색이고 배는 흰색이다. 5센티미터 가량의 가느다란 방추형으로서 집을 짓고 알을 낳는 색다를 습성을 지닌 물고기다. 우리네 식탁에서 구경도 못한 물고기다.

물속에다 정성을 다해서 집을 짓고 알을 낳아줄 암놈을 기다리는 아빠 가시고기. 끈끈한 정액을 내뿜어 알이 떠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부화하도록 도와줄 줄도 아는 지혜로운 아빠 가시고기. 쉬지 않고 지느러미로 부채질을 하여 부화를 준비 중인 알들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아빠 가시고기. 알을 꺼내 먹으려는 침입자를 목숨을 걸고 막아내는 아빠 가시고기.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2세의 탄생을 돌보는 아빠 가시고기. 탈진하여 죽은 뒤 새끼 가시고기들에게 먹이로 육체를 제공하는 아빠 가시고기….

가시고기는 학위 없는 건축가요, 과학자며, 생물학자요, 무사(武士)이며, 헌신적인 봉사자다. 아빠 가시고기의 일생을 보면서 나는 아빠로서의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찮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가시고기의 눈물겨운 부성애(父性愛)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가시고기의 자식 사랑은 차라리 숙명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부성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에 비기면 나의 자녀 사랑은 부끄러울 뿐이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나는 아빠로서 그 정도밖에 한 일이 없다. 내가 그것을 내세워 자식 사랑이라고 우긴다면 가시고기가 웃을 일이다. 한낱 미물인 가시고기가 정말로 성자(聖者)처럼 우러러 보였다.

저들 가시고기는 어떻게 그런 지극한 부성애(父性愛)를 체득했을까? 서당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닐 테고, 학원이나 개인교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어떻게 배웠을까?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가시고기는 그 넓은 물속에서 흩어져 살면서 어떻게 그런 부성애를 물려 줄 수 있었을까?

아빠 가시고기는 새끼 가시고기들이 알에서 부화할 때쯤이면 죽어버리니 새끼 교육엔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하리라. 엄마 가시고기는 알만 뿌려놓고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새끼 가시고기들의 얼굴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시고기의 부성애를 가르쳤단 말인가? 유전? 그렇다. 유전일 수밖에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아빠 가시고기의 헌신적인 부성애를 보노라니 나는 아빠로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가시고기 때문에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나 할까? 뒤늦게라도 반성하면서 깨달음을 갖게 된 것도 아빠 가시고기가 가져다 준 큰 선물임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아빠들이 다큐멘터리 <가시고기>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오는 일요일에 결혼하는 친척 신랑에게 이 다큐멘터리 <가시고기> 녹화 테이프를 축하선물로 주는 것도 바람직하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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